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스틸컷

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스틸컷 ⓒ 넷플릭스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영화 <문라이즈 킹덤>(2013)이 칸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고 황금 종려상의 후보로 오를 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이 베를린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고 은곰상과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칸영화제의 첫 트로피를 단편 영화로 받게 될 것이라고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장편 데뷔작이었던 <바틀 로켓>(1996)의 뿌리가 되는 동명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필모그래피 어느 작품에서도 단편 작업을 한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가끔 한 번씩 시도했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수상할 가능성이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였으니 이번 수상은 꽤 놀라웠다.

넷플릭스를 통해 영국의 유명 소설가 로알드 달의 이야기 4편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만 해도 그럴 수는 있겠다 생각했다. 그는 이미 <판타스틱 Mr. 폭스>(2009)를 통해 로알드 달의 이야기를 먼저 작업한 바 있었고, 작가의 이야기들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함께 작업한 4편의 단편 영화 역시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하나의 작품집에 함께 실려 있는 단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는 표제이자 메인 스토리로 알려져 있고, 실제 영화화된 작품 중에서도 가장 긴 분량,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러닝타임을 갖고 있다.

02.
이 작품과 함께 영화화된 다른 세 편의 영화 <독> <백조> <쥐잡이 사내>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모습이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 작품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는 조금 더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인다. 큰 화두를 이야기 속으로 끌고 들어오기보다는 독특한 인물의 삶을 그리면서 캐릭터성에 기대어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극 중에 생각보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야기는 헨리 슈거(베네딕트 컴버배치 분)라는 인물의 행동과 그 행동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결정적인 지점의 동인을 따르며 나아간다.

영화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삶을 살아온 헨리 슈거는 어느 날 눈 없이도 볼 수 있다는 사람, 임다드 칸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여전히 더 부유해지겠다는 욕망만이 전부였던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같은 능력만 갖게 된다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얻게 된다는 능력. 그는 오랜 수련 끝에 세상 누구보다 빠르게 돈을 벌 수 있게 되고, 63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1개의 어린이 병원과 고아원을 지어 훌륭하게 운영하게 된다.
 
 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스틸컷

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스틸컷 ⓒ 넷플릭스


03.
기존의 텍스트가 영상화되는 과정에서 가질 수 있는 선택권은 여러 가지다. 주요 요소만을 남긴 채 원형을 적극적으로 변형할 수도 있고, 반대로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복제해 낼 수도 있다. 이는 재창작 과정에 있는 감독의 선택에 의해서 바뀔 수도 있지만, 원작자인 작가의 의지가 반영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후자에 속한다. 원작자의 의지다. 로알드 달의 작품은 생각보다 영상화된 작품이 적은 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원작의 내용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싶어 하는 작가 본인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더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협상의 대상이 없다.) 영화의 전체 내용이 원작과 거의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작품을 포함한 네 편의 단편 작업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뛰어난 능력과 감각을 한번 더 확인하게 만들어준다. 평소 자신이 이어왔던 엄격하고 타이트한 제작 방식은 고수하면서도 제한된 시간이라는 또 하나의 장애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특히 원작의 이야기를 자신의 의도나 취향대로 바꾸지 않고도 자신의 틀에 가져다 놓는 모습은 그가 이미 하나의 이야기꾼으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완성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작품인 <프렌치 디스패치>(2021),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 수준의 엄청난 대사량으로 이 짧은 극 역시 이끌어가는 것은 그의 연출력과 호흡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04.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야기를 열고 닫는 액자식 구성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이중적 구조가 아닌, 한 단계 더 나아간 삼중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로알드 달(레이프 파인즈 분)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자리와 그가 이야기 속에서 영향을 받게 된 인물이 하나씩 더 병렬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슈거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일기를 완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로알드 달이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헨리 슈거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장면으로, 다시 헨리 슈거가 읽게 된 책 속의 인물 임다드 칸(벤 킹슬리 분)으로 옮겨간다. (헨리 슈거와 임다드 칸 사이를 중개하는 의사 차터지(데브 파탈 분)의 단계까지 생각하면 3.5 내지 4중 구조로도 볼 수 있겠다.) 이때마다 화자 역시 함께 변하게 되고, 임다드 칸의 이야기부터 다시 역순으로 이야기를 닫으며 마지막 장면에서는 로알드 달의 단계로 되돌아오게 된다.

아마도 이 구조는 장편 영화였으면 막(act) 혹은 장(chapter)으로 나뉘었어야 할 이야기를 더 작은 단위로 분절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최소한의 러닝타임을 구현하고자 했던 목표를 상실하지 않는 과정에서 최대한의 이야기를 극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쌓아 올리기 위한 방법 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상당히 빼곡하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이해가 어렵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 
 
 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스틸컷

영화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스틸컷 ⓒ 넷플릭스


05.
"정신이란 아주 복잡한 것이다. 동시에 수천 가지를 생각하지. 정신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돼."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소재가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정신과 집중은 동양적인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 철학에서의 정신과 집중은 개인의 내면을 정화하고 조금 더 고차원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의 두 인물, 헨리 슈거와 임다드 칸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의 보상을 원한다. 한 사람에게는 인기와 유명세,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돈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복적 교육을 위한 '죄와 벌'의 스토리텔링을 가져다 놓지도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의 자신의 능력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이전보다 촘촘한 계획과 설계를 하고자 하고 극은 이를 허락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인해 획득할 수 있게 된 부와 명예로 인물의 성격이 바뀌게 되는 식이다. 헨리 슈거에만 국한해서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 하루도 일해본 적은 없지만 돈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갖고 재산을 불리는 데 있어서는 어떤 속임수도 불사하던 인물이 전 세계에 어린이 병원과 고아원을 짓는 인물로 거듭나기까지 그 과정에 집중에 대한 수련이 있는 셈. 그동안 봐왔던 인물 변화의 전형성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06.
오스카의 선택을 받은 것은 이 작품뿐이지만 웨스 앤더슨에 의해 다시 완성된 로알드 달의 이야기 4편은 원작의 품을 떠나 모두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있다. 가능만 하다면, 소설가의 모든 작품을 그의 표현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찰리의 초콜릿 공장>도 로알드 달 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을 웨스 앤더슨 감독의 건조하고 덤덤한 어조로 연출하게 되면 어떤 모습일까?) 시리즈물과 세계관이 범람하는 시대에 한 명의 감독과 한 명의 소설가가 오롯이 매칭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를 보는 이들에게 당부할 말이 하나 있다. 단 한순간도 집중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의를 잃게 되는 순간, 10초 뒤로 가기를 누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호흡과 대사량은 그만큼 엄청나다. 우스갯소리지만, 극 중 헨리 슈거는 3분 동안 집중하는데 6개월, 5분 30초를 집중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 영화는 41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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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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