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5 05:01최종 업데이트 22.10.2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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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와 양상추를 경쟁시킨 <데일리 스타> ⓒ 데일리 스타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사임한 지난 20일, 영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언론은 총리만큼 양상추에 관심을 보였다. 영국의 <가디언>은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연상시키는 "리즈 트러스, 양상추, 그리고 독서대"라는 제목으로 총리의 재임 44일을 훑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양상추가 리즈 트러스보다 오래 살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양상추가 개인의 재정 상태를 위해 기도한다," <폴리티코>는 "양상추에 패하다: 리즈 트러스의 영광의 44일," <워싱턴포스트>는  "리즈 트러스의 영국 총리 임기가 양상추보다 짧았다"고 제목을 달았다.


왜 하필 양상추일까? 리즈 트러스 총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정치적 이상형으로 삼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여기에 착안해 대처 전 총리의 별명 '철의 여인'(Iron Lady)과 비슷하게 트러스 총리를 '빙산의 여인'(Iceberg Lady)으로 불렀다. 그리고 빙산을 의미하는 아이스버그(Iceberg)는 양상추의 일종인 아이스버그 양상추(Iceberg lettuce)로 옮겨갔다. 트러스 총리가 '빙산의 여인'에서 '양상추의 여인'으로 격하된 셈이다.

리즈 트러스 총리- 쿼지 콰텡 재무장관의 '작은 예산안'으로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곤두박질한 주에 <이코노미스트>는 트러스 총리의 총리직을 "양상추의 진열대 인생"에 비유했다. 엘리자베스 2세 국장 기간을 빼면 총리직 수행은 고작 7일, 양상추가 진열대에 있는 짧은 기간에 영국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갔다는 비판이었다. 그리고 영국 정치 역사상 가장 수명이 짧은 총리가 될 것이라 독설을 퍼부었다.

트러스 총리를 양상추에 빗댄 주류 언론 풍자에 영감을 받은 <데일리 스타>는 14일 트러스 총리와 양상추를 실제 경쟁에 부쳤다. 양상추가 신선도를 먼저 잃을 것이냐, 총리가 총리직을 먼저 잃을 것이냐다.

슈퍼마켓에서 산 60펜스(약 1000원)짜리 양상추에 눈과 입을 만들어 주고 금발 가발까지 씌웠다. 트러스 총리 사진을 옆에 놓고 둘 사이에는 영국 국기를 놓았다. 힘들 때 먹으라고 어느 날은 바나나와 음료수를 놓았고 또 다른 날은 소시지빵을 앞에 놓고 양쪽을 공정하게 응원했다. 이 모든 과정이 실시간 방송되었다.

트러스 총리 사임으로 경쟁에 이긴 후 양상추는 승리감에 도취해 기쁨의 연설도 했다. 심지어 밤에는 대형 양상추 얼굴이 영국 의회 건물 위에 비치기도 했다. 19세기 정치적 자유가 언론의 팽창과 맞물리며 발달한 정치 풍자 문화의 정수였다.

트러스 대 양상추의 풍자는 영국 민주주의의 선진성과 위기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지난 7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사임 때 출시된 "보리스의 거짓말"(Boris Lie-PA) 맥주보다 훨씬 독하고 심지어 언론사가 주도한 것이지만 문제 될 기미도 없다.

양상추의 승리는 민주주의에서 국가 지도자가 스스로 내세운 공약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권위가 야채의 신선도 유지 기간보다도 짧다는 것을 증명했다. 반면, 사회적 분노가 담긴 양상추 풍자는 보다 근본적이고 경고성 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소위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을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가이다.

무너진 총리의 권위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일(현지시간) 런던에 있는 총리관저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달 6일 취임한 트러스 총리는 역대 가장 짧은 기간인 44일 재임한 총리라는 불명예 기록을 남기게 됐다. ⓒ 연합뉴스


우연이겠지만 양상추와의 경쟁이 시작된 그날, 트러스 총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실수를 인정하고 경제 기조를 성장에서 안정으로 전환한 것이다.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경질하고 자신과 정반대의 경제관을 가지고 있는 제러미 헌트를 후임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헌트 장관은 예산안이 "너무 나갔고 너무 빨랐다"며 긴축 재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로써 트러스 총리의 예산안은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공약이 파기된 이후 제기된 질문은 누가 내각의 1인자인가였다. '유령 총리'라는 표현이 나왔고 재무장관에게는 "누가 내각을 책임지고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도 던져졌다. 무너진 총리의 권위는 당 내부 지지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지난 18일 이미 100여 명의 보수당 의원들이 불신임 의견을 표했다.

