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4 11:19최종 업데이트 22.09.0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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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인 지난 3월 1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옥사를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3·1운동 당일, 서울 탑골공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100년 뒤의 우리는 이를 온전히 실감하기 힘들다. 현장을 지켰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연세대) 학생인 정석해는 '조선 독립 만세', '왜놈 물러가라'는 구호가 "지축을 진동"시켰다고 회고했다. 주관적 느낌이 들어갔겠지만, 탑골공원 주변의 서울 시내에서 울려 퍼진 함성과 열기가 어떠했을지 느낄 수 있다.


정석해가 1969년 3월 <신동아>에 기고한 '남대문 역두의 독립만세'는 그 같은 지축의 진동으로 발생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펴낸 <국내 3·1운동 1-중부·북부>에 인용된 이 기고문에 따르면, 1919년판 촛불혁명이 폭발한 광화문에서는 일제 순사가 모자를 벗어 던지고 제복을 찢어 던지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까지 있었다.

제복을 벗어서 던지지 않고, 찢어서 던졌다. 손으로 찢기 힘들었을 제복을 군중이 보는 데서 찢었다. 그날 광화문의 에너지가 순사에게 그런 괴력을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국내 3·1운동 1-중부·북부>에 인용된 국어학자 이희승의 1969년 기고문 '내가 겪은 3·1운동'에 의하면, 광화문에서 모자를 벗어 던진 일제 관헌은 그 순사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인력거를 타고 현장을 지나가던 일본인 경기지사도 모자를 내던지며 만세를 불렀다.

경기지사는 옷을 찢지는 않았다. 대신, 더한 것이 찢겨나갔다. 인용문에 따르면 그는 "혼비백산"했다. 옷이 아닌 영혼이 찢겨나간 셈이다. 지축의 진동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항일 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실린 <매일신보> 속의 김대우. ⓒ 민족문제연구소

 
그날의 시위 현장에는 머지 않아 친일파로 변신할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 김대우(金大羽)도 있었다. 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1권 김대우 편은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들이 주최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시위를 벌였다"라고 말한다.

김무용 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이 집필한 김대우 편은 "(3·1운동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법에서 7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했다"고 설명한다. 징역형과 더불어 집행유예 3년도 선고됐다. 그 선고 때까지 옥살이를 하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것이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에 따르면, 1900년 7월 10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출생한 김대우는 강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 당시는 중학교)를 거쳐 경성공전에 들어갔다. 3·1운동 발생 당일에는 경성공전 학생대표 자격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날 시위의 '주모자' 중 하나였던 것이다.

김대우와 가까운 장소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20세 학생 정석해는 해방 뒤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됐다. 정석해는 1960년 4·19 혁명 때도 시위에 참가했다. 61세였던 이때, 정석해는 교수단 시위를 주도했다.

김대우는 정석해와 다른 길을 걸었다. 1921년 3월 26일 경성공전을 졸업한 그는 1925년에는 규슈제국대학 응용지질학과를 졸업했다. 25세가 되는 이 시점에 그는 총독부 관료로 변신했다. 이 당시 그의 직함인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서기'는 말단 직책이기는 하지만 항일 운동가 출신인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임야조사사업의 본질은 토지조사사업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 임야를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재편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 일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 시기의 그가 내면적으로 일제 지배를 수용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경성공전 졸업자가 말단직인 임야조사위 서기를 거절했다면, 총독부가 다른 자리를 만들어줘서라도 붙들어뒀을 가능성이 있다. 임야조사사업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을 사람이 그런 자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1919년 옥살이 기간에 그가 느꼈을 심경의 변화를 추론하게 만든다.

총독부는 말단 직책을 오래 맡기지 않았다. 28세 때인 1928년에 그는 평안북도 박천군수로 임명됐다. 1930년에는 평안북도 산업과장이 되고 1936년에는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 됐다. 지금으로 치면 교육부 국장급이 된 셈이다. 그 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부장급이 됐다가 1943년에 전라북도지사, 1945년에 경상북도지사가 됐다. 일제 치하의 한국인 관료가 갈 수 있는 데까지 승승장구한 셈이다.

