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8 18:11최종 업데이트 22.04.08 18:11
  • 본문듣기

지난 3월 31일 가브리엘의 '세뇨르' 발언에 분노한 의원들이 하원 회의장 단상을 점거했다. 사진 중앙 앉은 이가 정무분과 위원장 산티아고 크릴 의원이고 그를 중심으로 사진 좌측이 '트랜스 국회의원' 살마다. 그리고 산티아고 의원의 사진 오른쪽이 또 다른 '트랜스 국회의원' 마리아 클레멘테다. 그녀가 산티아고 위원장에게 정회할 것과 가브리엘 의원을 퇴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 국회방송 캡처

 
"당신이 조장하는 혐오와 차별이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폭력을 유발하고 결국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갈지 당신은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지난 3월 31일, 멕시코 연방 하원 정무위원회 회의 중 터진 고성이었다. 소리를 지른 이는 '트랜스 국회의원'으로 불리는 현 여당 MORENA 소속 살마 루에바노(Salma Luevano, 이하 살마) 의원이었고, 그 상대는 멕시코 정당들 중 보수우파적 성향이 강한 PAN 소속 가브리엘 쿠아드리(Gabriel Quadri, 이하 가브리엘) 의원이었다. 둘은 지난 1월부터 성소수자의 보건지원을 둘러싼 멕시코 보건법 개정 과정에서 첨예하게 대립해오던 중이었다.

세뇨라를 세뇨르로?

일촉즉발 상태의 긴장은 가브리엘 의원이 발언하는 과정에서 폭발했다. 살마 의원을 칭하면서 이름 앞에 성 구분 칭호를 남성격으로 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스페인어권 멕시코에서는 모든 칭호에 성 구분을 적용하기에 '공식적으로' 여성인 살마에게 '세뇨라(Señora)' 라는 칭호를 붙여야 함에도 남성격인 '세뇨르(Señor)'라는 칭호를 붙인 것이다. 영어로 친다면, '미시즈 살마'가 되었어야 하나 '미스터 살마'가 된 셈이다.


그의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마치 화약고에 불이 닿은 듯 이곳저곳에서 거친 맹공들이 터져 나왔다. 화근의 중심에 선 가브리엘 의원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들이었다. 당과 상관없이 많은 의원들이 회의장 내에서 가브리엘에게 항의했고 퇴장과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요지는 살마 의원이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정한 결정을 가브리엘이 존중하지 않았을 뿐더러 조롱했다는 것이다. 조롱 자체가 곧 '혐오정치'이며 이런 방식의 정치가 사회 전반에 또 다른 혐오와 차별과 갈등을 유발한다는 항의도 이어졌다.

사실 세뇨르와 세뇨라는 마지막 a로 끝나는 철자 하나 차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쉽게 할 수 있는 실수다. 그럼에도 가브리엘의 세뇨르 발언에 많은 의원들이 분노했던 것은 그의 발언이 의도적이었고 악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성소수자에 대한 비하와 조롱이 담겨 있었고, 상대방의 삶에 대한 의사결정을 본인의 잣대로 재단하려 했으며, 멕시코 사회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불러오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3월 31일 하원 회의장 단상을 점거한 의원들. 방송 자막에 <모욕 당한 트랜스 의원들의 단상 점거> 라는 설명이 되어 있다. ⓒ Milenio 뉴스 화면

 
동료 의원들의 분노

화를 삭이지 못한 일부 의원들은 가브리엘을 향해 '옷은 한 벌에 족히 1만 5천 페소(한화 약 70만원) 하는 양복으로 번드르르하게 입고 다니지만 머릿속에 든 생각은 싸구려 중 싸구려'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심지어 '머릿속이 똥으로 가득 찬'이라는 표현도 쏟아져 나왔다.

작은 단어 하나로 촉발된 갈등의 폭발로 보였지만 사실 지난 1월 이후 가브리엘은 자신의 SNS를 이용해 '트랜스 국회의원'들에 대해 조롱해오던 터였다. 특히 성전환 수술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두 명의 의원들에 대해 '우락부락한 몸매가 여성 옷을 입는다고 가려지는가?'라는 식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조롱의 대상이 된 살마 의원은 가브리엘 의원을 고소해 둔 상태다. 자신이 '트랜스 국회의원'으로서 대표하는 수백 만 명의 트랜스 젠더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였다.
 

가브리엘 쿠아드리(Gabriel Quadri) 의원의 SNS 계정. 지난 1월 6일 성소수자를 조롱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 가브리엘 의원 SNS

 
가브리엘의 '세뇨르 살마' 발언으로 시작된 의원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회의를 중단하고 가브리엘 의원을 회의장에서 내보낼 것을 의장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브리엘 의원과 같은 당 소속인 의장 산티아고 크릴(Santiago Creel) 의원이 이에 응하지 않자 결국 상당 수 의원들이 단상으로 올라 자신들의 몸으로 의장을 둘러싸고 마이크를 빼앗으며 회의를 강제로 중단시켰다.

무지개 쿼터

자칭 타칭 그리고 공식적으로도 '트랜스 국회의원'이라 칭해지는 다소 생소한 직함은 작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무지개 쿼터(Cuota arcoíris)'에 의해 탄생했다. 같은 해 연방 선거법원이 차별 철폐 조항 일환으로 각 당마다 최소 세 명 이상의 성소수자 후보를 낼 것을 결정하였고 연방 선거관리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성소수자들이 원내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구체적으로 최소 세 명의 후보 중 두 명은 지역구 후보자로 공천하고 나머지 한 명은 순번 10위 이내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렇게 멕시코 선거 역사에서 최초로 '무지개 배분'이 시작되었고, 역시나 최초로 500명 하원 의원 중 4명의 '트랜스 국회의원(하원)'이 탄생하였다.
 

