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넷플릭스 영화 <사냥의 시간>을 연출한 윤성현 감독은 지난 2011년 자신의 첫 장편영화 <파수꾼>을 통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한 독립영화 <파수꾼>은 남고를 배경으로 친구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소통의 부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2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충무로에서는 <파수꾼> 이후 청춘들의 방황을 다룬 독립영화가 앞 다투어 제작되기도 했다.

영화 <파수꾼>의 커다란 수확은 한국영화를 이끌어가는 2명의 걸출한 젊은 배우를 배출했다는 점이다. <건축학개론>에서 '국민첫사랑' 수지와 썸을 타는 승민의 대학시절을 연기하며 스타덤에 오른 이제훈은 <박열>, <아이 캔 스피크>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파수꾼> 이후 2016년 이준익 감독의 <동주>로 주목 받은 박정민도 <그것만이 내 세상>, <타짜:원 아이드 잭>, <밀수> 등을 통해 연기 잘하는 젊은 배우로 떠올랐다.

박정민이 <파수꾼> 출연 이후 <댄싱퀸>,<감기>,<전설의 주먹> 등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주목 받기까지 3~4년의 시간이 걸린 반면에 이제훈은 <파수꾼> 이후 차기작을 통해 곧바로 충무로의 최고 유망주로 떠올랐다. 2011년 10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전쟁 드라마에 준·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의형제>의 장훈 감독이 연출하고 신하균과 고수, 류승룡, 김옥빈이 주연을 맡은 영화 <고지전>이었다.
 
 <고지전>은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음에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실패했다.

<고지전>은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음에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실패했다. ⓒ (주)쇼박스

 
호러-액션-생활연기-로맨스 다 되는 배우

최강희와 박진희, 공효진, 김규리(개명 전 김민선), 송지효, 박한별 등 많은 신인 여성배우들을 배출한 <여고괴담> 시리즈는 2005년 <여고괴담4: 목소리>를 통해 또 한 번 많은 신인배우를 배출했다. 서지혜와 차예련, 그리고 목소리 귀신을 연기했던 김옥빈이었다. <여고괴담4>는 전국 50만 관객으로 전작들에 비해 흥행성적은 썩 좋지 않았지만 김옥빈을 비롯한 세 배우들은 이후 활발한 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익숙한 배우로 성장했다.

김옥빈은 <여고괴담4> 이후 영화 <다세포 소녀>와 <1724 기방난동사건>,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 등에 출연했지만 여물지 못한 연기와 작품의 낮은 완성도로 인해 혹평을 면치 못했다. 그런 김옥빈은 2009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출연했다. <박쥐>를 통해 과감한 연기변신을 시도한 김옥빈은 자신을 향한 대중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뒤집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등 대선배들과 모큐멘터리 영화 <여배우들>에 출연한 김옥빈은 2011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장훈 감독의 <고지전>에 캐스팅됐다. 김옥빈은 <고지전>에서 통칭 '2초'로 불리는 북한군저격수 차태경을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13년 <칼과 꽃>을 통해 6년 만에 드라마로 컴백한 김옥빈은 2014년 <유나의 거리>에서 실감 나는 생활연기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2015년 용산참사를 다룬 <소수의견>, 2016년 공군 군납 비리를 다룬 <1급기밀> 등 다소 민감한 소재의 영화에 출연했던 김옥빈은 2017년 <악녀>를 통해 <박쥐> 이후 8년 만에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2019년에는 <고지전>의 박상연 작가가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와 협업해 각본을 쓴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서 진취적인 성격을 가진 아스달 최초의 태후 태알하를 연기했다.

2021년 이준혁과 함께 싱크홀을 주제로 한 드라마 <다크홀>에 출연한 김옥빈은 작년 2월 첫 OTT 드라마 <연애대전>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김옥빈의 데뷔 첫 로맨틱코미디였던 <연애대전>은 공개 2주 만에 넷플릭스 전체 순위 3위, 비영어권 순위 2위를 기록하며 5400시간이 넘는 누적시청시간을 기록했다(넷플릭스 Top 10 집계 기준). 그리고 작년 가을에는 <아스달 연대기>의 속편 <아라문의 검>에 출연했다.

병사들의 아픔과 상처 조명한 전쟁영화
 
 애록고지를 지키던 악어부대 대원들은 강은표 중위를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다.

