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세월호
오송
[특집 : 세 참사, 세 유족]

끝내 무뎌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이후 1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파편을 모으고 있는 '참사 유가족'이 있다.

이태원 참사로 서른 아들을 잃은 어머니 김호경씨, 세월호 참사로 열여덟 아들을 잃은 최순화씨, 오송 참사로 스물넷 조카를 잃은 외삼촌 이경구씨. 세 사람의 '참사 이후 삶'을 되짚었다. 주저앉아 통곡하고, 답답함에 진저리 친 나날들이 반복됐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와 싸웠다.

<오마이뉴스>는 동행취재와 집단인터뷰를 통해 만난 세 사람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다. 이는 떠나간 이들의 사투를 생각하며 남은 이들이 쌓아 올린 기억이자,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애쓴 저마다의 기록이다.

이태원, 그날 이후
알람
ⓒ 복건우

"의현아 엄마 다녀올게"

2023년 10월 16일. 엄마는 달리는 버스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들을 떠올린다. 집을 나서기 전 호경씨는 방문을 열고 "다녀올게" 인사를 했다. 아들 의현의 방은 1년 전 주인을 잃고 텅 비어 있다. 호경씨는 방에 있는 물건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6시에 일어나던 의현을 깨우기 위한 '5시 55분' 휴대폰 알람도 여전히 켜져 있다.

"멍하니 앉아서 울다가 가끔 문도 열어보는데, 알람마저 꺼버리면 의현이가 정말 없어질 것 같아요."

호경씨는 아들이 사다 준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아들의 마지막 유품인 은반지를 왼손에 꼈다. 옷깃에는 보라색 별 모양 배지도 달았다. 종이가방에는 의현의 누나 혜인씨가 직접 구운 단호박 머핀이 가득했다. 호경씨는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러 수원에서 서울광장 분향소로 향했다.

가족사진
ⓒ 복건우

"엄마 나 다녀올게"

10월이 되니 그 한마디가 자꾸만 귀에 맴돈다. 2022년 10월 29일, 의현은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길거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T자 골목 위쪽에 있어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도와달라는 옆 사람의 울부짖음에 다시 골목에 들어갔단 얘기를 호경씨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아들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엄마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22시 15분 이전 추정'이라고 적힌 검안서가 사망 시각의 유일한 단서다. 가족과 친구들이 의현의 행방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4시간. 그들의 바람과 달리 의현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는 아들의 흔적을 갈망했다. '의현20221029' '의현친구들' '의현서류'... 1년간 여기저기서 모은 아들 사진 수백 장을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했다. 참사 2주 전 찍은 가족사진은 봉안당에 붙은 이후 빛이 바랬다. 발인식이 끝난 2022년 11월 1일, 호경씨는 다짐했다. 의현이가 이태원에 간 이유보다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기억하겠다고.

분향소
ⓒ 권우성

우린 왜 여기 있을까

엄마는 보라색 머플러로 아들의 영정을 닦았다. 취업을 위해 찍은 의현의 증명사진이 영정사진으로 쓰였다. 호경씨를 비롯한 엄마들은 분향소 앞 간이 테이블에서 보라색 리본을 만들었다. 호경씨도 의자에 앉아 부직포를 자르고 접착제를 붙였다. 고개를 들면 바로 영정이 보이는 거리에서, 의현과 눈을 마주치면서. 나는 왜 여기 있고 의현이는 왜 저기 있을까, 호경씨는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분향소에 오면 주변에 못 하는 얘기들을 해요. 같이 밥 먹고 아이들 생각하면서 울다가 웃다가. 눈물 나오면 엄마들이 농담도 해주고, 어디서도 못할 얘기 여기서 편하게 하는 거죠."

용기
ⓒ 권우성

엄마에서 유가족으로

호경씨는 평일이면 아들을 보러 서울광장에 간다. 2023년 2월 그곳에 의현의 영정과 위패가 놓였다. 어느 날은 분향소 지킴이가 되었다가, 어떤 날은 기자회견에 함께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진 않았다. 호경씨는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묵묵한 울타리'이고 싶었다.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앞장서진 못하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명보다 열 명, 열 명보다 스무 명. 누가 큰 목소리를 낼 때 옆에 있는 이들을 보고 힘이 생기도록요."

그랬던 그가 참사 1주기를 앞두고 기자회견 발언자로 나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가 외쳤다. "진상규명 특별법을 제정하라!" '엄마'에서 '유가족'으로 옮겨간 자리에서, 호경씨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기자들은 불끈 쥔 그의 주먹을 카메라에 담았다.

