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속 '주연'과 '조연', 그리고 '단역'의 구분은 있을지언정 연기와 인생의 주연, 조연은 따로 없습니다. 액터 인사이드는 연기를 해오며 온갖 희로애락을 겪었을 배우들을 응원하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배우 윤병희.

배우 윤병희. ⓒ 블레스이엔티

 

언제부턴가 오디션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곱씹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떨어지든 붙든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매번 한다고 했다. 그게 배우 윤병희가 공부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영화 <범죄도시>, 드라마 <스토브리그> 등 그의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작품이 하나둘 쌓이고 있다. 조선족 사투리를 쓰는 역할만 세 번 이상, 게다가 지난 드라마에선 실제 야구 선수 스카우터를 섭외한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실감나는 연기를 보였다.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빈센조>에서 그는 금가프라자 상인들을 지키는 법무법인 지푸라기의 남주성 사무장을 맡았다. 홍유찬(유재명) 변호사·홍차영(전여빈) 변호사와 함께 약자들 편에서 각종 궂은일을 담당하는 캐릭터다. 지난 7일 서울 상암동 모처에서 만난 그는 "예전 역할에 비하면 엄청난 신분 상승"이라며 웃어 보였다.

배우 중 가장 마지막 합류, 신의 한 수가 되다

윤병희는 <빈센조>에 참여한 배우 중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남주성 사무장에 맡는 배우를 찾기 위해 제작진이 3개월 넘게 오디션을 봤지만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였고, 윤병희가 나타난 순간 감독은 한눈에 적역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감독님이 느낌이 오는 배우를 찾고 있었는데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문 열고 제가 오디션장에 들어온 순간 느낌이 왔다더라. 사실 그때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오디션을 보게 됐다. 스태프분이 바로 들어갈 수 있겠냐고 하는데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하면 없어 보일까 봐 그냥 들어갔다. 내심 불안했다. 근데 남주성이 온갖 눈치를 보며 일을 진행하는 인물이잖나. 감독님이 제 불안감을 느끼고 캐릭터와 맞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극의 흐름에서 남주성은 홍 변호사 부녀의 든든한 살림꾼이자 동시에 이야기에 맛을 더하는 캐릭터였다. 가짜 빈센조 연기를 하는 순간, 소개팅 장소에 나가서 보인 모습 등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 안에서 뿐만이 아니다. 연출자인 김희원 감독은 지난 제작발표회 자리에서 "힘들 때 웃기 위해 윤병희 배우님 분량만 따로 편집해서 갖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활력소였다. 이 말에 그는 현장에 대한 그리움으로 답했다.

"감독님이 배우에게 애착이 많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 편집본도 가지고 계실걸(웃음). 매번 하는 작품마다 새롭게 다가오는데 이번 현장은 정말 편하고 좋았고 즐겼다.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송중기, 전여빈 등 주연 배우분들이 마음을 처음부터 열어주셨다. 누군가 애드리브를 하면 편하게 받아주고, 감독님도 적극 아이디어를 주시곤 했다.

이번엔 이전과 다르게 캐릭터에 접근하려 했다. 변호사실 사무장이라는 직업적 틀은 있지만 직업 이전에 남주성이라는 사람에 더 끌렸다. 그래서 리허설 때 많이 집중했다. 촬영 전 현장에 일찍 가서 소품 하나하나를 만져보곤 했다. 지푸라기 사무실에 탁상용 달력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매주 토요일 홍유찬 변호사님과 낚시'라고 적혀있다. 소품팀에서 세밀하게 준비해 놓은 거라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반나절 이상 매주 함께 있으니 얼마나 인간적으로 공감대가 많았을까. 그래서 (홍유찬의 죽음 이후) 홍차영에게 삼촌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tvN 드라마 <빈센조>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빈센조>의 한 장면. ⓒ tvN

 
그렇게 윤병희는 촬영 현장과 세트장 소품이 주는 느낌과 동료 배우가 주는 힘을 이용해 남주성을 만들어 갔다. 윤병희는 "남주성이라는 사람이 우리 조직, 우리 사무실에 꼭 있었으면 하는 인물이길 원했다"며 말을 이었다.

