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8 20:06최종 업데이트 22.09.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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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자료사진. ⓒ 픽사베이


가을, 결혼식 하기 참 좋은 날씨다. 30대라는 나이의 영향인지, 코로나19로 인한 인원 제한이 풀린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올해 유독 결혼식이 풍년이다.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소중한 잔치에 초대받는 일은 늘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결혼식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식장에서 함께 할 수 있는 30분 남짓한 시간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혼식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식 준비를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수많은 갈등을 뒤로한 채 겨우 진행되는 행사 속에서 하객 역시 불편한 웃음을 짓다 뷔페 식사에 겨우 만족하며 돌아온다. 신랑 신부는? 드디어 식이 끝났다며 안도할 뿐이다. 

사실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라면 좀 낫다. 사회적 관계로 인해 마지못해 가야만 하는 결혼식이라면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여러 가지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갈까? 말까? 축의금은 얼마로 해야 할까? 결혼식은 언제부터 크고, 요란하고, 불편하고, 정신없기만 한 난리통이 된 걸까. 우리의 결혼식 문화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결혼의 시작은 신부 약탈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다. 너무 멀리 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짚어보자. 인류 최초의 결혼은 신부 약탈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초기 인류는 식량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여자아이를 살해했다. 나름의 인구 조절 기능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부족했고, 재생산을 위해서 여성을 약탈했다. 신부가 머리에 쓰는 면사포는 어망을 사용하여 신부를 약탈하던 북유럽 게르만족의 변형된 유물이다.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농경사회가 되자 약탈혼은 매매혼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반지는 일종의 착수금 역할을 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약혼반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아들과 영국 왕 헨리 8세의 딸 메리의 약혼식이다. 서기 860년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약혼에는 약혼반지가 필요하다'는 명령을 내리면서 반지에 대한 원칙도 정했다. 여성이 결혼을 파기한 경우 반지를 돌려줘야 했다.

약혼반지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 중세의 결혼은 철저한 비즈니스였다. 결혼은 전쟁을 막고, 영토를 확장하고, 위험을 제거하고, 권력을 나누거나 집중하는 데 제격이었다. 결혼식은 여자가 아버지의 '소유'였다가 남편의 '소유'라는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을 알리는 일이었다. 일종의 동맹선언이었던 것이다. 많은 아버지들이 결혼식의 '로망'이라고 꼽는 순간, 식장에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의식의 기원이다. 내 딸을 줄 테니, 내 땅을 침략하지 말라는 의식.

권력과 재력을 통합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호화스러운 결혼식을 했다. 그것은 웨딩드레스의 색으로 드러났다. 웨딩드레스는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상이 호화롭게 이용됐다.

결혼식을 생각할 때 으레 떠올리는 하얀 웨딩드레스의 역사는 200년이 되지 않는다. 1840년, 자신의 드레스가 전 세계에 알려질 것을 안 빅토리아 여왕이 왕실 전통 예복을 포기하고 당시 판매가 저조했던 레이스를 선택해 결혼식을 치른 것이 계기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빅토리아 여왕이 전 세계의 뉴스와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고 이것이 현재 웨딩드레스의 형태가 됐다.


신부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순간이라고 포장되어, 단 하루를 위해 수백만 원의 대여료로 입을 수밖에 없는 웨딩드레스의 역사다. 결혼식이란 뭘까. 이쯤 되면 핼러윈 파티에서 좀비 흉내 내며 즐거워하듯, 단 하루 동안 영국 귀족 흉내를 내며 즐거워하는 일과 다름없어 보인다. 당당히 귀족 놀이를 할 수 있는 평생의 단 한 번 있는 유일한 순간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 결혼식, 법률로 제정되어 있었습니다

'전통혼례'라는 말을 따로 쓰고 있고, 모두가 그 혼례 복식을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역시 웨딩드레스로 결혼식을 치른 역사는 길지 않다. 일제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말살하기 위해 1934년 '의례준칙'을 발표해 관혼상제를 규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을 발표하며 기존의 의례 절차를 간소화했다. 답례품을 규제하고, 폐백을 없애고, 화환도 금지했다. 이 법으로 인해 친척들이 신부의 집에 모여 혼례를 올리고 잔치를 벌였던 풍경이 막을 내렸고 결혼식장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친족 집단이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의례의 장소가 됐다.

한국의 축의금 문화는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던 시절 품앗이처럼 음식을 상호부조 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큰일을 치를 때 일손이나 현물로서 돕는 개념이었다. 더 이상 마을 잔치가 아니라 혼례만을 위한 공간에서 잠깐씩 치러지는 행사에서 상호부조의 방식이 화폐로 바뀌는 일은 당연했을 것이다. 품앗이가 반드시 필요한 농경사회에서 일종의 사회적 저축이기도 했던 축의금 문화가 지금에 와서 '고지서' 취급을 받는 것도 당연한 변화의 모습일 테다.

국가가 개인사를 규제하는 이 희한한 법은 1999년 전면 개정되며 관련 규제들이 대폭 풀리게 된다. 하객 초청 범위 제한이 없어지고, 화환 규제도 풀리고, 결혼식장도 신고업종에서 자유업종으로 바뀌었다. 1993년 호텔 예식까지 허용되면서 결혼식 문화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상위계층을 위한 호텔 예식은 예비 신랑 신부에게 동경의 대상이 됐고, 웨딩산업은 지금처럼 거대 산업으로 변했다. '평생의 한 번'이라는 상술은 위대했다.

참고로 이 상술은 하객에게도 통했다. 결혼식 참석이 호텔 출입의 기회가 되면서 결혼식에서 옷차림이 남루해 보이면 안 된다는 걱정이 '하객룩' 문화를 만든 셈이다. 남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산다. '하객룩'이라는 검색어로. 계절마다!

결혼식 이상한 거 다 알아요, 그래도?
 

결혼식. 자료사진. ⓒ 픽사베이

 
결혼식의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도, 가족들도 지금의 결혼식 문화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1시간 남짓 이용할 장소를 대여하기 위한 수백만 원의 돈, 예쁜 드레스를 입어보는 데만 들어가는 비용, 대여하는 데 들어가는 여러 가지 비용을 지출해야만 하는 이유를 묻기 시작했을 때 나오는 대답은 '남들도 다 하는데 그래도 해야지', '남들 보기 부끄럽다'라는 말이다.

여태껏 부모와의 갈등 없이 말끔하게 결혼식을 준비하는 커플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도대체 결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들 보기 좋으려고?

소설가 장강명은 "정체성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허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는 대학 간판이나 자식 결혼식장에 모인 하객 수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다들 거기에 집착한다"고 말했다.

그저 불쌍할 뿐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기준을 타인에게 두는 삶이 행복하기란 어렵다. 노예의 삶이다. 인생이 하객의 숫자만큼 행복할까? 아니, 행복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행복하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신랑 신부가 이 글을 읽는다면 해 주고 싶은 말은 하나다. 마음껏 행복하시라고. 그리고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 투쟁을 멈추지 말라고. 잠깐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 나의 욕망을 접어두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다. 내가 마음껏 행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길들이 이 사회를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결혼식, 하지 마라. 안 해도 문제없다. 결혼식을 잘 치러내는 것보다 둘이서 잘 살아나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다들 하는 거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다른 사람들한테 투정 부리지 말고. 제발.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 이윤정. (2003). <웨딩드레스 색상의 변천과정 연구> 복식문화연구.
- 남정욱. (2014). <결혼> 살림출판사.
- 장강명. (2015). <5년 만에 신혼여행>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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