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0 18:48최종 업데이트 22.08.2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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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5월 말이지만 햇살이 유난히 뜨겁다. 대구여서 그런가. 베트남인들이 주로 다니는 교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기로 해 서대구역에서 내렸다. 신세계백화점 등 화려한 매장이 있는 동대구역과 달리 서대구역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내 눈을 사로잡는 현수막들이 버스정류장 앞에 있었다.

"근조 -서대구역사 개통의 희생자 세입자의 희생을 애도합니다."


기차역을 신축하면서 사람들이 쫓겨나고 다치고 죽은 것이다. 쫓겨난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주는 한 나라 안에서도 일어난다. 국경을 넘는 이주든, 국경 안에서의 이주든 온전히 개인의 선택과 의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먹고 살기 위해서든, 국가에서의 탄압을 피해서든,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든 살던 곳을 떠나는 게 이주다. 국민만을 인권의 주체로 한정하려는 국가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국경을 넘는 이주노동자들은 더 많은 차별과 희생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 펜데믹 상황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바뀌지 않았다. 감염병 예방대책은 차별의 벽에 갇혀 있었다. 코로나 초기 국내적으로 집단감염이 가장 심했던 대구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은 어땠을까. 코로나 2년이 넘은 2022년 5월, 이주노동자 집단감염이 심했던 대구로 갔다.

코로나 감염 경험이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러 서구 달서촌으로 이동했다. 가는 중에 한때 논란이 되었던 이슬람사원도 보인다. 중국어로 쓰인 상점들도 보인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대구지역 이주민은 2020년 기준 5만 명이고, 이 중 한국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3만7천명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미등록이주노동자까지 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교회는 공단과 공단 사이에 위치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중 국적별로 신도들을 모아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의 언어만 사용하니 소통도 쉽고, 커뮤니티 같은 느낌도 있다. 교회 입구에 대구이주민선교센터라는 표지가 보인다. 설교를 하는 단상 앞에도 큼직하게 베트남어로 쓰여 있다.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예배를 보았다. 연령과 성별도 다양했다.
 

예배중인 베트남 교회 모습 ⓒ 명숙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웃는다. 한국 국적의 사람도 대여섯 명 보였다. 성경책과 찬송가책도 베트남어로 되어 있다. 예배는 베트남 자막과 베트남어로 진행됐다. 예배 중간에 간간이 한국어로 안내를 했다. 여느 교회가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예배가 끝나고 새로 참가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음식도 나눴다. 신도들이 나간 후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통역은 교회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이유진 씨가 해주었다. 베트남에서 온 그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해 교회에서 이주민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기도 있는데… 생활은 어떻게 하라고

"작업하기 전에 코로나 검사를 하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몸이 안 좋아서 코로나 (검사) 테스트 했는데 양성이 나와서 병원에 갔어요."

예배를 마친 후 줄곧 아이와 놀아주던 호아이씨가 먼저 입을 뗐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그는 백신을 2차까지 맞았는데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했다. 하필 그날이 본인 생일이었다며 아쉬움을 비쳤다. 2015년에 한국에 들어온 그는 일하다가 만난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그는 "합법 비자" 이주노동자라 코로나 검사나 치료를 병원에서 했다며, 미등록이주노동자보다 낫다고 했다. .

"테스트기 보니까 양성이 나왔어요. 회사에서 보건소 가라고 했어요. 합법 비자라 병원이든 보건소든 아무데나 가도 돼요. 건설현장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갔다 왔어요. 미등록 사람들은 건강보험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보건소에 가야 받을 수 있어요. 안 그러면 7만 원 정도 든다고 해요. 저는 검사 비용과 약값까지 6600원밖에 안 들었어요. 그때가 (2022년) 2월이라 막 추웠는데, 미등록인 동료들은 보건소 앞에서 한참 기다렸어요."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코로나에 감염되어 일주일간 격리되었던 호아이씨 ⓒ 명숙

 
'합법비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상대적으로 드러낸 표현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은 합법과 불법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기도 하고 많이 사용하기도 한다. 법의 이름으로 강제추방 등 삶을 제한당하는 일이 많다는 뜻이자 법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다.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고 있는 고용허가제로 인해 수많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생겨난다. 이주노동자는 자기 마음대로 사업장을 바꿀 수가 없다.

때로는 사장 마음에 안 들거나 체불임금 등 부당행위에 대해 문제제기해 사업장에서 쫓겨나면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된다.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더라도 1개월 안에 구직 등록을 해야 하고 구직 등록 후 3개월 안에 새 직장을 구해야 한다.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미등록 상태가 된다.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불법체류자라고 부르니 사람들은 그들이 법을 어기는 범죄자라는 부정적 인상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들도 정직하게 일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한다. 심지어 전 세계적인 감염 위기 속에서도 감염을 피하거나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까지 줄어든다.
 

교회 안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 명숙


호아이씨에게 코로나에 감염됐을 때 어떤 점이 어려웠냐고 물으니 생계비를 꼽았다.