2021년 9월 1일 트랜스 의원 살마(사진 좌측)와 마리아(사진 우측)가 멕시코 역사상 최초로 성소수자를 대표하여 제65대 연방 하원에 입성했다. ⓒ MORENA SNS


물론, 반대가 없지 않았다. 멕시코는 엄격한 가톨릭 국가다. 여전히 낙태에 대한 입장이 초보수적이고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범죄가 흔한 나라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피살되는 건 수 중 78%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지고 그 중 멕시코가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범죄 건수를 기록한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 성소수자들의 평균 수명이 60-65세인 반면 멕시코 성소수자들의 평균 수명은 35세를 넘지 못한다. 대부분 피살과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내가 살아가는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공공연히 성소수자에 대한 린치 혹은 피살 소식이 들려온다. 수년 전의 일이긴 하나 직장 동료들 중에도 성소수자란 이유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한 경우가 있었다. 그들 집에 강도가 들어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여겨 수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수사 대상도 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연방 선거법원이 무지개 쿼터 할당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근간은 멕시코 헌법 제1조다. 우리나라 헌법이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하며 주권과 관력을 다루는 것과 달리, 멕시코 헌법은 가장 먼저 인권을 다룬다.

'멕시코 합중국의 모든 사람은 멕시코 헌법과 멕시코가 가입한 국제 조약이 보장하는 인권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정하지 않은 범위에서 위의 권리들은 제한되거나 침해될 수 없다'라는 내용이 멕시코 헌법 제1조다. 이에 2011년 6월 개정을 통해 새로운 항이 추가되는데, '인종, 성별, 국적, 나이, 장애, 건강 조건, 성적 선호, 결혼 여부로 인한 차별이 금지된다'는 내용이다.

성적 선호로 인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헌법 조항과 성적 선호로 인한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 사이에 작년 멕시코 총선에서 무지개 할당이 만들어지고 총 네 명의 '트랜스' 연방 하원의원이 탄생했다. 그간 성적 선호가 다르다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숱한 사람들의 목숨 값이기도 하다.

연방이 아닌 멕시코시티를 포함한 32개 주의 경우 각 주 선거법원 결정에 따라 무지개 할당을 적용하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하지만, 각 주 의회와 지방 정부에서도 '트랜스' 피선거권자들과 당선자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트랜스 국회의원인 살마(Salma Luevano) 의원이 지지자들과 무지개색으로 꾸며진 당기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살마 의원 SNS

 
가브리엘 의원의 의도적인 '세뇨르' 발언으로 회의 단상이 점거되고 회의가 중단되는 소동이 있었던 지난 3월 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International Transgender Day of Visibility)'이었다. 마침 당일 하원 의원 본회의장에도 무지개색 대형 휘장이 입장해 있던 터였다.

결국 고개 숙인 국회의원

이번 소동을 두고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가브리엘 의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왜 타인의 삶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폭력을 행하냐는 것이다. 초등학교 중퇴 정도의 배움을 가진 촌로나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 교수나 별반 차이가 없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고 숨어버리는 '샤이' 반대층과 어느 순간 불쑥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반대층 역시 분명히 있겠지만, 좋든 나쁘든 멕시코 사회의 다양성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품을 내주고 있는 것 같다.

당장 내가 근무하는 학교만 해도 동료들 중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상당히 많고, 그 중 일부는 법적인 절차를 거쳐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는 경우도 있다. 남성이었던 교수가 어느 날 여성이 되어 나타났을 때 그에 대해 학교나 학생이나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인인 이상 타인이 관여할 수 없는 개인적 결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해 불쾌감을 느낄 순 있겠지만 그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일 뿐, 학교 안에서 공적 문제로 환원되는 일은 없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무지와 무관용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져 왔기 때문이다.
 

'트랜스' 의원들과 대척점에 있는 국민행동당 (PAN) 소속 가브리엘 쿠아드리 의원 ⓒ Gabriel Quadri SNS

 
글을 맺기 전 다시 살마와 가브리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결국 가브리엘 의원은 살마와 하원의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단, 사과의 조건으로 자신이 살마 의원을 향해 '세뇨르'라 칭한 부분을 의회 속기록에서 지워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살마 의원은 소동 당일 의장석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의장에 대한 존중을 표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살마 의원과 같이 하원에 입성한 현 여당 소속 트랜스 의원 마리아 클레멘테(Maria Clemente)는 소동 당일 가브리엘 의원과 싸우는 과정, 그리고 단상의 의장석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당의 다른 의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음을 이유로 탈당했다.
 

지난 3월 31일 하원 정무분과 회의 중 보수우파 성격의 국민행동당(PAN) 소속 가브리엘 의원의 발언에 항의하여 단상을 점거한 후 여당 소속이었던 마리아 클레멘테 의원은 자기 당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탈당하였다. 마리아 클레멘테 의원은 자신의 방 앞에 <무소속 연방 하원의원 마리아 클레멘테>라는 대자보를 붙여 당적이 표시된 이름표를 가렸다. ⓒ Maria Clemente SNS

 
그로부터 일주일 후, 2022년 4월 6일, 멕시코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당일 새벽 정례 기자회견장에서 3월 31일 하원에서 있었던 '소동'과 관련하여 (해당 의원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그런 사고 자체가 곧 인종주의자, 차별주의자, 계급주의자들 사고의 근간이라고 못 박았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