당부
ⓒ 권우성

너희들을 지킬 거야

호경씨는 최근 고민이 하나 생겼다. 어느 날 딸 혜인씨가 집에서 혼자 울고 있는 걸 봤다. 그동안 엄마 몰래 울음을 터뜨렸던 걸까, 엄마를 챙기느라 동생을 잃은 슬픔을 돌아보지 못한 건 아닐까. 엄마는 딸을 지키고 싶었다.

"내 슬픔만 생각했지, 딸아이를 못 본 거예요. 요즘은 혜인이가 더 힘들어하더라고요. 남아 있는 형제자매를 부모가 더 생각해 줘야 하는데, 그걸 놓치고 있었어요."

딸에 대한 미안함이 커질 때마다 호경씨는 의현의 당부를 떠올린다. "엄마, 미안해하지 마." 자기보다 작은 엄마를 최선을 다해 지켜주겠다는 아들을, 이젠 호경씨가 지켜주려 한다. 의현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의현의 희생이 억울하지 않도록. 엄마는 아들을 지키고 싶다.











세월호, 그날 이후
9년 반
ⓒ 박수림

세월호의 세월

덜컹덜컹. 끼이익. 요란한 소리에 맞춰 지하철이 몸을 흔든다. 노란 리본이 그려진 에코백도 함께 흔들린다. 2023년 10월 19일, 안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이 공간이 낯설지 않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9년 반이라는 세월 위에 순화씨가 앉아 있다.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세요?" 순화씨의 첫 마디가 시곗바늘을 되돌렸다. 참사 이튿날 밤, 아들 창현이는 차갑게 식은 몸으로 진도 체육관에 실려 왔다. 생환의 기대는 하루 만에 접혔다. 순화씨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유가족'이 되었다.

순화씨의 직함은 여러 개다. '창현 엄마' 말고도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부서장', '4·16합창단 단장'으로 불린다. 순화씨는 오늘 세월호 엄마들을 만나러 간다.

김밥
ⓒ 권우성

곁을 내어준 사람들

"식사하셨어요? 거봐 다들 배고플 줄 알았어."

순화씨가 사 온 김밥 두 줄을 엄마들이 한 알씩 나눠 먹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인 내년을 앞두고 유가족들이 4·16연대 회의실에 모였다. 안건을 논의하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고민했다. 9년 반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이라는 숙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순화씨는 종종 대답을 멈췄다. 잘 지낸다는 걸 생각할 때면 창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럴수록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소중한 마음을 나누려 했다. 함께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순화씨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모임에 나와주시는 활동가들, 부모님들이 정말 소중해요. 그분들께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어서 노력한 덕분에 많이 성장하고, 훨씬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잔소리
ⓒ 박수림

스물아홉 딸에게

순화씨가 바쁠 때면 딸 시온씨의 잔소리가 심해진다. 엄마는 왜 일만 하냐고, 좀 쉬면 안 되냐고. 스무 살에 남동생을 잃은 시온씨는 어느덧 스물아홉의 어른으로 성장했다.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의 9년 반을 채웠다.

"앰뷸런스에 실려 온 창현이를 시온이가 직접 봤대요. 그때부터 엄마를 챙겨야 한다는 강박이 큰 것 같아요. 예전에 시온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지나가다 노란 리본을 보면 엄마한테 알려줄게.' 시온이는 계속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고 있어요."

순화씨와 시온씨는 창현이 이야기를 종종 한다. 한 번은 시온씨에게 '엄마 자식 중엔 나도 있어'라는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창현이를 함께 떠올리는 것이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순화씨는 믿는다. 엄마는 딸을, 딸은 엄마를 생각하고 있다.

기도회
ⓒ 권우성

"절대 잊지 않을게"

비가 그쳐 쌀랑해진 저녁, 순화씨는 세월호 기억공간 앞에서 추모 기도회를 올렸다. 행사가 끝난 뒤 순화씨는 화분을 들고 행렬 맨 앞에 섰다. 길 건너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분향소로 거리 행진이 시작됐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단풍이 들어도 창현이가 보고 싶습니다. 그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흩어지지 않고 함께 기억하는 것이겠죠. 안전한 사회를 향한 마음을 담아 같이 노래를 부릅시다."

순화씨는 최근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활동을 종료했다. 마땅한 조사 기구도, 정부의 해결 의지도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유가족들은 고민이 많다.

순화씨는 이태원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화분을 내려놨다. 진실이 덮이는 사이 참사가 반복됐다. 절망을 살아낸 유가족들은 이곳에서 희망을 노래했다. 부둥켜 울고 위로하는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세월호 참사 추모곡 '잊지 않을게' 중)











오송, 그날 이후
괴로움
ⓒ 김화빈

100일을 앞두고

"저기 빨간 버스 보이죠? 저기서 참사가 일어났어요. 그때 침수된 747번 버스도 빨간색이었는데..."

