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포스터

▲ 다음 소희 포스터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손가락이 절단되어 병원에 오래 입원한 일이 있다. 접합수술을 받고 피부이식 수술 후 접합된 부위가 안정화되기를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이 근 네 달이 됐다. 나는 병원 병실에 홀로 누운 채 처음 얼마는 고통을, 다음 얼마는 불안을, 마지막 얼마는 지루함을 견뎠다.
 
그 병실에 있던 넉 달 간, 많은 이들이 들고 나갔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팔과 다리가 잘린 이들이 찾는 병원엔 환자가 끊이질 않았다. 나와 같은 교통사고 환자와 공장에서 다친 이들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신기한 건 나이가 꽤나 어린 환자도 적잖이 있었다는 점이다. 차를 몰기엔 어려보이는 이 아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실업계 고등학교, 요샛말로 하자면 마이스터 고등학교 등 특성화 학교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왜 신체가 잘려 병원에 왔을까. 조금씩 그들의 사연을 듣게 되면서 나는 이 나라가 기댈 곳 없는 이들을 너무나도 쉽게 사지로 몰고 있음을, 또 그 위험을 감당하는 노동을 너무나 함부로 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거듭되는 아까운 죽음들에 대하여
 
다음 소희 스틸컷

▲ 다음 소희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2021년 10월, 여수의 한 요트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고등학생 홍정운 군이 사망했다. 잠수자격은커녕 물에도 익숙하지 않던 그는 혼자서 12kg 납 벨트를 허리에 매고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따다가 변을 당했다 했다. 서류엔 잠수가 아닌 선내실습을 한다고 적혀 있었다. 현장실습 단 열흘 만의 참극이었다.
 
2017년에도 전주 콜센터에서 일하던 홍수연 양이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해 충격을 던졌다. 같은 해 생수공장에서 일하던 이민호 군이 프레스기에 끼여 죽었다. 고등학생들이 현장실습이라 이름 붙은 열악한 일터에서 일꾼 한 명 몫을 하다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실습이 아닌 노동, 그 안에 끼인 취업률과 경쟁, 성과지상주의의 압력이 그들을 위험지역으로 몰아간다.
 
이들의 죽음 뒤에도 제도는 얼마 개선되지 않았고, 노동부와 교육부, 근로복지공단 등은 실습과 관련해 충실한 추적조사조차 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다음 소희 스틸컷

▲ 다음 소희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그 밝던 아이는 왜 스스로를 죽였을까
 
<다음 소희>는 2017년 발생한 홍수연 양의 실화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마이스터고 졸업반 학생인 소희(김시은 분)가 한국통신 산하 업체 콜센터로 파견을 나가 겪는 일련의 이야기가 우리 시대 현장실습 고등학생이 놓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내보인다. 아니, 기댈 곳 없는 최하층 노동자를 착취하는 이 거대한 체제의 현실을 내보인다는 게 더 적확한 설명일 테다.
 
영화는 크게 전반과 후반, 둘로 나뉜다. 전반은 소희가 예고된 죽음으로 향하는 이야기이며, 후반은 오유진(배두나 분) 형사가 그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이다.

소희와 유진 모두 그들이 맞이할 운명을 알지 못한다. 관객은 영화 속 그들의 뒤를 따라 그들이 마주하는 사건들을, 또 그들이 느끼게 될 감정을 하나씩 밟아나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여, 당신 곁에서 소외되고 죽어가는 이들의 삶을 보라! 바로 그 쌓이고 쌓여 침몰하게 하는 감정들이 이 영화의 핵심 승부수라 할 만하다.
 
다음 소희 스틸컷

▲ 다음 소희 스틸컷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아는, 알아야만 하는, 그러나 알지 못하는
 
모두 아는 이야기다. 마이스터 고등학교 학생들의 현장실습과 그곳에서 마주하는 부조리한 노동, 그로부터 겪게 되는 위험이며 고통들을 우리 모두는 정확히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제게 주어진 통상의 일처리를 넘어 사안을 깊게 파고들고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수사가 쉽지 않다는 것 역시 모두가 안다. 그러나 오 형사는 그 모든 역경과 기꺼이 마주하려 하고 적어도 영화의 결말까지는 전진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관객은 제가 알고 있다고 믿었으나 정말 알고 있지는 못했던 진실을 발견할 밖에 없다. 우리 중 누군가는 소희이며, 우리는 그녀의 고통을 외면해 왔다는 사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쉽게 유진처럼 하지 못하며, 어쩌다 그녀와 같은 이를 보아도 힘을 싣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음 소희>는 새롭지 않으나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에서 이 영화가 이제야 나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나가야만 한다는 의지를 다질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다음 소희'의 죽음을 막아야만 하기에.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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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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