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994년 10월 21일.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대도시인 서울 한복판을 이어주는 한강의 다리였던 성수대교가 갑자기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믿기 어려운 사건이 벌어졌다. 마치 영화에서나 상상할 법한 비현실적인 재난에 전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에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90년대 선진국 진입을 바라본다던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은, 화려한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가려져있던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낸 비극이었다.
 
12월 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55회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그날을 조명했다. 10월 21일 오전 7시, 그날 서울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같은 시각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일정에 따라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 이경재씨를 포함한 서울경찰청 소속 의경 11명은 '경찰의 날'을 맞이하여 모범 의경 표창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삼성동의 한 아파트에서는 같은 학교 교사이던 네 사람이 르망 승용차를 타고 함께 카풀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한편 고등학교 2학년생 이윤아양은 아빠의 차를 통하여 등굣길에 올랐으나, 냉전중이었던 부녀는 별다른 대화없이 어색하게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3학년생이던 정승원양은 지각을 할까봐 16번 버스를 잡기 위하여 헐레벌떡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의경 승합차와 르망 승용차, 16번 버스는 모두 같은 시각에 성수대교로 진입했다. 출근 시간에 비까지 겹쳐 도로는 꽉 막힌 상황이었다. 그때 승합차에 타고있던 이경재씨는 툭툭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 앞유리에 정체불명의 돌조각들이 부딪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이경재씨가 전방을 주시하는 순간,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갑자기 도로가 솟구쳐 올라왔다. 차가 뒤로 확 쏠리는 느낌을 받은 이경재씨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외쳤다. 잠시후 쿵하는 소리를 끝으로 이경재씨는 의식을 잃었다. 모든 것이 찰나에 가까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후 정신을 차른 이경재씨의 눈에 비친 주변은 온통 물이었다. 차에서 내려 위를 올려다본 이경재씨의 눈에 부서진 성수대교와 그 위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경재씨와 의경 등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한강 다리 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당시 실제 신고 내용을 들어보면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신고자에 비하여 정작 대답하는 대원의 반응은 시큰둥하게 들린다. 그만큼 도심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다리가 끊어졌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믿지 못 하고 장난전화로 생각했던 것.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당국은 인근 소방서와 경찰, 군인들까지 현장으로 총출동했다.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는 사고 당시 남쪽에 위치한 10번과 11번 교각이 마치 칼로 잘라낸 것 같이 끊어진 상태였다. 추락한 상판의 크기는 가로 19미터, 세로 48미터에 이르렀다. 다리와 함께 추락한 차량은 모두 4대, 의경들이 탑승한 파란색 승합차와 검정색 프라이드는 비교적 멀쩡했다. 비교적 천천히 달리다가 상판과 동시에 떨어져서 충격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상판 끝쪽에 위치한 세피아 자동차는 파손 상태가 심했지만 다리가 분리되면서 튀어나온 철근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서 바다로 추락하지는 않았다. 피해가 가장 심한 것은 16번 버스였다.
 
사고 당시 다리가 끊어진 구간 지나고 있던 버스는 성수대교가 무너질 때 충격은 받았지만 바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뒷바퀴 쪽이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리며 대롱대롱 매달리는 형태가 됐다. 구조상 무거운 엔진이 뒤쪽에 위치한 데다 하필 출근길에 많은 승객들로 가득했던 버스는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을 잃고 뒤집힌 채로 20미터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들도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차로 구조팀이 도착한 곳은 무너진 다리 위였고, 떨어진 상판 위로는 진입이 불가능한 위치라 그저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면서 속수무책이었다. 피해자들을 구조하려면 구조대가 다시 멀리 한강 아래로 내려서 돌아가야 했고, 선박의 도움이 있어야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조팀도 처음 겪어보는 황당한 상황에 우왕좌왕하다가 시간을 지체하게 된 것.

그 무렵 상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촌각을 다투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상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세피아는 물에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운전자였던 33세의 기몽서씨는 의식을 찾고보니 눈앞에 뾰족한 철근들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기몽서 씨는 필사적으로 창문을 깨고 차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시각, 다급하게 물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망 승용차에 탑승했던 교사들이었다. 르망은 원래 상판위에 떨어진 4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다리가 무너지면서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그대로 강물 위로 추락한 것. 교사들은 다행히 창문을 깨고 차량을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하필 비가 내려 거세진 물살에 휩쓸리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조대도 아직 도착하지 못한 위기의 순간, 몸을 던지며 나선 것은 떨어진 승합차에 탑승해있던 의경들이었다. 이경재씨를 비롯한 의경들은 다행히 추락하면서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청하며 위태로운 상황을 파악한 의경들은 곧바로 몸을 사리지 않고 물에 뛰어들거나 차량에 고무줄을 연결하며 두 명의 교사를 무사히 구해냈다. 하지만 같이 탑승했던 두 사람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각 추락했던 버스에서는 더욱 참혹한 상황이 펼쳐져있었다. 추락의 엄청난 충격으로 버스는 허리춤밖에 오지않을 정도로 찌그러진 상태였다. 그안에서는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경재씨와 의경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버스로 접근하여 상황을 살폈다. 버스 주변은 희생자들의 피로 흥건했고, 안쪽에서는 추락의 여파로 사람들이 겹겹이 쌓인 채로 쓰러져 있었다. 아비규환의 광경속에서 의식이 있었던 사람들은 "살려주세요"라며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다.
 
