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1 17:13최종 업데이트 21.10.1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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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의 선거 공보물.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

 

노무현 대통령을 배출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다소 생뚱맞은 출마 선언이 있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재수와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가 인상 깊었던 그해 대선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심복 중의 심복이자 제5공화국 정권의 상징 중의 상징인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이 입후보한 일이 그것이다.


전두환이 퇴임하는 해에 있었던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 이래로 일관되게 전두환을 옹호하며 의리를 보여준 일로 인해, 장세동은 "'의리의 화신',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는 오도된 평가를"(1996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 47면) 받고 있었다.

5공 비리 혐의로 1989년 1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된 적이 있는 장세동은 1993년 봄에 또다시 구속됐다. 1987년에 있었던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용팔이 사건) 등이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1993년 3월 10일 구속됐다가 그해 12월 15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날 오후 서울구치소 철문을 열고 나온 장세동은 전두환의 소재부터 확인했다. 그달 17일자 <조선일보> 5면 기사에 따르면, "장씨는 서울구치소를 나오자마자 수소문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출소 후 전두환에게 큰절

그날 전두환은 장인 이규동의 생일잔치를 위해 처남 집인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에 있었다. 이곳으로 찾아간 장세동은 전두환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면서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고함치듯 외쳤다. "마치 신병 신고하는 듯한 기세등등한 목소리였다"고 위 기사는 전한다.

그런 이미지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5공의 상징'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일본어 꼬붕(子分)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미지의 소유자가, 5공이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몰락해버리고도 한참 흐른 뒤인 2002년에 대선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의 출마는 전두환 정권의 죄악과 5·18 학살에 대한 죄의식 및 역사의식이 결여됐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생뚱맞다는 느낌도 풍길 만한 일이었다.
  
2002년 8월 2일, 장세동은 '장세동넷(www.jangsedong.net)'이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해 언론의 주목을 끈 뒤 박정희 10월 유신 30주년인 그해 10월 17일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새로운 국가 기본질서 창출을 염원하는 국민의 마음과 뜻을 믿고 단기필마로 나섰다"(18일자 <한국경제>)는 문구를 담은 글이었다.

10월 21일엔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이때 그가 내놓은 공약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대 대통령들과 머리를 맞대겠다'는 부분이었다. 그달 22일자 <국민일보> '장세동 출마 배경 - 그는 누구인가'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은 일정 기간의 역사를 책임져온 살아 있는 역사이기에 새로운 대통령이 총체적 책임을 지고 동서갈등·남북통일의 과제를 역대 대통령들과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발언했다.

장세동 측은 대선 출마가 다른 누군가의 뜻이 아닌 장세동 자신의 뜻임을 강조했다. 18일자 <세계일보> '장세동 씨 대선 출마'에 따르면, 보도자료를 낸 17일 목요일에 그의 측근은 "(다가오는) 주말에 전 대통령을 면담하고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발언함으로써 전두환과의 사전 조율이 없었음을 드러냈다.

전두환 역시 그 출마가 자신과 무관함을 강조했다. 장세동의 공식 선언 다음날인 10월 22일 화요일, 취임 인사차 서울 연희동 자택을 방문한 김석수 총리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장세동을 만류했음을 강조했다. 그달 23일자 <중앙일보> '장세동도 나이 드니 출마 말려도 안 들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사람이 올해 66세인데"라며 이제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장세동은 여섯 살 많은 옛 상관 전두환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독 결행하는 모양새 속에서 출마를 강행했다. 하지만 투표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갑자기 행보를 멈췄다. 밤중에 정몽준의 느닷없는 단일화 철회 선언이 있었던 그날, 장세동은 "역사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대통령후보를 사퇴키로 했다"는 성명을 내놓고 대선무대에서 내려갔다.

그달 19일자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겨루는 상황에서 더 이상 선거전에 임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후보직을 사퇴한다는 게 측근의 말이었다.

새로운 국가의 창출을 염원하는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고 '역대 대통령들'과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운영하는 시대를 열겠다며, 전두환의 만류까지 뿌리치는 모양새 속에서 기세 좋게 출마했던 장세동은 "역사와 나라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대선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번에는 감옥이 아닌 '대선 출마'로 휴가를 떠난 그의 여행은 이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고 박정희대통령 23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정몽준 후보, 장세동 후보, 이한동 후보. ⓒ 이종호

 

모든 건 기획된 일?

