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한 발의 총성으로 영구 통치를 꿈꾸던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이 땅의 민주화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이 나라의 장악을 노린 군부세력의 12.12 군사 쿠테타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잔인하고 끔찍한 학살로 인해 또 한 번 허무하게 꺾이고 말았다.

그렇게 두 번의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대가 지나고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숨죽이던 대중 예술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 방영된 국민드라마 <모래시계>와 장선우 감독이 연출한 영화 <꽃잎>, 설경구라는 걸출한 배우를 배출한 <박하사탕>, 대한민국의 1980년대를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했다고 평가 받은 드라마 <제5공화국>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2007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한 편이 만들어져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 < 공동경비구역JSA >의 원작이 된 소설 < DMZ >의 작가이자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와 <육룡이 나르샤>의 각본을 쓴 박상연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2004년 <목포는 항구다>로 데뷔했던 김지훈 감독이 연출해 전국 730만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던 영화 <화려한 휴가>였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화려한 휴가>는 잊어선 안 될 대한민국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환기시킨 작품이었다.

<화려한 휴가>는 잊어선 안 될 대한민국의 가슴 아픈 현대사를 환기시킨 작품이었다. ⓒ CJ엔터테인먼트

 
<살인의 추억> 뛰어넘은 김상경 최고 흥행작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에 특전사로 군복무를 마친 김상경은 연극배우로 잠시 활동하다가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김상경의 데뷔작은 1998년 이영애, 손창민, 전광렬, 송윤아 등 스타배우들과 함께 출연했던 드라마 <애드버킷>이었다. 그리고 1999년에는 드라마 <왕초>에서 김춘삼(차인표 분)의 도움으로 거지패에 숨어든 유학파 엘리트 이한영 역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MBC와의 전속 기간이 끝난 후 KBS의 <초대>와 <눈꽃>, SBS의 <메디컬센터> 등에 출연한 김상경은 2001년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생활의 발견>을 통홰 춘사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김상경은 2003년 봉준호 감독을 만나 <살인의 추억>이라는 희대의 걸작 영화에서 서울에서 파견 온 서태윤 형사를 연기했다. 하지만 김상경은 엄청난 열연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에게 내주고 말았다.

김상경은 <살인의 추억> 이후 영화 <내 남자의 로맨스>와 <극장전> <조용한 세상>, 드라마 < 2004 인간시장 > <변호사들> 등에 출연했지만 김상경이라는 배우를 대표하는 캐릭터를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살짝 주춤하는 듯했던 김상경은 2007년 영화 <화려한 휴가>로 전국 730만 관객을 동원하며 개인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고 2008년에는 KBS 대하사극 <대왕세종>에서 세종대왕을 연기하며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대왕세종> 이후 활동이 다소 뜸했던 김상경은 2012년 설경구, 손예진과 함께 김지훈 감독이 만든 <타워>를 통해 510만 관객을 모았고 엄정화와 함께 출연했던 <몽타주> 역시 20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4년에는 KBS 주말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 출연하면서 시청률 40%를 달성했고 2016년 <장영실>에서는 또 한 번 세종대왕을 연기했다(당시 김영철 배우 역시 <대왕세종>에 이어 또 한 번 이방원을 연기했다).

김상경은 2017년 심은경, 이승기 주연의 <궁합>에서 영조를 연기하며 '왕 전문 배우'의 위엄을 뽐냈고 같은 해 3월에는 김희애, 김강우와 함께 <사라진 밤>에 출연했다. 작년 드라마 <라켓소년단>에서 해남서중 배드민턴부 코치로 변신했던 김상경은 오는 8월 첫 방송되는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에서 괴짜의원을 연기할 예정이다. 김상경은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현대극과 사극, 코믹한 역할과 진지한 역할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730만 관객이 함께 분노했던 그 시절의 비극
 
 <화려한 휴가>는 김상경은 물론 이요원의 배우 커리어에서도 가장 흥행한 영화였다.