의경들은 의식이 있는 사람부터 하나씩 구조했다. 구조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추위를 호소했다. 출혈 때문에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 설상가상 피해자들은 차가운 상판 위에 누워서 쉴틈없이 내리는 비까지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의경들은 자신들의 옷은 물론이고 시트커버까지 뜯어서 덮어주며 피해자들을 구조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먼저 구조된 사람들중에서도 그나마 상태가 나았던 이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챙기며 구조를 도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조하고 돌아온 사이에, 먼저 구조했던 부상자들이 하나둘씩 의식을 잇달아 잃어가는 안타까운 상황이 속출했다.
 
성수대교 붕괴 소식은 당시 뉴스를 통하여 생중계됐다. 국민들은 믿기 어려운 큰 충격에 빠졌다. 학교와 직장에는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확인 전화가 빗발쳤다. 당시 16번 버스에는 무학여고 학생들이 다수 타고 있었다. 그 시간 무학여고에서는 출석 명단을 확인하다가 윤아와 정승원양 등이 아직 등교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정승원양은 그날 16번 버스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 생사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지각을 걱정하며 뒤늦게 온 다른 차를 타고 등교하던 정승원양은 자신이 타려던 차가 성수대교 붕괴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느덧 성인이 된 정승원씨는 인터뷰에서 그날을 회상하며 "교실로 들어갔더니 모두가 우는 분위기였다. 안 왔으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 교실에서는 계속 뉴스를 틀어놓고 있었다"며 그날의 시간을 회상했다.
 
그러나 승원씨와 달리 이윤아양은 안타깝게도 그날, 16번 버스에 탑승하고 있었다. 사고 발생 이후 30분이 지나서야 오전 8시 10분, 첫 구조대가 상판에 도착했다. 구조대는 헬기를 이용하여 부상자들은 실어날랐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망한 시신이거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중한 상태였다. 위급한 현장을 여러 차례 경험한 베테랑 구조대원들도 당시의 상황을 "참혹했다"는 한 마디로 표현하며 씁쓸해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이들도 있었다. 내리는 문쪽에 서 있었던 두 승객은 기둥이 그나마 버스가 덜 찌그러지도록 지지대 역할을 해주면서 큰 부상없이 의식까지 또렷한 상태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본격적인 수색작업이 들어가면서 현장은 침통해졌다. 구조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생존자의 응답은 없었다. 해군까지 구조작업에 동참하여 실종자를 찾기 위하여 강을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강물 속에서 추락한 르망 승용차를 인양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안에 있던 나머지 두 교사는 안타깝게도 빠져나오지 못 하고 차디찬 시신으로 발견됐다. 또다른 차량에서도 운전자가 사망한 상태로 발견됐다. 그리고 더 이상 발견된 실종자는 없었다.
 
사망자는 총 32명, 실종자는 17명에 이르렀다. 특히 16번 버스 탑승자 31명 중 생존자는 단 2명에 불과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사랑하던 친구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성수대교 사고로 사망한 고 김광수씨의 형 김양수씨는 동생의 이름을 TV 뉴스 사망자 명단에서 확인했던 가슴아픈 순간을 떠올랐다. 부모님은 아들의 사망을 확인하고 땅을 치고 통곡했다. 고 김광수씨는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퇴사를 준비중이었고, 사고가 난 10월 21일은 그의 마지막 출근길이었다고.

사망한 희생자 중에는 이윤아양도 있었다. 딸과 서먹하게 헤어졌던 윤아양의 아버지는, 딸의 유품을 받아들고 오열했다. 윤아양의 가방에는 아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쓰여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빠 보세요, 아빠가 저를 때리셨을 때 제 마음보다 백 배 천 배가 아팠을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빠, 저를 때린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제 속에 있는 나쁜 걸 때렸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제 마음이 정말로 아픈 만큼이나 정말로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를 꼭 즐겁게 해드리겠어요, 아빠도 파이팅."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하필 그날, 우연히 성수대교를 지났을 뿐인데 왜 그러한 비극을 겪어야만 했을까. 성수대교는 왜 무너졌던 것일까.
 
