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든 싫든 우리는 오펜하이머의 세계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지난달 7월 21일 <오펜하이머>의 북미 개봉 직후, 현지 언론과 인터뷰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언이다. 맞다. 인류는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해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이후, 우리는 핵전쟁의 위험과 공포 자장 아래 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킬리안 머피)의 세계를 영화 관람 전후로 돌아볼 수밖에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란 현존하는 가장 대중적이고 영향력 있는 거장 중 한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그의 영화 최초로 역사 전기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다. <인터스텔라>가 관객들에게 블랙홀을 공부하게 만들었다면,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가 살았던 20세 중반을 전후한 미국 사회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왜, 어째서 '원자 폭탄의 아버지'는 몰락해야 했을까'.
 
영화를 아무리 곱씹어도, 놀란 감독이 인터뷰에서 어떤 감언 혹은 진심으로 포장을 했어도 <오펜하이머>의 본질적인 질문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 질문을 탐구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180페이지짜리 대본을 들고 3시간짜리 IMAX 영화를 찍기 위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동의하에 1억8천만 달러, 한화로 약 2284억 원을 쏟아 부었다.
 
그러니까,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놀란의 비싼 질문에 제78주년 광복절 당일 극장을 찾은 관객 55만 명이 반응한 셈이다. 물론 질문이 거기서 끝나선 곤란하다. 본인의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놀란 감독은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은 어디까지인가'와 '당시 미국 정치 상황은 어땠나'에 이어 결국은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는 어떤 인간이었나'라는 탐구를 확장시킨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전작들보다 훨씬 더 지적이고, 근원적으로 암울하며, 체험보다 경험을 요하는 영화다. 시대가 그랬고, 인물이 그랬다. 이러려면 왜 IMAX나 CGI 없는 촬영을 고집했나란 세간의 의문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을 해대면서 신경을 건드린다.
 
관객들은 마치 오펜하이머가 위원회 석상에서 '너가 빨갱이가 아니란 걸 증명해 봐'란 질문을 받았던 것처럼 무수하고 진중한 질문과 마주해야만 한다. <오펜하이머>는 분명 놀란의 걸작이자 <덩케르크>의 전쟁영화 장르를 뛰어 넘는 문제작이다. 일반적으론 그의 영화 중 가장 비상업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본인들의 현대사이자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미국 관객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 관객들의 반응이 그래서 더 미칠 듯이 궁금하다.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속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로 명명된 세계 최초 핵무기(트리니티) 실험의 최종 테스트에서 '핵 버튼'을 누르기 직전,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놀란이 누구인가. 오펜하이머의 노력과 희열, 고민이 집중된 이 장면을 놀란 감독은 관객들의 숨이 멎게 만들 만큼 매혹적이고 완벽하게 관장하는 놀라운 연출력을 자랑한다.
 
없는 것도 있다. '프리 CGI'를 선언한 만큼 핵폭발을 정면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원자폭탄 실험의 성공과 위력은 오펜하이머의 심리와 실험장 풍경, 과학자들의 반응을 비추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혹자들은 기대했을지 모를 미군의 원폭 투하 장면도 배제됐다.
 
실험 성공 직후 오펜하이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본 민간인 피해자들 소식을 전하는 뉴스가 전부다. 참혹했던 전쟁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뉴스와 다큐 등을 통해 각인되어 온 원폭 투하의 순간을 소환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읽힌다. 그건 과학자의 책임 윤리라는 오펜하이머 본인의 딜레마와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딜레마의 절반의 딜레마다.
 
"저를 매료시킨 것은 이야기의 규모입니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 과학자들은 대기에 불을 질렀고, 전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원자폭탄) 테스트를 촉발했다는 사실을 포함해 우리 모두와 모두를 대신한 누군가가 그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도요. 그 아이디어보다 더 큰 규모의 무엇은 없습니다."
 
놀란 감독이 <뉴욕타임즈>와 한 인터뷰에서 딜레마의 남은 절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핵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은 위험을 감수한 게 맞는가. 양자 물리학 등 새로운 이론 발견에 몰두하고 경쟁했던 이들은 '핵폭탄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리스크는 누구의 것인가. 미국의 리스크인가 적국의 리스크인가. 과연 그들은 총 70만에 달하는 피폭자들의 위험을 어디까지 진지하게 고민했는가.
 
놀란 감독은 이런 직접적인 질문은 피해간 채 오펜하이머의 딜레마와 고뇌를 파고드는 데 전념을 다한다. 오펜하이머는 핵 버튼을 누른 당사자인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 앞에서 "내 손에 피를 묻혔다"며 더 큰 재앙을 가져 올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한다. 반면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개발자의 '징징거림'을 못마땅해하고, 이는 오펜하이머의 몰락에 단초를 제공한다.
 
