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3 22:00최종 업데이트 22.11.0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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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치유재단은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일본정부 출연금 10억 엔으로 2016년 7월에 출범했다. ⓒ 이희훈


지난 2일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위안부재단 자금을 강제징용(강제동원) 문제에 활용하는 방안이 한국 정부 내에 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아베 신조 내각이 화해치유재단에 출연한 10억 엔(약 100억 원)의 잔금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기금에 편입시켜 피해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안이 윤석열 정부 내에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 언론에서 '한국 정부 내 유력 방안'이 연이어 보도되는 것은 윤석열 정부가 여론 동향을 봐가며 새로운 방안을 계속 모색하거나 언론에 흘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윤 정부 내에서 유력하게 거론됐던 방안 중 하나는 '1965년 청구권 자금의 수혜 기업들이 지급한 돈을 피해자들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전달한다'라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이 국교 정상화 대가로 제공했거나 빌려준 유·무상 경제협력자금인 청구권 자금이 마치 식민지배 배상금이었던 듯한 인상을 풍긴다.

청구권 자금의 최대 수혜자인 포스코(포항제철) 등이 출연한 자금을 배상금 명목으로 전달하는 것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식민지배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일본 측의 논리에 동조하는 꼴이 된다. 동시에, 미쓰비시나 일본제철이 전범기업이 아니라 포스코가 전범기업이라는 엉뚱한 논리까지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이 아이디어는 대기업이나 재벌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이용해 문제를 봉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일본 정부 자금으로 조성된 화해치유재단 자금을 강제징용 쪽으로 돌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아사히신문> 보도가 정확하다면, 이는 한국 기업 자금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방안에 대한 한국 내 부정적 여론을 감안한 아이디어로 보인다. 한국 자금뿐 아니라 일본 자금도 문제 해결에 투입된다는 모양새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화해치유재단 자금이 징용 피해자들에게 지급되고 윤석열 정부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문제 해결'을 선언하게 되면, 이로 인해 생길 문제점이 한 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은 원고 승소 판결이 난 뒤에도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피해자들이 제기한 현금화 소송의 향후 전망을 어둡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화해치유재단 기금이 징용 배상금으로 지급되는 모양새가 되면, 대법원 입장에서는 배상금 지급을 목적으로 하는 현금화 소송을 계속 진행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된다. 이로 인해 현금화 소송이 중단되기라도 하면, 전범기업의 사과·배상이 실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더 이상 법적 투쟁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윤 정부는 현금화 소송에 의해 일본 기업 자산이 피해자에게 넘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더라도 일본 기업이 어떻게든 성의를 표해줬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해왔다. 일본 기업을 참여시키지 않고서는 피해자와 국민을 설득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측은 성의를 표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도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1965년에 다 끝났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일본 기업과 기시다 내각의 태도는 '우리에게 부담 주지 말고 윤석열 정부가 알아서 해달라' 것처럼 보인다.

국민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기만책

이렇게 윤 정부가 일본 기업들의 성의 표시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사히신문> 보도가 나왔다. 어떻게든 일본 자금이 징용 피해자들에게 지급된다는 모양새를 만드는 데 고심하다 보면 이런 방안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강제징용 문제 해결의 첩경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이다. 일본 돈이 들어간 화해치유재단 자금이 배상금인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 피해자들을 달래려는 것은 정부가 국민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기만책이다.

그런데 <아사히신문>에 보도된 방안과 관련해 윤 정부가 일본 측의 협조를 어느 정도나 받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방안이 실현되려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일본 정부의 양해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내각이 10억 엔을 출연한 것은 한국 정부와 한국 재단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 혹은 지원금을 지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돈을 위안부가 아닌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그것도 위로금·지원금이 아닌 배상금 명목으로 지급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일본 정부의 이해를 받아낼 필요가 있다.

지난 2일 '야후 재팬'에 <닛폰방송>의 라디오 인터뷰 전문을 담은 '일본은 한국에 다가가지 않고도, 내쳐지지 않으면서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까?'라는 기사가 실렸다.

전 <마이니치신문> 기자인 저널리스트 사사키 도시나오는 이 방송에 출연해 위의 <아사히신문> 보도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일본 측에서 보자면 위안부 문제 때문에 지불한 10억 엔을 왜 그런 명목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라며 "좀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개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느낌을 품는 사람들이 일본 정부와 자민당에 적지 않을 것이다.