그런데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된 일련의 사건에는 패턴이 보인다. 그 자신은 "단기필마로 나섰다"고 강조했지만 실상은 조직적으로 기획된 일일 수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의 출마에 관한 이야기는, 전두환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양해 하에 1997년 12월 22일 사면·복권을 받은 이후인 1998년 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나왔다. 한나라당 최병렬 의원의 사퇴로 인한 서울 서초갑 보궐선거(1998.7.21)에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공천을 받아 출마할 것이라는 설이 그때 있었다. 그해 6월 24일자 <한겨레> '왜 하필이면'은 6월 22일에 연희동에서 박태준 자민련 총재와 전두환의 30여 분간의 밀담이 있었으며 이 자리에서 그런 문제들이 논의됐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듬해에는 '설'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출마 움직임까지 있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의 당선 무효로 6월 3일 치러질 송파갑 재선거에 그가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해 3월 11일자 <동아일보> '장세동 씨 송파갑 재선 출마 검토'는 "자신은 물론 5공의 명예회복을 위해 송파갑 재선을 통한 정계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장세동이 생각하는 '5공'은 전두환 그 자체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출마 목적은 전두환의 명예회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도 전두환의 만류가 있었고, 그는 만류를 수용해서 출마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은 5공 세력의 조직적 움직임이 보도되는 속에서 일어났다. 허화평·이원홍 같은 5공 핵심 브레인들이 오자복·이종구·최세창 전 국방장관 등과 함께 '비아기스 센터'를 만들어 보수 성향의 학자들을 끌어 모으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1999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 '5, 6공 세력 움직임 심상찮다'에 등장한 이 연구소 관계자는 영어 VIsion, AGenda, ISsue의 앞 글자를 딴 비아기스라는 명칭과 관련해 "국가 운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5공 세력의 국가 경영 의지를 담아 이런 명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비역 장성과 학자들을 포함해 200여 명이 가세했으니, 총선 캠프 정도가 아니라 대선 캠프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속에서 장세동이 가장 앞장서 국민들 속으로 뛰어들며 여론 추이를 가늠하는 일이 되풀이됐던 것이다.

장세동의 행보에는 공동 여당인 자민련의 협력뿐 아니라 또 다른 공동 여당인 국민회의의 묵인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1999년 11월 22일자 <경향신문> '이회창-장세동 맞붙을까'는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과 맞붙은 김대중의 국민회의가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서울 송파갑에 출마할 이회창을 낙마시킬 목적으로 장세동을 출마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보도된 두 여당의 전략은 장세동을 무소속으로 출마시킨 뒤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비공식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전두환이 출마를 만류했고, 장세동은 이를 수용했다.

전두환 사면·복권을 계기로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 측의 관계는 좋아졌다. 구군부 세력의 리더인 김종필은 신군부 리더인 전두환과 악연이 깊었지만, 자신의 내각제 개헌 꿈을 실현시키자면 유력 대통령 후보인 이회창을 낙마시킬 필요가 있었고 공동 여당이 취약한 송파갑에서 이회창을 낙마시키자면 전두환 측과도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김종필이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을 지원해 이회창을 낙마시키는 시나리오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대통령 후보 당시의 장세동 전 안기부장 ⓒ 이종호

 

반성보다는 여론 탐색

장세동의 출마가 거론되기 시작한 1998년 초반은 약 10년간 국민적 지탄을 받던 전두환 진영이 1997년 12월 사면·복권을 계기로 법률적 '용서'를 받은 직후였다. 여기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의 악연을 잊고 전두환에게 '햇볕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전두환 진영으로서는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기였다.

바로 이런 시기에 장세동의 출마가 거론되고 비아기스 연구소가 창립되는 등의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기와 겹치는 1998~2002년 기간에 장세동과 전두환 측근들이 벌인 행보는 전두환과 5공 세력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직적 기획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의 언제나 전두환이 만류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 만류를 받아들여 중도 하차하는 장면들이 되풀이된 것은 이들의 '치고 빠지기' 전략의 산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종의 여론 탐색이 주된 목적 중 하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기획을 위해 전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앞장서서 나갔다가 번번이 중도 포기하면서 어느 정도의 체면 손상을 감내했다. 1998~2002년 기간은 장세동의 '선거 휴가철'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전두환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되찾고자 한다면 5·18 영령들과 국민들에게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도, 전두환과 그 측근들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직 안기부장도 그런 쪽으로 전두환을 이끌지 않았다. 전직 안기부장은 무의미한 '휴가'만 계속 되풀이할 뿐이었다. 장세동의 2002년 대선 출마는 5공 세력의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여론탐색전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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