'황국신민서사' 입안
 

<조선일보>는 1949년 2월 22일 자 기사 "김대우도 수감"에서 김대우를 "황국신민서사의 장본인"이라고 썼다. ⓒ 조선일보


일제 치하의 반체제 운동 때문에 투옥된 경력이 있는데도 도지사까지 됐다는 것은 그가 일본인들의 눈에 믿음직스럽고 성실하게 비쳐졌음을 알려준다. 그가 몸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열심히 친일했다는 점은 황국신민서사 제정과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일왕(천황)에 대한 언약문인 황국신민서사의 전문은 이렇다.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信愛)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하여 힘을 길러 황도(皇道)를 선양하련다.
 
이 서약문과 관련해 <친일파 99인>은 "1937년 10월경 그는 일제가 온 국민으로 하여금 외우고 부르도록 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는 계획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1991년에 나온 역사학자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김대우가 황국신민서사 문구를 직접 창작한 것은 아니지만 책임자가 되어 문구 작성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3월 1일 현장에 학생 대표로 있었던 사람이 일본을 위해 이런 일까지 했다.

일본이 그를 얼마나 믿었는가는 1945년 패망 당시에 그에게 맡긴 책무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인과 일본 재산을 한국 밖으로 안전하게 내보내야 했던 총독부는 여운형 같은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때 한국인 지도자들과 교섭하는 임무가 김대우에게 주어졌다. 김대우는 송진우를 끌어들이는 임무를 맡았다. 협상은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 패망 뒤에도 이렇게 했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그의 충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친일파 99인>은 8월 15일 정오에 일왕의 항복선언을 라디오로 청취할 당시 그가 보여준 모습을 "일왕의 항복 소식을 엄숙한 자세로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라는 문장으로 묘사한다. 패망 뒤에도 일본을 도운 점을 감안하면 하염없는 그 눈물은 진정성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친일 관료의 공금횡령

김대우는 25세 때부터 20년간 안정적으로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히로히토 즉위 기념장이나 각종 훈장은 그가 일제하에서 든든한 직장과 경제 기반을 갖도록 도와줬다. 그런 속에서 일본인들의 신뢰를 받으며 친일 관료 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관직은 1945년 8·15 이후로도 이어졌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경북지사였다. 그는 일본인 직원들이 비운 자리를 친일파로 메우며 경북도청을 '사수'했다. 10월 18일부터는 새롭게 도지사가 된 미군 대령 하에서 도지사 고문이 되고 얼마 뒤 관직을 떠났다.

1946년 1월, 그는 공금횡령 문제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다. 해방 직후에 도지사 지위를 이용해 공금에 손을 댄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조사 결과 그는 공금 20만 원을 국제회관 주인 주경진에게 준 것을 비롯하여 약 50만 원이라는 거액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친일파 99인>은 말한다.

해방 직전에 서울의 중급 가옥은 980원 정도였다. 웬만한 집 1채가 1000원이 약간 안 됐다. 김대우가 횡령한 50만 원의 가치를 이로부터 가늠할 수 있다. 일제가 주는 봉급으로 친일 재산을 축적했던 그가 일제가 나간 직후에는 공금 횡령으로 재산 축적을 시도했다.

공금 횡령에 대처하는 방법도 깔끔하지 못했다. 검찰 소환에 불응했을 뿐 아니라, 마포경찰서장인 동생 김호우를 대신 출석시키기까지 했다. 경찰이 검찰보다 막강한 시절이었다. 경찰의 파워를 앞세워 검찰 수사를 위축시키려 했던 듯하다.

검찰 출석을 피한 김대우는 그 뒤 모습을 감췄다. 잠적 생활을 하던 그가 붙들린 것은 3년 뒤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9월 4일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의해 공민권 3년 정지를 구형받았으나, 같은 달 16일에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의 결심공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고 기술한다.

정석해는 4·19 혁명 중에 거리로 뛰어나왔지만, 김대우는 4·19 혁명 직후에 모습을 공개했다. 자유당 정권 몰락 직후의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경남 양산에서 출마해 4위로 낙선했다. 낙선하기는 했지만, 출마 자체가 그의 위세와 경제력을 반영한다.

일제 치하에서 축적한 재산과 해방 직후의 공금 횡령 등에 기반한 경제력이 그를 지치지 않게 만든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탑골공원 만세 시위의 주역이면서도 친일파로 돌아선 그는 여타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방 뒤에도 별 탈 없이 삶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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