설령 기시다 내각의 동의를 받는다 해도 윤 정부가 할 일이 더 있다. 그 자금이 배상금이라는 모양새를 만들어내려면, 전범기업들의 의사표시를 받아낼 필요가 있다. 화해치유재단 자금을 통한 지원이 가해 기업들과 관계가 있다는 모양새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배상책임을 진 가해자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자금을 배상금처럼 지급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돈이 탐나서가 아니라, 외국까지 끌고 가서 노예로 혹사시킨 전범기업들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소송을 계속하고 있다. 가해자들의 사과를 받아내기 힘들다면, 법원 강제집행을 통한 현금화를 활용해서라도 가해자들이 결국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따라서 미쓰비시나 일본제철이 배상금 명목으로 금전으로 지급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윤 정부가 화해치유재단 자금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할 경우에는 어떻게든 일본 기업들의 의사표시를 받아낼 필요가 있다. 그 자금이 배상금으로 사용되는 일을 전범기업들이 받아들였다는 모양새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범기업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방안이 자신들의 종전 주장과 충돌하는 면이 있다. 윤 정부가 이 돈을 지원금이나 위로금으로 사용하는 것은 몰라도, 전범기업들의 배상금처럼 활용하게 되면 '1965년에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일본 측의 주장이 무색해지게 된다.

고민하는 윤석열 정부의 모습
 

윤석열 대통령이 2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아소 다로 일본 자민당 부총재와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닛폰방송> 보도의 제목처럼, 일본은 자신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에 다가서는 수고를 하지 않고, 또 일본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비판을 받지 않고 문제가 종식되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들이 배상금 지급에 동의하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시킬 수도 있는 방안은 '수고를 하지 않고도 문제를 끝내는 방법'이 아니다. 배상금 지급에 동의하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되면 일본 자신이 그동안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미쓰비시와 일본제철이 돈이 없어서 배상을 꺼리는 것은 아니다. 대만·중국과 미국 피해자들에게는 사과하거나 보상했으면서도 한국 피해자들에게만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유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일본의 대표적 기업들이 한국에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경제 방면에서 유지돼온 종속적 한일 경제관계를 종전처럼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을 하부에 두는 양국 경제관계를 계속 이어가자면 심리적 제압이 필요하므로, 절대로 고개를 숙이거나 잘못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

1991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됐듯, 1946년 2월에 일본 내무성은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임금 청구 요구를 사전에 단속하라는 지시를 각급 경찰에 내렸다. 이때 일본제철은 '징용 피해자들이 임금을 청구하면 경찰에 연락하고 절대 굴복하지 말라'는 지시를 각 제철소에 지시했다. 패망 직후인 1946년에 일본이 그같은 방침을 정한 데는 미국에 패망한 상황에서 한국에마저 굴복할 수 없다는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심리는 지금의 일본에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금은 경제 분야에 이어 군사 분야에서까지 한일관계가 밀착되고 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경제 분야에서 확보한 우위를 한국군과 자위대의 군사협력 분야로도 확대시켜야 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에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는 정서가 일본 내에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화해치유재단 자금이 전범기업 배상금처럼 활용되는 것은 전범기업뿐 아니라 일본 정부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만약 윤석열 정부가 일본 정부나 기업의 동의도 받지 않고 화해치유재단 자금을 그런 용도로 활용하면, 피해자와 국민들은 그 돈이 전범기업과 관계 있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게 될 수도 있다. 윤 정부가 일본 측의 동의를 받건 안 받건 문제점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기만적 방식으로 문제를 덮는 방안이 한국 정부에 의해 시도돼서는 안 된다. 

이처럼 이번에 새로 보도된 방안은 지금까지 나온 것들에 비해 옳은 방안도 아니고 성사 가능성이 높은 방안도 아니다. 좀 더 나은 방안이 새롭게 나오지 않고 이런 방안이 뒤늦게 나오는 것은 윤 정부 내의 아이디어 고갈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도 있다.

윤 정부가 전범기업 자산 현금화를 막고자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 모습을 반영하는 국내외 보도들은 우리 한국 국민들을 슬프게 만든다. 고령의 피해자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전범기업을 사과·배상시킬까를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전범기업들에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게 할까를 이리저리 고민하는 윤석열 정부의 모습은 우리를 허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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