양상추와의 대결 6일째 되는 지난 19일 승패가 갈렸다. 매주 수요일 영국 하원에서 이어지는 질의 시간에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가 총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최상위층에 부과하는) 소득세 45% 구간 폐지는 사라졌다. 법인세 인하 결정도 없어졌다. (최저) 소득세 20% 구간 인하도 취소되었다. 총리와 가장 가까웠던 재무장관도 갔다. 당신은 왜 아직도 있는가?"

트러스 총리는 "나는 투사지 도망자가 아니다"라며 국정 운영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지만 위기는 그날 저녁 다시 왔다. 이번에는 셰일가스 재개안이었다. 보수당은 2019년 총선에서 안전성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근거가 나올 때까지 셰일가스 시추를 중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트러스 내각은 경제 성장과 에너지 안보를 내세워 이를 뒤집었고 노동당은 보수당을 비판하며 셰일가스 시추 재개를 막는 안을 상정했다. 노동당 안 반대를 당론으로 결정한 총리는 따르지 않을 경우 보수당 의원 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노동당 안을 부결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내상이 컸다. 보수당 내 친기후론자들은 출당을 각오하고 반대를 표했다. 일단 당론을 따랐지만 과도하게 밀어붙인 경제 성장론이 당의 환경 및 기후 관련 총선 공약마저 뒤집는 상황에 의원들이 반발했다.

양상추와의 대결 7일째인 20일, 트러스 총리는 사퇴 의사를 밝혔다. "경제 성장에 대한 약속으로 보수당 대표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현 상황을 감안했을 때 내가 약속했던 것을 실현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이 제안한 미래상이 폐기된 지도자가 민주주의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

"침착하라 그리고 계속 나아가라"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영국 성인을 대상으로 "일단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면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여론조사에 찬성 63%, 반대 23%, 모르겠다 15%의 결과가 나왔다. ⓒ 유고브

 
양상추가 승리를 거둔 후 <데일리 스타>의 앤드루 길핀 부편집장은 22일 미국 공영 라디오 NPR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유명세를 탄 양상추 풍자에 대해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의 좋은 점 중의 하나가 우리(영국) 문제를 놓고 웃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양상추 풍자로 웃고 있지만 그 본질이 분노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영국 사회의 분노는 현재 조기 총선 요구로 나타나고 있다. 22일 여론조사업체 유고브(YouGov) 조사에 따르면, 조기 총선에 대해 찬성 63%, 반대 23%, 모르겠다 15%다. 야당인 노동당, 스코틀랜드민족당, 자유민주당도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2019년 보수당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지지했지만 '거짓말'이라는 도덕성으로 물러났다. 이후 보수당이 뽑은 대표가 총리가 되었으나 그 총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시장 만능주의자로 시장이 가장 빨리 손절했다. 게다가 총리의 공약은 보수당원의 지지를 받았을 뿐 영국 전체 사회의 의견을 물은 적이 없다. 이 상황에서 다시 보수당원들끼리 뽑은 총리로 국가를 대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조기 총선 결정권을 쥐고 있는 보수당이 조기 총선을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지난 20~21일 유고브가 발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노동당 지지율은 56%로 19%의 보수당을 무려 37% 포인트 앞서고 있다. 참패가 예상되는 보수당으로서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2024년 말까지 버티며 상황을 회복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보수당이 버틸 경우 영국은 보다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대의제에 대한 회의가 정치 세력화된 경우가 1930년대 독일 나치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가 당시 서구 민주주의에 두 가지 경종을 울렸다고 지적했다.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이 사회를 충분히 대표하고 있다는 자기 착각이 첫 번째다. 그런 면에서 트러스 총리의 사과와 사퇴는 영국이 첫 번째 착각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긍정적 신호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정치 엘리트가 대중을 충분히 대표하지 못해도 대중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환상이다. 바로 보수당이 2024년 말까지 조기 총선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믿음이다.

조기 총선 논의는 수일내로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10월 24일 보수당은 트러스 총리 사임 나흘만에 전격적으로 리시 수낵을 새로운 당 대표로 뽑았다. 이번에는 당원 선거도 없이 하원 의원들이 결정한 당대표 겸 총리다. 리시 수낵은 조기 총선을 받을 용기가 있을까. 받지 않을 경우 영국인들은 정치 풍자 강도를 더 높이며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시킬까. 아니면 이미 거리로 나와 있는 경제 및 기후 정의 운동 세력과 결합해 목소리를 키울 것인가. 

양상추 풍자는 여러 가능성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대결 마지막 날 양상추 옆에는 머그컵이 놓였다. 거기에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2차세계대전 영국 사회를 독려한 유명한 문구 "침착하라 그리고 계속 나아가라"(Keep calm and carry on)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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