<화려한 휴가>는 김상경은 물론 이요원의 배우 커리어에서도 가장 흥행한 영화였다. ⓒ CJ엔터테인먼트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는 철저하게 광주시민들, 그리고 그 시절 군부에 맞서 싸운 시민군들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따라서 시민군들이 광주MBC와 KBS광주방송총국, 세무서건물 등을 방화했던 사건 등은 축소 또는 삭제돼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또한 끝까지 군부에 맞서 싸우자는 강경파와 군부와 협상을 하자는 온건파의 갈등 역시 영화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화려한 휴가>는 비극이 커지면서 주인공 강민우(김상경 분)의 캐릭터가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동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좋아하는 여성과의 사랑을 꿈꾸던 순박한 택시기사 민우는 눈 앞에서 동생 진우(이준기 분)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한 후 크게 분노해 시민군에 가담한다. 해병대 출신의 민우는 시민군의 선두에 서서 계엄군에 저항하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맞고 안타깝게 숨을 거둔다.

강민우와 박흥수(안성기 분)를 비롯해 시민군으로 참여한 인물들은 대부분 도청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목숨을 잃지만 박흥수의 딸이자 전투 참여를 허락받지 않은 박흥수의 딸 박신애(이요원 분)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박신애는 대신 차량에 확성기를 설치해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호소방송을 한다. 배우 이요원은 촬영 현장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장면을 찍으면서 가짜총의 실감나는 소리와 현장 분위기 때문에 실제로 겁에 질렸다고 한다.

<화려한 휴가>는 2007년 국내에서 개봉했던 영화들 중에서 <디워> <트랜스포머>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관객(730만)을 동원했다. 당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모으며 840만 관객을 모았던 <디워>와는 제법 차이가 났지만 1억 5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마이클 베이 감독의 블록버스터 영화 <트랜스포머>(740만)와는 단 10만 명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화려한 휴가>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데뷔작 <목포는 항구다>에 이어 <화려한 휴가>로 흥행감독이 된 김지훈 감독은 2011년 <디워>에 이은 또 한 편의 괴수영화 < 7광구 >를 연출해 흥행과 비평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2012년 <타워> 이후 오랜 공백을 가졌던 김지훈 감독은 작년 차승원과 김성균, 이광수 주연의 <싱크홀>로 210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지난 4월에는 2017년 촬영을 마치고 4년 넘게 개봉을 못했던 영화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를 개봉시켰다.

51분 만에 영화에서 퇴장하는 '석류청년' 이준기
 
 이준기는 영화 시작 51분 만에 총에 맞아 퇴장했지만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준기는 영화 시작 51분 만에 총에 맞아 퇴장했지만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CJ 엔터테인먼트


<화려한 휴가>가 개봉했을 당시 이준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젊은 배우였다. 따라서 이준기가 <화려한 휴가>에서 김상경의 동생으로 출연한다고 했을 때 관객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하지만 이준기는 영화 시작 51분 만에 계엄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영화에서 퇴장한다. 물론 이준기를 보러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그의 짧은 분량에 크게 실망했지만 이준기가 연기한 진우는 민우가 시민군에 합류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캐릭터였다.
 
광주광역시 태생으로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가장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배우 박철민은 <화려한 휴가>에서도 월남 방위 출신의 허풍 강한 분위기 메이커 인봉을 연기했다. 특히 민우에게 영화 <록키>를 설명하면서 <목포는 항구다>에서 자신이 했던 명대사를 셀프 패러디하는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인봉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아내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지만 신애의 방송을 듣고 시민군에 재합류해 전투 중 총상을 입고 전사한다. 

2000년대 충무로를 대표하는 다작배우 중 한 명이었던 박원상도 전남 화순 출신의 양아치 용대 역으로 출연했다(실제 박원상 배우는 서울 출신이다). 인봉과는 택시기사와 손님으로 만나 악연을 만들지만 시민군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둘도 없는 벗이 된다. 용대는 인봉과 함께 고향을 향해 절을 할 때 인봉과 달리 엎드려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는데 알고 보니 죽음을 앞둔 두려움에 오열하고 있었다.

<선덕여왕>의 염종, <히트>의 연쇄살인마를 연기했던 엄효섭은 <화려한 휴가>에서 군인의 임무와 정의,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김상원 대위 역을 맡았다. 김대위는 엔딩 결혼식 사진에 등장하는 유일한 군인인데 사진 속에는 생존자인 신애 혼자 표정이 굳어 있고 사망자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생사가 불분명한 김대위는 사진 속에서 지긋이 미소를 짓고 있어 관객들은 김대위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게 아닌가 예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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