2023년 10월 20일, 경구씨가 궁평2지하차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난 7월 15일, 범람한 강물이 지하차도를 덮치며 스물네 살 조카 선정씨가 탄 버스가 물에 잠겼다. 조카를 잃은 지 97일째 되는 이날, 외삼촌은 달리는 차 안에서 괴로워했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면서 매일 이곳을 지나는데, 빨간 버스 다니는 걸 보면 마음이 아무래도 힘들죠."

경구씨는 창문을 열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문틈으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며 꼬박 30분을 내달려 그는 청주지방검찰청 앞에 도착했다.

책임감
ⓒ 김화빈

대표가 된 이유

유가족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은 경구씨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유가족들의 건의 사항을 듣고, 충북도청·청주시청에 보낼 요구안을 정리하고, 기자회견 발언자로도 참석한다. 남을 위해서라기보단, 가족으로서 당면한 책임감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아빠가 이렇게 활동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싶어요. 참사는 언제든 생길 수 있고, 그러니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요."

그는 아침마다 인터넷에 '오송'을 검색한다. 최근 오송 참사 관련 기사 수가 줄어드는 게 곧장 체감된다. 지자체는 책임을 부인하고, 사회의 주목도는 떨어지고 있다. 경구씨는 "그럴수록 더 열심히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종이비행기
ⓒ 김화빈

7월의 트라우마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한 커피 좀 드세요."

경구씨는 검찰청 앞에 먼저 도착한 시민대책위원회 활동가들에게 커피를 건넸다. 유가족협의회를 가장 가까이서 도와주는 이들이다. 2023년 여름과 가을, 빗줄기 속에서 피켓을 들고 고발장을 제출할 때도 이들은 유가족의 곁을 지켰다.

참사는 남은 사람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경구씨는 지금도 고통을 호소하는 한 희생자의 어머니를 만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등을 토닥였다. '오송 참사 100일 문화제'에서, 이들은 변화를 바라는 마음을 적은 노란 종이비행기를 하늘로 날렸다.

망각
ⓒ 김화빈

안녕할 수 없어서

경구씨가 느끼는 감정은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유가족, 생존자, 활동가들이 여야 당사 앞에서 번갈아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지만, 시민들의 관심은 예전만 못하다. 죽음의 이유를 밝혀야 할 사람들은 서로 책임을 미뤘다.

안녕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수도 없었다. 유가족들은 2주마다 정기모임을 갖지만, 서로의 얼굴을 볼 때면 참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얼굴들의 구체적인 삶을 떠올리다 보니, 안녕하고 싶은 경구씨의 마음은 시작부터 제동이 걸렸다.

"저도 아프지만 다른 유가족에겐 어떤 아픔이 있을지, 그 아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물어보기도 어렵고 짐작만 할 뿐이죠. 같이 밥 한 끼 편히 먹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숙명
ⓒ 김화빈

진실을 향한 싸움

희생자를 비난하는 말들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죽음 앞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너네는 보상도 많이 받았잖아", "재난지원금도 받지 않았냐"라는 극언이 쏟아졌다. 조카를 잃은 경구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주변의 냉소와 비아냥에 큰 상처를 받았다.

"저희 누님은 지하차도가 자꾸 생각난다고 타 지역 먼 곳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직장동료들한테 2차 가해를 당해서 일도 그만두셨다고 하더라고요. 유가족한테 그런 비난을 하는 건 너무 큰 실례 아닌가요?"

석 달 전 경구씨의 수첩에는 참사에 관한 정보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렇게 기록한 수첩은 이제 두꺼운 파일철이 됐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가슴에 새긴 경구씨는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진실을 향한 싸움, 망각과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유가족 활동은 저한테 숙명이 됐어요. 책임감으로 시작한 만큼, 끝까지 가려고요."

다시, 이태원
ⓒ 권우성

두 엄마의 골목길

호경·혜인씨 모녀는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올라갔다. 텅 빈 거리 위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서른 번의 가을을 살고 세상을 떠난 의현의 흔적 앞에 두 사람이 섰다. 참사 당일 의현이 쓰러진 위치를 혜인씨가 가리켰다. "여기 의현이가 있었어."

호경씨는 붉은 돌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달 전 이곳에 처음 온 이후 두 번째로 마주한 골목이었다. 호경씨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골목을 빠져나오자, 미리 와 있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 순화씨가 다가와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2023년 10월 20일. 두 사람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특별한 날에만 입는다는 창현이의 남색 후드 집업을 입은 순화씨가 호경씨를 꼭 안았다. 순화씨 옷에 달린 노란 리본이 함께 찰랑였다.

