20.08.20 08:15최종 업데이트 20.08.2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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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건설이 싱가포르에서 2천700억원대의 도시철도 공사를 수주했다는 기사를 여러 언론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 구글 뉴스 검색 화면 갈무리

 
지난 7월 20일, <연합뉴스>는 대우건설이 싱가포르에서 2700억 원대의 도시철도 공사를 수주했다는 기사를 출고했습니다.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 경제지들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싱가포르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7월 17일, 육상교통청(이하 LTA : Land Transport Authority)이 도시철도 공사 4건에 대한 계약을 했다며 여기에 대우건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7월 24일, <스트레이츠 타임스>에 대우건설 관련 기사가 하나 더 나왔습니다. 싱가포르 LTA 전 부국장이 120만4000 싱가포르 달러(약 10억3000만 원)의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뇌물을 준 사람 여섯 명 중에 대우건설 소속 한국인이 두 명 있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대우건설 직원 두 명이 LTA 전 간부에게 5만 달러를 빌려주는 것처럼 꾸며서 뇌물로 건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싱가포르 LTA 전 부국장이 120만4000 달러의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됐다는 뉴스입니다. ⓒ 스트레이츠 타임즈 화면 갈무리

 
하지만 이 내용은 <연합뉴스>도 <매일경제>나 <한국경제>도 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우건설이 싱가포르에서 6년 만에 LTA를 상대로 따낸 2700억 원짜리 공사가 LTA 고위 간부에게 건넨 뇌물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상식적인 질문을 한국의 언론들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싱가포르 경찰이 아닌 부패행위조사국(이하 CPIB : 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에서 조사를 하고 결과도 CPIB 홈페이지에 게시가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는 형사 사건의 경우 수사권은 경찰이 기소권은 검찰이 가지고 있지만, 부패사건의 경우에는 CPIB라는 별도의 독립기관이 맡아 수사를 하고 기소권과 다름없는 기소요구권을 행사합니다. (CPIB의 기소 요구권이 거부된 사례가 없어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공수처의 모델, CPIB

싱가포르에서 부패를 몰아낸 일등공신으로 평가받으며 우리나라 공수처의 모델로도 많이 언급되는 CPIB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0세기 초만 해도 싱가포르 역시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그러던 중 1937년 12월 최초의 부패방지법인 부패방지령(POCO : Prevention of Corruption Ordinance)이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법안 자체가 제한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조사 권한 역시 충분하지 못해 싱가포르의 부패는 개선되지 못했습니다.

1951년 10월, 1800 파운드의 아편을 도둑맞는 강도 사건이 발생했는데 여기에 3명의 현직 경찰이 연루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 수사를 위해 특별수사팀까지 꾸려졌으나 결국엔 경찰 한 명이 해고되고 다른 두 명은 퇴직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경찰의 하부조직인 기존의 반부패기관(ACB)으로는 경찰 공무원의 부패 청산이 어렵다고 판단한 당시 식민지 정부는 다음 해인 1952년 CPIB를 신설하여 부패에 대한 수사를 전담시켰습니다. 이게 부패사건전담 독립수사기구 CPIB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경찰이 동료 경찰을 수사하는 걸 모두가 꺼려해서 그 후로도 부패와 관련한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1959년 싱가포르의 첫 선거로 인해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이 집권을 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리콴유 총리는1960년 기존의 부패방지령(POCO)를 대체하는 부패방지법(POCA : Prevention of Corruption Act)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에 의해 CPIB는 수사 범위와 대상의 제한 없이 부패 혐의자를 조사, 체포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소속도 총리실 직속으로 해서 독립성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CPIB 홈페이지에는 굵직한 부패사건의 개요와 결과를 정리해 놓았습니다. 고위권력자도 CPIB의 조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 CPIB 홈페이지 갈무리

 
이후 CPIB는 1975년 당시 환경부 장관이던 위툰분(Wee Toon Boon)을 80만 달러가 넘는 부패 혐의로 재판에 넘겨 18개월의 징역형을 살게 했고, 1986년에는 테 체앙(Teh Cheang Wan) 국가 개발부 장관을 총 1백만 달러의 뇌물 수수혐의로 조사(기소 전에 자살을 했습니다)를 하는 등 권력의 실세에도 거리낌 없는 수사를 해서 국민들의 신뢰를 쌓았습니다.

