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인트로덕션> 메인 포스터

영화 <인트로덕션> 메인 포스터 ⓒ (주)영화제작전원사


01.
서문. 한 편의 영화를 설명할 타이틀로 적합하지 않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인트로덕션(Introduction).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쓰여 있기에 그 이질감이 조금 사라진 기분이다. 가끔 이렇게 가까이 있지 않은 표현이 어떤 이질감의 농도를 낮추기도 한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인트로덕션>은 주인공 영호(신석호 분)를 중심으로 세 편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김영호 분)와의 관계를 표현한 1부의 내용을 시작으로, 그의 여자친구 주원(박미소 분)의 이야기가 담긴 2부를 지나면 마지막으로 어머니(조윤희 분)와의 이야기가 담긴 3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 편의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지만 전체의 내용에서 그 흐름이 큰 영향력을 갖지는 못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지만 가까이 존재하는 듯, 다시 먼 곳에 위치한다.

02.
1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한 남자가 자신의 재산까지 다 바치겠다며 기회를 한 번만 더 달라고 기도를 한다. 영호의 아버지다. 한의사인 그는 지난밤 아들을 병원으로 불렀다. 오늘 볼 수 있으면 보자는, 애매한 태도로 말이다. 아들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다 어렵게 받았고, 병원을 찾았다. 영호를 보고 반가워하는 간호사(예지원 분)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아버지의 한의원을 찾아온 건 정말 오랜만인 듯하다. 아주 어릴 때 보고 지금 성인이 된 영호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정작 아들을 부른 아버지는 밖을 내다보지도 않다가 잠깐 나와서는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진료실로 들어가 버린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고 어색하다. 영호가 자주 찾지 않은 것이 아버지의 한의원만은 아닌 듯싶다.

아들과 아버지의 어색한 거리 사이로 배우(기주봉 분)가 비집고 들어선다. 그의 방문을 아들과의 만남보다 훨씬 더 크게 반기는 아버지. 밖에서 아들이 기다리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은 채 청하지도 않았던 배우의 진맥을 잡고, 또 점심을 같이 먹자고 먼저 청한다. 영호가 대기실에 앉아 잠깐 눈을 붙이고 병원 앞 골목에서 담배를 몇 개피 피는 동안에도 진료실을 나올 생각이 없는 아버지. 그를 대신해 간호사가 영호의 옆에서 말동무가 된다. 내리는 눈을 보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포옹으로 반가움을 나누는 두 사람이다.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주)영화제작전원사


03.
2부. 방에서 한 여자(김민희 분)가 걸어 나온다. 여자의 집 아래에는 그녀를 만나러 온 모녀가 함께 서 있다. 앞서 1부에서 등장했던 남자 영호의 여자친구인 주원과 그녀의 어머니다. 주원의 엄마는 오래전, 여자와 친했던 사이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예전의 그 가느다란 인연을 붙잡고 여자의 집에 신세를 지려 한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딸이 독일에서 의상 공부를 하는 동안 머물 곳을 부탁하려는 것이다. 한국에서 공부도 잘했다는 여자는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겠다며 독일로 떠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단다. 여자를 아직 만나기도 전이지만 엄마는 딸이 여자의 말동무도 하면서 함께 지내면 외롭지 않을 거라며, 누구를 위로하는지도 모르는 말을 일단 뱉는다. 사실 그녀의 딸은 원래 의상 공부를 한 것도 아니면서 그냥 옷을 조금 좋아했다는 이유로 여기 독일까지 날아왔다.

"충동이 있어야 살아있는 거지."

어색한 세 사람의 만남이 정리되자, 주원은 남자친구인 영호가 자신을 따라 독일에 온 것 같다며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엄마는 이 상황을 황당해하며 부정적인 모습을 내비치고, 여자는 충동이 있어야 살아있음을 느끼는 게 아니냐며 좋아하는 눈치다. 영호는 여자 친구가 독일로 떠나버리자 마음이 아파서 무작정 따라왔다고 한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싫다며 자신도 독일로 건너와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돈이 없지만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단다.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하는데 당연히 도와 줘야지. 아니면 그게 사람이냐.'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대화로 두 사람은 행복한 상상을 한다.

03.
이 영화의 1부와 2부는 기다림과 충동적 행위의 지점에서 만난다. 1부의 내용은 기다림이다. 아버지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들과 두 사람이 만나기를 기다리는 간호사. 의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환자와 배우. 심지어는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호를 기다리며 근처 카페에 있을 주원의 모습도 있다. 그 시간에 대응하는 각자의 모습은 모두 다르지만 인물들 모두는 자신이 놓인 자리에서 덩그러니 놓인 시간을 유영한다. 어떤 시간은 자신이 만들었고, 또 어떤 시간은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2부는 충동적인 행위들로 가득하다. 갑자기 한국을 떠나 독일로 향한 여자가 그랬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또 같은 나라로 떠나온 주원의 행동이 그렇다. 그녀를 따라 함께 떠나온 엄마는 물론, 남자친구 영호의 독일행에도 1부에서 지켜 본 기다림과는 전혀 반대의 행위들이 묻어난다. 충동으로 가득한 현실에서 계획하는 그들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 먼저 독일에 와 있던 여자의 성취를 증명할 대상이 무엇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거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유학을 외치는 인물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어쩌면 여자는 그래서, 의상 공부를 하러 독일에 왔다는 주원에게 이렇게 딱 한 마디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힘들 텐데, 잘해 보세요'라고.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주)영화제작전원사