반복
ⓒ 권우성

책임을 돌리는 말들

호경·혜인씨 모녀는 '이태원'이란 글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태원역 1번 출구 계단에서부터 심장은 자꾸만 빠르게 뛰었다. 호경씨에게 이태원은 두렵지만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이곳을 외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화씨는 지난해 '인현동 화재 참사' 23주기 추모제에 갔다가 뉴스로 이태원 참사를 전해 들었다. 1999년 10월 30일, 인현동 한 상가 지하 노래방에서 난 불이 2층 호프집까지 번지며 중·고등학생 등 57명이 숨진 일은 세월호·이태원 참사와 묘하게 겹쳐졌다.

"놀러 간 애들 잘못이라는 악의적인 여론이 참사 초기부터 나왔어요. 세월호 때의 비난이 이태원 참사에서 반복되는 걸 보고 굉장히 화가 났어요."

남은 딸
ⓒ 권우성

너는 애써 웃어도

호경씨와 순화씨는 할 말도 많고,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참사로 아들을 잃었고, 남은 딸을 무척 아꼈다.

호경씨의 가장 큰 고민은 딸 혜인씨의 아픔이다. "제가 잘 챙겼어야 했는데, 혜인이가 오히려 저를 더 챙겨줘요. 제 앞에서 일부러 더 웃고, 웃겨주려 하고." 순화씨는 자신의 시행착오와 경험을 공유했다. 호경씨가 걱정돼 이태원역까지 따라 나온 혜인씨를 보니 순화씨는 9년 전 자신의 딸 시온씨가 겹쳐 보였다.

"엄마와의 관계가 중요하더라고요. 의현이 이야기 같이하고 그러면 조금씩 좋아질 거예요."

부탁
ⓒ 권우성

4월 엄마가 10월 엄마에게

호경씨는 참사가 자신의 일이 될 줄 몰랐다. 세월호 참사 당일 "전원 구조" 속보를 호경씨는 그대로 믿었다. 오보였다. 진도 팽목항에서 휴대폰을 쥐고 아들딸의 소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호경씨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사이 순화씨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알아야겠단 생각으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싸웠다. 그러나 10년이 다 된 지금까지 두 목표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순화씨는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 악습을 이태원 유가족들이 깨뜨려 줬으면 한다"고 했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더라도 사실 산 넘어 산이거든요. 진상조사를 못 하게 법안을 다 난도질할 거고, 그걸 지켜보면서 또 얼마나 화가 날지... 뭐라도 행동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호경씨도 동의했다. "맞아요. 저조차도 이게 제 일이 될 거란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과 달라지지 않으면 참사는 계속 반복될 거예요."

세 사람
ⓒ 권우성

서로가 서로를 위해

두 유가족이 이태원에서 만나는 동안, 경구씨는 충북지방검찰청 앞에 있었다. 그는 만남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에게 궁금한 것들을 문자메시지로 물어왔다. 시간이 지나면 희생자를 향한 그리움이 무뎌지는지, 활동을 하며 드는 허탈감과 분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순화씨와 호경씨는 몇 초간 말을 멈춘 뒤 차례로 전할 단어를 골랐다.

"사실 시간이 지난다고 보고 싶은 마음이 옅어지진 않아요. 어떤 계기로든 다시 그날로 돌아가곤 해요. 다만 꿋꿋하게, 주변 사람들과 함께, 책임자 처벌을 위해 끝까지 나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순화씨)

"저도 10월이 되니까 가라앉아 있던 생각이 자꾸 올라와서 힘들더라고요. 자식처럼 생각했던 조카를 위해 삼촌이 앞장서서 활동하는 게 다른 유가족들에겐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많이 만나고 대화하시면서 주변 사람들을 잘 이끌어 주세요." (호경씨)

그 시각 경구씨는 검찰청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오송 참사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조금씩 잊혀 가는, 이 황망한 참사에 대해 우리는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에 나서주십시오." 그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기다림
ⓒ 권우성

참사의 시간들

세 사람은 이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들이 스러진 현장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이태원 골목으로 향한 호경씨, 서울광장을 찾아 추모 발언을 전한 순화씨, 다른 유가족들과 만나 앞으로의 활동을 고민한 경구씨. 이들이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우리가 안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1년을 맞고, 10년을 앞두고, 100일을 지나왔다. 유가족들이 '그날'의 물음을 던진다. 희생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남은 이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 당연한 질문에 정부와 사회는 답을 주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참사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취재·글 : 소중한·김화빈·박수림·복건우
사진 : 권우성 / 제작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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