"눈치를 보고 패배감에 절어 있기도 하지만 일은 또 잘하잖나. 특수분장도 기막히게 처리했고(웃음). 시청자분들께 친근하면서도 회사나 조직에 꼭 필요할 것 같은 인물이길 원했다. 아무것도 잡을 게 없는 힘 없는 사람들에게 같은 편임을 알려주는데 그래서 아마 재판에서 질 때마다 패배감은 더 쓰렸을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사실 윤병희는 유년 시절 법관을 꿈꿨다고 한다. 아직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던 시절 부모님, 집안 어른들이 법관을 한다고 하면 기뻐했기에 종종 던지던 말이었다고.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무렵, 친누나가 보여준 연극 <교실 이데아>가 강하게 마음에 남았고 시간이 지나도 무대 연기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가서 진로를 결정한 그다. "이왕이면 궁금한 걸 해보자는 마음이 컸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렇게 무대 연기부터 시작한 이후 묵묵하게 그 길을 걷고 있다. 2009년 <7급 공무원> 단역을 시작으로 연극과 영화일을 병행하기 시작했고, 드라마로 영역을 확장했다. 무수한 오디션을 봤고, 몇 번은 떨어지고 몇 번은 붙었다. 쌀국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들었던 <7급 공무원> 오디션 합격 소식은 지금도 그가 잊지 못하는 순간 중 하나라고 한다. 이제 제법 얼굴을 알렸지만, 그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계속 배우 윤병희라는 사람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하면서 벽도 만나고, 그 벽을 넘어 보려 애쓰기도 했다. 그 와중에 <빈센조>까지 만나게 됐다. 이렇게 계속 작업하면서 뭔가 축적되는 느낌이 들어서 저도 성장하는 것 같고, 다짐도 하게 된다. 그 다짐이란 게 담대함을 갖자는 거다. 연기할 때 뭔가 찝찝함이 남을 때가 있는데 그냥 날 믿고 당당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론 익숙함이 되게 무서운 것 같다. 연기하면서 비겁하게 내게 익숙한 표현을 활용하려 한 건 아닌지 생각할 때가 있다. 아직 멀었다, 더 배가 고픈 것도 있고. 작품을 할수록 숙제가 생기는 느낌이랄까. 익숙한 걸 꺼내는 게 아닌 온전히 좀 더 새롭게 창조하려는 역량을 발휘하는 게 제겐 숙제다. 어떤 선배님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자기 목소리라는 게 다들 있다고 위로해주시기도 하지만, 온전히 그 캐릭터가 되어 그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우 윤병희.

"이렇게 계속 작업하면서 뭔가 축적되는 느낌이 들어서 저도 성장하는 것 같고, 다짐도 하게 된다. 그 다짐이란 게 담대함을 갖자는 거다." ⓒ 블레스이엔티

 
이 말을 하는 윤병희의 눈이 깊어졌다. 신혼 때부터 매일밤 했던 다짐인 '가장으로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자'에 최근 한 문장이 늘었다고 그는 말했다. 

"주문처럼 마치 양치하듯 습관처럼 외우는 말이다. 예전엔 행복하자, 좀 더 열심히 하자였다면 좀 더 구체적이 됐다. 내일은 시간을 더 정성껏 써 보자 같은 말을 하곤 한다. <빈센조> 감독님이 한 말이 기억난다. '만남에 안녕은 있지만, 헤어짐에 안녕은 없다'고. 처음에 다들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잘해보자고 시작하잖나. 근데 작품을 끝냈다고 서로 '잘 가요'라고 하진 않는다. 어딜 가든 자기 현장에서 잘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코로나19로 가슴이 아팠던 게 다들 마스크를 쓰고 촬영하느라 스태프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거다. 나중에 제가 알아봐야 하는데 얼굴을 제대로 보질 못하잖나. 막판에 그래서 감정이 훅 올라온 적이 있다. 나름 그분들의 눈을 하나하나 기억에 담으려 했다. 이번에 복 받은 경험을 잘 품고 저 역시 다른 곳에서 잘 해내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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