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한 남자>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한 남자>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문구점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펜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이름은 리에(안도 사쿠라 분). 이혼을 하고 아들 유토와 함께 고향에 내려와 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다이스케(구보타 마사타카 분)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핑계로 매일 같이 문구점을 찾아와 리에에게 관심을 표현한다. 곧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스케가 나무를 베는 임업 작업장에서 일을 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리에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그 슬픔도 잠시, 더 큰 충격이 그녀를 덮친다. 그의 형 타니구치가 찾아와 남편의 사진을 보더니 그는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말한다. 세월에 얼굴이 변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말이다. 두 사람은 혼란에 빠진다.

"그럼 이 사람은 대체 누구죠?"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된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신작 <한 남자>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작품이다. 타인으로 살았던 한 남자의 뒷모습을 통해 무거운 과거를 마주해가는 이들을 그린 이번 작품은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으로 옳긴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의 본연적 한계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고 어려운 질문을 묵직하게 그려낸다.

02.
영화는 리에가 마주한 낯선 사람에 대한 문제가 재일 교포 3세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 분)에게 전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DNA 검사 결과 다이스케로 알고 있던 남편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남편이었던 사람의 이름도 과거도 기억도 모두 낯선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다. 이로 인해 혼인 관계가 말소되는 것은 물론 그녀는 더 이상 유족의 자격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이제 남게 되는 것은 지금 죽은 이 남자가 원래 알고 있던 다이스케라면 그를 대신해 죽은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와 진짜 다이스케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의 아내로 5년이라는 시간을 행복하게 살아온 리에의 입장에서도 남는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다이스케라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동안 다이스케라고 알고 있던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온전히 알고 있다고 했던 사람의 정체가 한순간에 모두 증발해버린 느낌. 그녀는 누구의 인생과 함께 했었던 것인지 혼란스럽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한 남자>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한 남자>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존재의 행방을 쫓던 키도는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를 통해 이 사건이 5년 전 호적 교환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건의 브로커 일을 맡았던 그는 세상에는 자신의 과거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슬쩍 운을 띄운다. 다이스케 역시 그런 케이스 중에 하나로 보인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 수감되어 있는 자신 역시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알고 있지만, 그 역시 교환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 이르러 작품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 주제 의식을 전면에 드러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가까운 물음이다.

자신에게 의뢰된 한 남자의 존재를 찾으면서 키도는 점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 교포로 살아야만 했던 그의 배경과 더불어 타인이 인지하는 자신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 사이에 몇 겹의 가면이 덧씌워져 있을지 가늠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와 아내의 가족들만 하더라도 재일 3세면 일본인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은 결국 그가 재일 교포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영화는 여러 장면을 통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아버지가 바뀔 때마다 성을 바꿔야만 했던 아들 유토의 이야기도 그 선상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 <한 남자>의 화자가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리에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만 했던 다이스케도 아닌, 키도로 설정되어 있는 부분은 그래서 더 눈길을 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개인의 문제로 끝이 날 수 있었던 주제가 사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제삼자인 키도를 통해 전달되면서 관객들 모두에게 전이되는 데 훨씬 더 용이해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영화 내부의 개인적 문제가 사회적 함의의 문제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04.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다이스케를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면서 흐릿하게 놓여 있던 이야기들이 다시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느끼는 남자의 등장으로 영화는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간 모습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이 증오하는 그 아버지란 사람과 닮은 사람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데 자신의 몸속에 그 사람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그는 괴로워한다. 조금은 철학적일 수 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현재의 나는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지만 감정적으로나 의식적으로도 무형적인 어떤 연결 고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와도 같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나는 정말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드라마적인 장르로 시작해 추리 영화의 결을 따르고, 다시 리에와 아들 유토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작품의 구조는 빠르고 강한 속도감보다는 다소 느리면서도 차분히 진행되는 감독의 연출과 만나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한번 더 곱씹을 수 있게 유도한다. 특히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작품의 핵심 주제로 놓으면서도 그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 물음(범죄와 환경의 상관관계나 사형 제도에 대한 시선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타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같은 지점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오는 작품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 호흡은 더욱 중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한 남자>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한 남자>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한편, 14일 오전에 열린 폐막작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시카와 케이 감독은 이 작품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키도라는 인물이 재일교포 3세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두고 너무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당부를 했다. 이 설정의 경우에는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따른 것도 있지만, 사회적 문제를 내세울 생각보다는 그저 일본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내고자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쉽게 만나보기 힘든 사회파 추리 영화의 특성상 전반적인 내용이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거나 중간에 한 번 흐름을 벗어나면 이해에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한 남자>에 마음을 계속 두게 되는 이유에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이끌어 가며 침전된 분위기 속에서도 세밀한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호연이 있다. 그리고 기나긴 추리 끝에 남는 철학적 물음은 작품의 엔딩 크레딧 너머로 돌아서는 관객들 역시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 한남자 안도사쿠라 츠마부키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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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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