1979년 처음 완공된 성수대교는 철강재를 삼각형 형태로 묶어 교각 위에 얹는 방식으로 지어진 트러스교였다. 보통 여러 개의 교각이 하중을 버텨내도록 설계된 교량과 달리, 트러스교는 기둥을 많이 세우지 않고도 다리에 가해지는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여 교각수를 줄여서 교각 간격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핵심은 상판 접합, 미리 설치한 트러스에 나중에 접합한 트러스의 연결 부위다. 차량이 지나갈 때 연결 부위에 하중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붕괴의 원인은 접합 부위의 용접 부실이었다.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한 용접 부분이 절단되어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시공사인 동아건설은 '리비아의 기적'으로 불리던 중동 배수로 공사를 성공시키며 한때 국내 최대의 건설회사로 꼽혔지만, 성수대교 공사는 설계된 도면과는 달랐고 처음부터 비용절감을 위하여 부실 공사를 했던 것이 드러났다.
 
당시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은 사고 당시만 해도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검찰조사가 시작되면서 태도가 바뀌었다. "그동안 수없이 성수대교를 다녔는데 내가 불량시공을 지시했다면 그렇게 했겠나?", "저희 회사의 하자보수 기한은 이미 지났다"고 주장하며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관리 주체인 서울시의 책임 역시 피할 수 없다. 서울시는 1992년부터 노후 구조물 안전진단점검을 시행했지만 성수대교는 지은 지 20년이 안 됐다는 이유로 진단 대상에서조차 빠져있었다. 그 사이 성수대교의 통행량은 사고가 난 1994년에 이르러 하루 10만 대를 넘어설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서울시는 늘어난 교통량을 차로를 늘려 해결하려고 했고 이는 성수대교의 과부하를 더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사고 전날부터 당일 몇 시간 전까지도 성수대교의 이상을 눈치챈 시민들의 신고가 있었다. 하지만 서울시의 대처는 임시로 철판을 덧대놓은 것에 불과했고, 비가 그치면 보수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언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고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걸려있는 문제를 편의적으로 대처하려다가 돌이킬 수 없는 참사를 초래한 것이다.
 
검찰은 성수대교 참사의 주체로 서울시와 동아건설을 모두 기소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둘다 집행유예였다. 당시 법으로 시공의 문제로 인한 처벌 규정은 면허 최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참담한 비극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 유족과 전 국민이 분노했다.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혀 담당 공무원과 동아건설 책임자에게 과실치사죄가 적용되었지만 그나마도 1~2년에 불과했다.
 
처벌은 미흡했지만 사고 이후 대한민국의 안전 인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설물 안전과 관리유지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한국시설안전공단이 건립되었다. 부실공사에 대한 처벌도 대폭 강화됐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분석한 원인백서가 발간되며 기록을 남겨 경각심을 잊지 않게 했다.
 
이 백서가 발간된 날은 1995년 6월 30일이다. 그런데 불과 하루 전인 6월 29일에는 또다른 대형참사인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벌어진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씁쓸한 장면이다.
 
전면 재건축이 결정된 성수대교는 1997년에 재개통식이 열렸다. 현장에는 성수대교 사고의 유가족들이 초청됐다. 유족들은 사고가 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꽃을 던지며 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고 눈물을 흘렸다.
 
사고가 난 넉달 후인 1995년 2월에는 무학여고의 졸업식이 있었다. 무학여고 사고 희생자 중 유일한 3학년이었던 혜주양의 부친도 졸업식에 참석했다. 아버지는 딸을 대신하여 졸업장을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4년 후 혜주양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딸이 떠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식을 잃은 다른 유족들도 비슷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부모들은 "학교 늦은 애에게 사과만 안 깎아줬어도", "이 동네로 이사를 오지만 않았더라도"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사고였음에도, 유족들은 각자의 사연과 원망에 빠져서 가족을 지키지 못 했다는 자책으로 괴로워했다.
 
어떤 이들은 성수대교 유가족 면전에서 "팔자 센 집안이네", "복도 지지리도 없지"라며 상처를 두 번 헤집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고. 유족들 중에는 자신들이 성수대교 사고 유족이라는 걸 숨기고 살아야 했던 이들도 있다고. 살아남은 생존자들 역시 살았다는 기쁨보다는 "나만 살아남는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도 성수대교가 보이는 곳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유족이 안타까워하는 부분 중 하나는, 그동안 대형사고가 많다보니 '32명'이 사망한 사고는 숫자 때문에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었다. 중요한 건 희생자의 숫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잘못으로 무고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만, 때로는 세상에서 잊혀져서는 안 되는 일들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의식 중에 나한테는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겠지 하는 '생존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희생자들도 유가족들도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다가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성수대교 참사는 명백한 인재였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비슷한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큰 희생이 있어야만 뒤늦게 변화를 부르짖는다는 것이야말로 가슴아픈 일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희극과 비극으로'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어록은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꼬꼬무 성수대교붕괴사고 부실공사 한국시설안전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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