애록고지를 지키던 악어부대 대원들은 강은표 중위를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다. ⓒ (주)쇼박스

 
19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반공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1980년대 이후 반공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피로감이 커지면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제작이 크게 줄었다. 그러던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와 2005년 <웰컴 투 동막골>처럼 한국전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영화들이 크게 흥행했고 2011년 장훈 감독이 연출하고 박상연 작가가 각본을 쓴 한국전쟁 배경의 영화 <고지전>이 개봉했다.

<고지전>은 한창 치열했던 전쟁초기가 아닌 휴전협정이 난항을 겪던 전쟁후기, 상부의 명령에 의해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애록 고지를 사수하면서 지쳐 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여름방학 성수기인 2011년7월에 개봉한 <고지전>은 전국 294만 관객을 동원했지만 <트랜스포머3>와 <최종병기 활>,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2>, <퀵> 등 국내외 화제작들에 밀리면서 손익분기점(약 400만)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고지전>은 다소 아쉬운 흥행성적과 별개로 N포털사이트에서 8.69의 평점을 받는 등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유지나 평론가는 '분단전쟁영화, 한국형 블록버스터 고지를 점령했다'고 극찬했고 김도훈 평론가도 '(천만영화)<태극기 휘날리며>를 넘어선다'고 평가했다. 영화에 대한 평가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동진 평론가마저 별 4개를 주며 '한국전 소재 영화들에 대해 시큰둥했던 심정을 일소한다'는 한줄평을 남겼다.

사실 <고지전>은 휴전 직전시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인 만큼 여느 전쟁영화들처럼 화려한 전투장면이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간간이 나오는 전투장면의 퀄리티는 상당히 공 들여 만든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영화 후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겁에 질린 남북한 병사들이 함께 남성식 이병이 북한군과 가사를 공유했던 <전선야곡>을 부르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장면은 슬프고도 처절했던 <고지전>의 명장면이다.

김옥빈이 연기한 여성저격수 차태경에 대해서는 관객들 사이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여성저격수가 있었는가'에 대한 찬반의견이 오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구소련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같은 여성저격수가 존재했고 <고지전>이 창작물인 만큼 여성저격수의 존재가 불가능할 이유도 없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에서도 나이 어린 베트콩 여성 저격수가 등장한 바 있다.

PTSD 겪다 친구 품에서 숨을 거둔 1소대장
 
 고수는 전쟁의 상처를 겪으면서도 상부의 명령 때문에 2년 넘게 전장을 지키는 김수혁 중위를 연기했다.

고수는 전쟁의 상처를 겪으면서도 상부의 명령 때문에 2년 넘게 전장을 지키는 김수혁 중위를 연기했다. ⓒ (주)쇼박스

 
고수가 연기한 악어중대 1소대장 김수혁은 개전 초기 의정부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간신히 살아나 많은 전투를 겪으며 중위까지 진급했다. 김수혁은 중대원들의 신임을 받는 지휘관이 됐지만 길어지는 전쟁으로 인한 회의감과 매일매일 죽어나가는 전우들 때문에 극심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결국 2초에게 저격을 당한 김수혁은 "우리 어머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라는 절망 섞인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4편의 천만 영화를 비롯해 <킹덤>,<무빙>,<닭강정> 등 화제의 OTT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하고 있는 류승룡은 <고지전>에서 애록고지의 인민군 중대장 현정윤 역을 맡았다. 의정부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강은표(신하균 분)를 풀어주며 "이 전쟁은 일주일이면 끝난다.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자신했지만 전쟁은 2년 넘게 끝나지 않았다. 심한 부상을 당한 현정윤은 토굴에서 휴전소식을 듣고 강은표와 함께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숨을 거둔다.

북한군과 내통한다는 비리를 밝히기 위해 악어중대로 발령 받은 강은표 중위는 죽은 줄 알았던 친구 수혁을 만나지만 악어중대가 북한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처음엔 크게 분노하면서 수혁에게 총을 겨누지만 그저 물물교환을 통해 전쟁의 괴로움을 달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묵인한다. 최후의 전투에서 모든 중대원을 잃은 강은표 중위는 정전협정 소식을 들은 후 넋이 나간 얼굴로 고지를 내려오며 영화의 끝을 장식한다.

지금은 어느덧 만 30세가 된 아역출신 배우 이다윗은 <고지전>에서 강은표 중위와 함께 악어부대로 발령 받은 신병 남성식 이병을 연기했다(남성식은 박상연 작가가 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김태우가, 드라마 <히트>에서 마동석이 사용했던 이름이다). 처음 전투에 투입될 때만 해도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남성식 이병은 선임들과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로 군생활에 빠르게 적응했지만 '2초'가 쏜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난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고지전 장훈감독 김옥빈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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