"격리기간 동안 일을 못했잖아요. 하루 일당 20만 원 받고 있었는데 일주일 격리 지나고 나서 받은 돈이 20만원밖에 안 됐어요. 아기도 있는데…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아프면 쉬라고 하지만 자가격리되는 동안에 필요한 만큼의 생계비는 지원되지 않았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나 정주노동자는 유급으로 쉬지만 건설현장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는 생계를 이어갈 만한 지원은 받지 못한다. 그에게도 20만원이 전부였다.

그에게 2020년에 전 국민에게 주었다는 재난지원금은 받았는지 물었다. 대답은 "못 받았어요"였다. 2020년 전 국민에게 지원된 재난지원금을 받은 이주노동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인권조례가 있는 몇몇 지자체만이 이주민을 포함시켰을 뿐이다. 공중보건위기에도 이주노동자는 뒤로 밀렸다. 뒤로 밀린 것은 지원금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확산 초기인 2020년에는 코로나와 관련된 정보도 제대로 통역되지 않았고 공적 마스크분배도 체류자격과 건강보험 가입여부로 한정했다.

코로나검사도 백신접종도 차별적이었다. 초기에는 신분증이나 건강보험 가입자를 중심으로 백신을 접종 하다 보니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엄두도 못 냈다. 나중에는 임시번호를 발급해 미등록이주노동자들도 접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간간이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백신접종 후 강제 추방됐다는 보도가 나와 미등록이주노동자에게 더 큰 공포를 주었다. 반면 코로나 검사는 더 자주 요구했다.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가 같이 일하는 곳에서도 이주노동자만 코로나 검사를 받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지방자치단체가 많았다.

2021년 6월 20일 중앙대책본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개편을 발표하며, 이주노동자 밀집사업장 등을 중점관리사업장으로 지정했고, 지자체가 PCR 검사를 이것과 연계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를 감염원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서울시인권위원회는 차별이니 시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시정된 곳은 많지 않다. 그가 일하는 건설현장에서도 이주노동자는 검사를 꼬박꼬박 했다고 한다.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더 나빴다. 통역하던 유진씨는 미등록이주노동자는 코로나검사를 받고 양성으로 나와도 약도 못 받고 음식지원도 못 받았다고 덧붙였다. 코로나 확진자에게 주는 생활지원금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현재는 중위소득 100%이하의 가구의 격리자에게 지원금을 주지만 격리자 모두에게 지급되었을 때나 지금이나 미등록이주노동자는 대상이 아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는 코로나에 더 취약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요"

손가락을 감싸고 연신 밝게 웃던 듀엔 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프레스에 절단된 손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 했다. 그가 산재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가 확산됐다. 2020년 초는 한국에 있던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코로나를 피해 귀국을 하던 때다. 대구시는 특히 코로나 집단감염으로 봉쇄될 정도로 심각한 단계였다.

"그때 코로나 감염자 아주 많아서 베트남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돌아갈 수 없었어요. 한국에 일하러 왔는데 프레스공장에서 일하다 다쳐서 베트남에 돌아가지도 못했어요."
 

한국에 유학을 왔다가 산재를 당한 후 공부도 일도 못하게 된 듀엔씨 ⓒ 명숙

 
듀엔씨는 산재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고향으로 갈수 없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됐고, 통원치료도 해야 해서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프레스공장에서 손가락 네 개가 모두 절단되는 큰 산재를 당했다. 현재까지 총 10회의 대수술을 했다.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었고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인정도 받았으나 10%는 본인부담이다.

"그때는 통원치료 중이었어요. 수술을 많이 했기 때문에 몸이 약해서 조심을 했어요. 감염될까봐 버스도 안타고 걸어 다녔어요. 몸이 약하니까 기침을 할 때도 있었는데 기침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어요."

듀엔씨는 한국으로 온 유학생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사고가 났다. 지금은 산재기간은 끝났지만 일도 공부도 할 수 없다. 대구 출입국관리소는 베트남에 다시 가서 유학 비자를 받으라고 했다. 치료를 받느라 체류기간이 2년인 유학비자가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치료를 받는 G1비자가 됐기 때문이다.

"제 꿈은 통역사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공부도 할 수 없어요. 베트남에 들어가서 한국에 다시 들어오려면 유학센터에 준 1500만 원을 갚아야 해요. 은행에서 돈 빌려서 온 거예요. 그런데 제가 지금 돈 없잖아요. 그런데 공부하고 싶으면 베트남에 들어가서 다시 비자 받고 오라고 해요. 출입국관리소에서 동의만 해준다면 저는 학비 400만 원만 납부하면 공부할 수 있어요. 손을 다쳤으니 한국어 공부해야 베트남에 가서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어요."

손을 많이 다쳐서 현재 한국에서 돈을 벌 수 없다. 일을 할 수 없으니 생활도 걱정이다. 그래도 그는 본인은 나은 편이라고 했다. 사촌형과 같이 생활하고 있어서 생활비는 거의 안 들기 때문이다. 사고가 크게 났음에도 부모님께도 말을 안 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생활도 힘들 텐데 차마 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고향 친구들이 치료비를 모금해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바람에 집에서도 알게 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충격을 받을까봐 다친 손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지금 부모님도 아파서 매달 병원에 가야 해요. 한국에 와서 공부만 하고 싶었는데 생활비, 기숙사비, 학비 다 필요했어요. 유학 올 때 든 빚도 갚아야 해요. 말레이시아 갔다가 한국은 인권이 좋다고 해서 한국에 왔는데…. 외국인 노동자들 인권은 아무도 신경 안 써요. 저는 어떻게 사나요?"

