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편집자말]
여성 서사가 대세다. 남성 감독이 만든 남성 이야기들은, 조금은 식상하다. 그 남성서사가 영화의 탄생 이래 반복돼 온 만큼 전형성과 보편성이 담보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새롭거나 유의미한 서사를 창조해 낼 여지가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극장가의 흐름을 2030 여성 관객들이 주도해왔던 역사를 떠올리면 이제야 여성서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의아할 정도인 것도 맞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다수의 한국영화들이 여성이 주인공이고, 또 여성 감독들이 연출한 작품이라는 점은 그러한 수년 간의 경향을 재확인시켜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제15기 장편제작 연구과정 작품이자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 출품작인 <교토에서 온 편지>의 스크린 안팎 풍경은 그러한 경향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먼저 스크린 밖. 연출과 각본, 편집을 도맡은 1990년생 김민주 감독은 물론 <교토에서 온 편지>의 주요 스태프들은 모두 여성이다. 여기에 프로듀서와 촬영, 프로덕션 디자인, 음악 모두 여성 스태프들이 참여했다.

이야기 자체도 일찍이 사망한 아버지가 부재한 '네 모녀'의 이야기다. K-장녀 혜진(한채아)는 고향을 지키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둘째 혜영(한선화)은 작가의 꿈을 쫓아 서울로 떠났으며, 막내 혜주(송지현)는 졸업과 동시에 독립을 하고 싶은 고등학생이다. 이 세자매의 엄마(차미경)는 지속적으로 자잘한 기억들을 깜빡깜빡하는 중이다.

여성들로 이뤄진 가족의 이야기는 혜영이 서울에서 본가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그 본가가 부산 영도다. 여성들의 서사에 지역성을 결합시킨 경우다. 부산영상위원회가 신설한 2021 메이드 인 부산(Made In Busan) 장편영화 제작지원 사업 선정작이기도 하다. 김민주 감독의 이 장편 데뷔작은 영도에서 자고 나란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더해졌고, 부산 출신이거나 부산에서 거주하는 스태프들이 다수 참여했다.

여성 서사와 지역성의 결합 만으로 남다른 개성을 띠는 <교토에서 온 편지>는 딸들이 몰랐던 엄마의 과거를 추적해나가면서 이야기의 폭을 확장시킨다. 아버지의 제사를 계기로 영도에서 휴가 아닌 휴가를 보내는 혜영. 둘째를 중심으로 네 인물의 한때를 섬세하고 온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는 섬세하고 결이 고운 한편의 장편소설을 닮아 있다.

여성서사와 부산 영도가 만났을 때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 ⓒ 부산국제영화제

 
어머니도, 딸들도 몰랐다. 제사상에 아버지의 사진을 빠뜨렸다는 사실을. 이것은 아버지의 부재와 상관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리란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그렇다. 나름 불안하면서도 견고한 일상을 쌓아올린 네 모녀에게 가부장의 존재는 그리 중요치 않다.

첫째 혜진은 가족의 안위가 먼저다. 자신과 서울로 가자는 부유한 전 남친에게 가족을 책임질 거냐고 물었을 정도다. 살갑게 엄마와 막내를 챙기는 건 아니지만 가족의 든든한 배경인 것만은 확실하고, 본인도 그렇게 믿고 행동하고 있다.

둘째 혜영은 조금 복잡한 상황이다. 사립대 문창과를 나와 전업 작가의 꿈을 꾸며 상경했지만 등단은 아직이다. 혜영이 생계를 위해 방송작가 일을 병행하는 걸 두고,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둘째 딸을 성공한 방송국 PD라 거짓말을 한 상태다. 남자 친구를 피해 영도행을 택한 혜영에게 아버지의 제사는 핑계에 가깝다.

막내 혜주는 그런 혜영이 일종의 롤모델이다. 댄서가 되고 싶은 혜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영도를 떠난 둘째 언니가 부럽다. 졸업 후 혜영의 서울집에서 동거를 할 수 있으리란 꿈에 부푼다. 하지만 생활의 안정이 우선인 엄마와 첫째 언니의 반대가 두렵다. 꿈을 고백하는 일이 쉽진 않다. 

<교토에서 온 편지>가 엄마의 일상과 과거를 극의 중심에 놓은 것은 의외이면서도 중층의 의미를 부여하는 남다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갈수록 기억을 잃는 것 같은 엄마의 상황은 통통배 타던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말하는 "영도도 많이 변했다"는 지역성과 맞닿아 있다.

영도대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섬이었던 영도를 딸들은 떠나거나 떠나려고 하고, 지키거나 돌아올까 고민한다. 그런 영도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엄마의 과거 기억은 딸들이 알지 못하던 하나의 역사다. 딸들이 서로 간 갈등을 극복하고 개인의 고민을 해결하며 엄마의 역사를 함께 궁금해하고 쫓아 나갈 때, 가족의 균열은 서서히 봉합돼 나간다. 그게 그리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그럴 이유가 있어 보인다.

엄마의 기억과 마주하는 세 딸들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 스틸 ⓒ 부산국제영화제

 
엄마의 기억을 마주하는 세 딸들의 입장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는 글감을 핑계로 일기장 같은 옛 물건들을 버리기 싫어한다. 엄마는 냉장고든 수납장이든 버리지 못하고 꽉꽉 채워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엄마의 습관을 제일 싫어하는 것도 둘째요, 기억을 잃는 엄마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둘째 혜영이다.

첫째가 시큰둥한 건 실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다. 오로지 당면한 미래가 고민인 막내는 아직 그런 가족의 갈등이 체감되지 않는다. 서울에 가기 위한 막내의 철없는 행동이 쌓여왔던 네 모녀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제목에서 알수있듯, 엄마의 과거 기억은 결국 역사적 상흔과 결부돼 있고, 결과적으로 부산 그리고 영도라는 지역성과 단단히 결부돼 있다. 역사의 문제가 지역의 문제로, 다시 세대의 문제이자 소통의 변곡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체는 세 딸들이다. 그 기억을 네 모녀가 함께 찾아 나설 때 <교토에서 온 편지>는 관객들에게 어떤 안도감과 위로를 건네 준다. 갑갑하고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일상에서 어떤 돌파구를 내고 가족과 나를 함께 보듬으려는 어떤 시도를 마주하는 일은 분명 감동적이다.

한편의 장편 소설 같다는 표현을 쓴 건 그래서다. 소소한 듯 결코 소소하지 않은 서사와 그 서사 속 다층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인물들을 섬세하고 균형감 있게 잡아내는 재현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 같다는 표현이 꼭 '영화적이다'의 반대말이 아닌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된 서사 안에서 인물들의 반경을 온전히 따라가는 것 자체로 영화적 재미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배우들의 연기. 한채아나 한선화처럼 부산 출신 배우들이 선사하는 캐릭터들의 부산 방언 연기는 그 자체로 여성들의 시선과 입장에 밀착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영화에서조차 흔치 않은 장면들이다.

티빙 웹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로 연기력을 발산한 한선화의 차분한 연기도 일품이고, 만만치 않은 역할을 소화한 엄마 역의 차미경 역시 녹록지 않은 연기력을 자랑한다. 후반부, 두 모녀가 마주하는 장면과 연기는 이 장편소설 같은 여성서사의 결말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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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및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https://brunch.co.kr/@hasungtae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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