"숨이 멎을 듯한" 희열 끝에 찾아 온 것은 죄책감과 고뇌다. 핵전쟁과 인류절멸의 위기를 막았다는 명분은 한낱 개인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역사의 흐름과 정치적 계산 앞에 좌절을 안겼을 뿐이다.
 
과학자들의 발명품, 그러니까 원자폭탄이 세상을 끝장내거나 구원할 수 있으리란 오만은 틀렸다. 그 결과, 오펜하이머는 누구의 위험을 감수했던 걸까.
 
이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하지 않는 것 자체로 놀란 감독은 유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 세계 관객들이 대신 물어야 할 질문이다. 2006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오펜하이머>의 원작 전기 제목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구원자일 수 있지만, 오펜하이머는 (오프닝에서 강조된 것과 달리)인류 전체의 프로메테우스일 수 없는 것이다. 
 
유보된 질문, 놀란 감독이 보여준 절정의 기교 
 
 영화 <오펜하이머> 관련 이미지.

영화 <오펜하이머> 관련 이미지. ⓒ 유니버설 픽쳐스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는 <오펜하이머>는 그래서 더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 시공간적 규모의 미학에 일가견이 있는 놀란 감독은 이를 위해 세 가지 중층 플롯을 구사한다. "서사보다 플롯을 먼저 고민한다"는 놀란 다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범상치 않은 선택이요, 거듭되는 질문들을 위한 일종의 영화적 야심이다.
 
먼저 '핵분열'이란 부제 아래 대학 시절 이후 오펜하이머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축으로,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고초를 겪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비밀 청문회가 컬러로 이어진다. 흑백의 '핵융합'이란 부제는 미 원자력 위원회 창립위원인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개 청문회인데, 놀란 감독이 이 플롯을 중시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실 맥거핀에 가까운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과의 짧은 만남을 두고두고 복기하는 스트로스는 매카시즘을 등에 업고 오펜하이머의 반대편에선 과학자를 대변한다. 미국의 정치가 오펜하이머를 이용했다면 스트로스와 같은 과학자들은 당대 아이콘으로서 물리학의 스타가 된 오펜하이머를 질시했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책임 윤리나 고뇌를 다루는 가운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파괴하고 몰락시키려 들었던 매카시즘(정치)과 그 광풍을 이용한 내부 동조자들의 질문을 집요하게 담아내면서 역으로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강화했다.
 
<오펜하이머>는 다큐가 아니다. 그가 핵폭탄 개발의 처참한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그걸 알면서도 미군의 부름에 흔쾌히 응했는지를 명확히 짚어내지 않는다. 스트로스의 청문회를 비롯해 질문의 연쇄가 <오펜하이머>의 중추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안 머피나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끝까지 오펜하이머를 신임했던 군 간부 레슬리 글로브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에 따르면, 놀란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은 오펜하이머의 1인칭 시점이 도드라졌다고 한다. 청문회 장면을 제외한 연대기 장면들이 실제 그렇게 찍혔다.
 
핵분열이나 핵융합 장면이 삽입된 상당히 지적인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을 스크린 위에 펼쳐낼 땐 확실히 황홀하다. 꿈결 같은 전개다. 대신 그 꿈결 같은 황홀함은 이내 죄책감에 찌든 악몽으로 변모해 간다. 놀란 감독은 그러한 의식의 변화 과정 자체가 (핵개발을 책임진) 과학과 과학자가 지녀야 할 책무요, '원자 폭탄의 아버지'가 마땅히 감당해야 했을 윤리의식의 모순과 아이러니라고 본 것 같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과학 덕후 영화감독이 세상을 구원하거나 끝장낼 수 있었던 과학자의 심리를 극단까지 쫓아가 본 역사 전기라 할 수 있다. 그 과학자를 괴롭힌 정치의 끝에 2차 세계대전 직후 드리워진 매카시즘이 자리하는 미국의 역사 자체가 상당히 아이러니한데 이를 그 누구도 아닌 놀란 감독이 철저히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어떤 과학 덕후로서의 깊은 분노가 느껴진다고 할까.
 
놀란 감독의 절정에 달한 기교 외에도 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일대기를 집대성하기 위해 뭉친 할리우드 일급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3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을 기쁘게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빠지는 배우가 없다. 심지어 다소 납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연기한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를 연기한 에밀리 브런트나 안타까운 사랑을 이어갔던 연인 장 태틀록 역의 플로렌스 퓨마저도 말이다.
 
그리하여 <오펜하이머>는 특히 북핵의 위협이 상존하고 패전국인 일본과 갈등이 여전한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져 준다. 오늘을 사는 과학의, 과학자들의 현재적 윤리 의식을 과연 어떻게 담보해낼 것인가. 또 놀란 감독이 강조한 것처럼, AI 시대를 사는 우리가 또 다시 오펜하이머의 세계를 목도하지 말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그렇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세계를 통해 좋든 싫든 '미국'의 거장에서 세계의 거장으로 거듭나려는 중이다.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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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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