그의 나이 스물일곱, 통역 공부는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묻자 한참동안 말을 못했다. 유난히 큰 눈에 그저 눈물만 그렁거렸다. 그는 교회 등 주변의 도움으로 휴업급여와 병원비는 받았고 현재는 회사를 상대로 장해보상금 등 사고 책임을 묻는 소송 중이다. "어떻게 사냐?"는 그의 물음에 아직 한국정부는 답이 없다.

최근 코로나에 감염된 사촌형을 돌보다가 그도 감염됐다. 하지만 돈 때문에 약국에서 구입한 코로나검사 진단키트로 검사하고 집에서 쉬기만 했다. G1 비자를 갖고 있었지만 건강보험은 없어서다. 수입도 없고 건강보험도 없는 그에게 검사나 치료에 드는 비용은 큰 부담이다. 다행히 증상은 심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숨쉬기가 좀 힘들고 피곤한 것이 오래간 정도라고 했다. 코로나 시기에도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이주민들은 온몸으로 불이익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주변에 건강보험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 많아요. 건강보험 있는 사람들은 공짜로 검사 받는데 (건강보험) 없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병원비를 걱정해야 해요. 그래서 주변에 코로나 걸릴까봐 두려워하면서도 병원에 못 가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 같은 외국인들에게 너무 한 일이에요."

통역하던 유진씨도 아프면 건강보험 가입 여부에 상관없이 치료해줘야 하지 않냐며 맞장구쳤다. 미등록인 사람들도 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그래야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지 않겠냐고.

목발 짚고 오산에서 대구까지 온 까닭

듀엔씨 옆으로 목발을 짚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유엔씨였다. 그도 유학생으로 왔다가 산재를 입었다. 해양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다니다가 생활비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유학생들 중에는 생활비와 유학을 오느라 진 빚을 갚으려고 일을 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유럽으로 유학 간 친구들이 그 나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들도 다쳤을 때 이렇게 방치되었을까.
 

산재 치료 중에 코로나에 감염되었으나 비용부담으로 진단과 치료를 스스로 해결해야했던 유엔씨 ⓒ 명숙

 
유엔씨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TV 모니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다. 추락했는데 다리가 꺾였다. 오송에서 수술한 후 도와 줄 사람도 의지할 거처도 없어서 수소문 끝에 대구로 내려왔다. 유진씨는 대구시 북부정류장에서 혼자서 목발을 짚고 걸어오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고 기억했다.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니 응급차를 이용하는 게 좋지만 돈이 많이 들어 버스를 혼자 타고 온 것이다.

"산재로 인정돼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어요. 퇴원했는데 어디로 가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아는 사람이 베트남 누나가 대구 교회에 있는데 잘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멀리 외국에서 온 이주민을 위한 정책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이주민들이 당장 의지할 곳은 국가별 커뮤니티다. 코로나 위기에서 정보라도 얻을 수 있고,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말이 통하는 신뢰할 만한 집단이 필요하다. 한국의 공식기관에서 생긴 불신과 의문 그리고 상처를 풀 곳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주민들에게 국가별 커뮤니티는 병원이자 학교이자 쉼터이다. 그가 대구까지 올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이 너무 씁쓸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부러진 다리에 박은 철심 제거 수술이 남았기 때문에 아직 일은 할 수 없다. G1 비자이기도 해 일을 할 수도 없으니 생활비는 친구들에게 손을 벌린다고 했다.

그가 코로나에 감염된 것은 올해 초였다. 열이 많이 나고 가슴이 아파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했다. 보건소에서 지원해주는 약이나 물품도 없으니 주변 형들이 먹는 약을 같이 먹었다. 이제는 좀 나아졌지만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았다. 코로나 확산이 잦아들어 방역에 소홀한 분위기에서도 유엔씨는 불안해서 마스크는 꼭 쓰고 다닌다. 수술이 남았으니 더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예배 중 나온 성경 말씀이 겹쳐진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에 이르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디모데후서 3장 1절~5절)'

국적이 있는 자들만을 돌보는 한국의 정책은 성서의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이러스는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지만 치료와 피해지원은 인종과 국적을 따지는 현실에서 이주노동자의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코로나의 피해가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교회 벽마다 본국에 남겨 놓은 가족들과 찍은 사진, 한국에서 동료들과 놀러가 찍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 명숙

 
유엔씨와 이야기를 마치고 교회 안을 둘러봤다. 벽마다 본국에 남겨 놓은 가족들과 찍은 사진, 한국에서 동료들과 놀러가 찍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래고 새롭게 추억을 쌓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만난 이주노동자들에게 과거의 사진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 산재와 코로나를 경험한 그들에게 따뜻한 추억의 사진을 남기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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