04.
3부. 강원도 양양의 어느 바닷가 횟집에서 영호의 엄마(조윤희 분)와 배우가 횟집에 앉아 있다. 아들 영호도 지금 오고 있다. 3부의 내용에서 영호는 연기를 시작했다. 1부의 내용에서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두 사람이 한의원에 함께 있던 날 영호가 그 배우를 만나고 난 뒤에 꿈을 가지게 되었단다. 배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지만, 엄마의 말에 따르면 얼굴이 좋으니 배우를 해도 되겠다며 말을 건넨 일이 계기가 되었단다. 엄마는 그 인연을 빌려 자신의 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만난 배우와 영호 두 사람이 술에 취해가는 동안 영호가 힘이 드는 일이 있어 연기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꺼낸다. 영화를 찍는 동안 키스하는 장면을 찍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당시에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행위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연기하는 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단다. 그의 말에 배우는 크게 흥분하며 열변을 토한다.

"그게 뭐가 죄스러워. 죄는 무슨 죄! 죄가 어디 있어? 사람이 사람을 안는데 그게 장난이면 어떻고, 그런 것 속에 무슨 놈의 죄가 있어. 장난으로 안아도, 가슴으로 안아도 다 사랑이야. 장난이건 연기건 가짜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건 다 사랑이야. 작게라도 좋은 거 밖에 없어.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건데! 그게 무슨 죄악이야. 왜 그래. 젊은 친구가 왜 그래!"

05.
1부와 2부가 의미적으로 자연스럽게 상응하던 것과 달리, 3부의 내용은 어딘가 모르게 모가 나 있는 느낌이다. 배우가 일갈을 내뱉는 저 장면이야말로 3부의 핵심이 될만한 지점의 내용이며 대개의 경우에 의미는 그 속에 담겨있기 마련이기 때문. 하지만, 이 지점에서 영화 <인트로덕션>의 의미가 진짜 드러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글의 가장 처음에서 시작했던 단어, '서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연결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로 직전에 나 스스로 1부와 2부의 연결고리를 찾아 의미를 심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 영화를 관람하고 해독하는 이들의 행위일 뿐, 적어도 영화 자체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의 '서문'. 영화는 책이나 논문 따위의 첫머리에 내용이나 목적 따위를 간략하게 적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금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같다. 1부에서 한 덩이, 2부에서 또 한 덩이.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또 다른 뭉텅이를 그냥 던져낸다. 물론 모습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것들을 가져다 놓지는 않는다. 적어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주)영화제작전원사


06.
다시 한 번 3부의 장면들을 꿰매 본다. 횟집을 나온 영호가 바닷가를 걷다가 옛 연인이었던 주원을 만나는 장면부터가 다시 시작이다. 주원은 자신이 많이 아프고 힘들어서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했다 말한다. 포도막염이라는 병에 걸려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의사들도 원인을 몰라 스테로이드만 넣고 있단다. 독일에서 결혼한 남편과도 헤어지고, 그 생활이 힘들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영호와 헤어진 벌을 지금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는 그녀다. 그녀를 보러 독일에 갔을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영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이 그 눈을 고쳐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순간 전환되는 화면. 영호와 주원의 만남은 마치 꿈인 듯 아닌 듯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다. 갑자기 술에 취한 영호가 차에서 쉬다 나오는 장면으로 변한다. 두 사람의 재회가 실제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감독은 또 다른 하나의 서문을 던졌을 뿐이고, 의외로 이 덩어리는 앞선 덩어리(사랑에 대한 배우의 일갈)와 달리 다른 지점의 이야기들과 제대로 잘 달라붙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 추론이다. 1부에는 아버지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영호가 있고, 2부에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주원이 있으니, 3부에서도 영호는 주원의 눈을 고치지 못하고 주원 역시 눈이 낫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작품에서 의미적 교환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영화 <인트로덕션> 스틸컷 ⓒ (주)영화제작전원사


07.
영화의 마지막. 영호는 추운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진다. 역동적이다. 그저 파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움직이고자 한다. 곧 밖으로 빠져나온 영호를 뭍에 있던 친구가 끌어안는다. 온기를 나눈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모든 '장(章)'에는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이 있었다. 영호와 간호사, 영호와 주원, 그리고 바닷가의 두 친구.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렇게 또 던져진 장면들을 끌어다가 이어 붙이고 만다.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가 감독이 지향하는 지점의 또 다른 차원이라는 생각이다. 매일 아침의 현장에서 그 날 느끼는 영감으로 장면을 만들어가는 것이 감독의 작업 방식이라고 했었다. 그저 그 발원의 조각들을 날 것 그대로 던져 놓은 듯한 느낌. 그리고 그 조각들을 모두 모아 무언가의 '서문'이라고 표현한 것까지. 이 모두에 현혹된 뒤에 쓰인 것이 이 글인 셈이다.
영화 인트로덕션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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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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