1994년에는 공공 유틸리티위원회(PUB)의 부위원장 초이 혼 팀(Choy Hon Tim)이 범죄 음모 및 총 1385만 달러의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되어 14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뇌물은 싱가포르 역사상 최고액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1989년에 제정된 편익 몰수법(Confiscation of Benefits Act)에 의하여 부패행위로부터 얻는 이익은 모두 몰수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수사권과 기소요구권을 가지고 있는 CPIB는 권한이 막강합니다. 부패혐의자에 대해서는 지위와 신분에 상관없이 조사를 할 수 있는데 영장이 없이도 체포가 가능합니다. 영장 없이 압수수색도 가능하고 혐의자의 계좌뿐만 아니라 부인이나 자녀 그리고 관련 기관의 계좌까지 볼 수 있습니다.

부패혐의로 조사를 받을 때는 유죄추정의 원칙(무죄추정의 원칙이 아닙니다)이 적용됩니다. 자신이 취한 이익이 뇌물이 아니라는 걸 입증해 내지 못하면 뇌물로 간주하는 겁니다. 특히 공무원들은 매년 본인과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의 재산현황을 공개해야 하고 늘어난 재산에 대한 근거도 제시해야 합니다.

부패사건만을 담당하는 독립기관인 CPIB는 내부자 혹은 시민의 제보를 바탕으로 수사를 시작합니다. CPIB 홈페이지에는 제보를 할 수 있는 화면이 있는데 익명으로도 신고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연락을 위한 이메일 주소 하나만 남겨도 부패 신고가 가능합니다. 
 

CPIB 홈페이지에 올라 와 있는 각종 부패 사건 결과. 따로 표시한 항목이 한국 건설회사 직원의 뇌물 사건 ⓒ CPIB 홈페이지 갈무리

 
고발인의 신분을 철저히 보호하고 고발사건의 민·형사 재판 증인으로 설 수 없도록 제도화했습니다. 고발 내용에 문제가 있어도 고의로 허위신고를 한 경우만 아니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2019년 한 해 CPIB에 접수된 제보는 350건이었으며 그 중 119건이 실제 수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수사 결과는 매 건 CPIB 홈페이지에 게시되는데 한국 건설회사 직원의 뇌물 사건도 여기에 올라와 있습니다.

대우건설 뇌물 사건, 향후 한국 기업 프로젝트 수주에 영향 미칠듯

이처럼 CPIB의 강력한 수사 권한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해져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청렴한 나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가별 청렴도를 비교할 수 있는 지표로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s Index, CPI)라는 게 있습니다. 이 지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얼마나 부패해 있다고 느끼는 지에 대한 정도를 점수로 매기는 건데, 독일에 본부를 두고 있는 글로벌 반부패 NGO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매년 점수와 국가별 순위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NGO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발표한 2019년 부패인식지수 CPI 순위. 싱가포르가 4위입니다. ⓒ 국제투명성기구 홈페이지 갈무리

 
올해 1월에 발표한 2019년 지수에 따르면 덴마크가 87점으로 1위, 뉴질랜드가 2위, 핀란드가 3위입니다. 그리고 4위가 85점을 받은 싱가포르로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10위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한국은 59점으로 39위입니다. (이것도 박근혜 정부였던 2016년 52위에서 많이 올라 간 순위입니다)

싱가포르 언론은 LTA 고위 공무원의 뇌물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뇌물을 주고받은 모든 이들의 소속과 이름 그리고 얼굴을 공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싱가포르에서는 부패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최고 10만 달러(8600만원)의 벌금형을 받거나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으며 특히 정부 또는 공공 기관과 관련된 경우 징역형은 7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뇌물을 주고 받은 이들의 이름과 소속, 얼굴이 모두 공개가 됩니다. 한국인이 두 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부패에 관해서는 무관용으로 일관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한국 대형 건설사 직원이 연루된 뇌물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향후 한국 기업의 다른 프로젝트의 수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이런 사건일수록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널리 알려야 하는데 한국 언론들은 공사 수주 사실만 크게 보도하고, 뇌물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한국 건설 회사의 직원이 세계에서 부패인식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인 싱가포르에서 뇌물을 건네다가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을 한국의 독자들은 싱가포르의 신문을 통해서나 알 수 있는 이런 상황이 한국의 부패인식지수가 59점 밖에 안 되는 이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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