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1 17:59최종 업데이트 22.11.1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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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어의 성인 성 아르눌프. 밑에 맥주가 보이는가? ⓒ 위키피디아

 
"물은 위험하다. 맥주는 안전하다. 인간의 땀과 신의 사랑, 맥주가 세상에 왔도다."

6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자 한 수도사가 물 대신 맥주를 마시라고 호소했다. 그의 말을 따른 사람들은 흑사병의 위협에서 벗어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맥주로 사람들을 구한 남자의 이름은 아르눌프(Arnoul de Metz), 브루어의 성인이다. 


성경에 맥주라는 단어가 없지만 수도원과 맥주는 1500년 넘는 동안 함께 해오고 있다. 최초의 수도원 맥주는 캔터베리 수도원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서로마 멸망 후, 교황 그레고리 1세는 591년 지금의 영국 땅인 브리타니아로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한다. 그는 켄트에 도착해 수도원을 세우고 왕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했다. 포도 재배가 원활하지 않았던 잉글랜드에서 수도사들은 맥주를 만들어 성찬을 했고 이때 사용한 맥주가 최초의 수도원 맥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보다 전에 수도원 맥주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앞서 435년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했다. 6세기 중반 성 콜롬바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수도원을 세우고 성 패트릭의 복음을 실천했다. 그의 전기를 쓴 조나스는 성 콜롬바가 브리타니아에 있는 게르만 혈통에게 물을 맥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했다고 기록했다. 

어디가 수도원 맥주의 시작일까? 캔터베리가 수도원 맥주의 시작이 된 것은 수도사 위주의 아일랜드 가톨릭과 교황 중심의 로마 가톨릭이 브리타니아에서 세력 싸움을 한 결과로 보인다. 이 둘의 경쟁에서 승리한 교황청 산하에 있는 캔터베리가 최초의 수도원 맥주 타이틀을 가져간 것은 아닐까? 성 콜롬바와 성녀 브리지트의 맥주에 대한 일화와 아일랜드 수도원의 역사를 봤을 때, 최초의 수도원 맥주 타이틀은 아일랜드가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맥주, 수도원의 주인이 되다
 

도나우강에 있는 벨텐부르크 수도원 ⓒ 위키피디아


서로마 이후 중세 초기는 혼란과 공포 그 자체였다. 로마의 문화를 이어가고 싶었던 게르만족은 능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6세기에 닥친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를 반으로 줄이며 대제국을 잘게 쪼갰다. 이 암흑의 시대에 빛을 보여준 것은 기독교였다. 내세를 약속하는 예수는 지옥 같은 현세를 극복하는 희망이었다. 

중세 문화를 꽃피운 사람은 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수많은 수도원을 세우며 점령지 백성들을 기독교도로 만들었고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 수호자로 칭하며 중세 수도원 문화의 기틀을 닦았다.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받은 800년 이후에는 무려 10만 권에 달하는 성경 필사본을 배출했고 과거 로마 제국의 문화를 잇기 위한 대대적인 사업을 펼쳤다. 

수도원 맥주의 발전은 샤를마뉴의 치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수도원을 들를 때마다 맥주를 평가하며 양질의 맥주를 만들라고 장려했다. 이런 정책하에 책을 읽고 글 쓰는 능력이 있던 수도사들은 양조 방법을 전수하며 수도원 맥주의 품질을 향상시켰다. 규칙적인 생활에서 나오는 일정한 노동력을 맥주 양조에 투입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양조된 맥주는 모든 순례객에 제공되는 생명수였다. 또한 수도원의 생존을 위한 재원이 되기도 했다. 

617년 아름다운 도나우강이 흐르는 바이에른 레겐스부르크에 성 콜롬바를 따르는 수도사들이 정착한다. 벨텐부르크 두물머리라 불리는 이곳은 로마 시대 교통의 요충지였고 군대의 집결지였다. 이들이 지은 바이에른 최초의 수도원 이름은 벨텐부르크였다. 8세기 벨텐부르크 수도원은 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932년 레겐스부르크 주교 산하가 되며 바이에른의 중심 교구가 된다. 

이곳에 맥주 양조장이 들어선 시기는 1050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벨텐부르크 수도원이 홉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으면서 양조장이 시작됐다고 한다. 아마 바이에른은 포도가 잘 자라는 지역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사에는 와인이 주로 사용됐을 것이다.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다른 수도원들 경우와 같이 순례객이 늘어나고 수도원 운영을 위한 재원을 채우기 위해 맥주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8세기 스위스 지역에 있던 장크트갈렌 수도원에는 대규모 양조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곳은 유럽 최초로 맥주를 전문적으로 생산한 수도원으로 세 곳의 양조장에서 100명의 수도사들이 맥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이 만드는 맥주는 셀리아, 세레비시아, 콘벤투스로 불렸는데, 각각 영주, 수도사 그리고 일반 순례객들을 위한 맥주였다. 레겐스부르크 주교가 되면서 크게 성장한 벨텐부르크도 비슷한 목적으로 맥주 양조장을 짓고 운영했을 것이다. 

역사의 풍파에서 살아남은 수도원 양조장
 

벨텐부르거 비어가든 ⓒ 위키피디아


벨텐부르크 수도원은 레겐스부르크 주교로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혁명과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수도원도 몰락시켰다. 전쟁에서 이긴 프랑스는 배상으로 라인강 좌측 땅을 차지했고 기존 통치자들의 보상으로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한 후 재분배했다.

1798년부터 시작된 이 조정은 1802년을 거쳐 나폴레옹이 패퇴한 1815년까지 진행됐고 그 결과 수백 개의 수도원과 종교재단이 문을 닫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헨슈테판, 파울라너, 아우구스티너 같은 유명한 수도원 양조장 또한 이 시기에 사라졌다. 벨텐부르크 수도원도 이 풍파를 피해 갈 수 없었다. 결국 1803년 3월 18일 공식적으로 수도원은 폐쇄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원대한 독일을 꿈꾸는 사람이 있었다. 1806년 바이에른은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자 왕국으로 승격된다. 왕국의 두 번째 왕 루트비히 1세는 나폴레옹에 짓밟힌 독일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위대한 독일인 50명의 흉상을 세울 발할라를 레겐스부르크에 건설한다.

이런 그에게 최초의 바이에른 수도원을 재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42년 루트비히 1세는 버려진 벨텐부르크 수도원을 재정비하고 맥주 양조장도 부활시켰다. 이후 이곳은 1858년 가톨릭 베네딕트 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1913년부터는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수도원 안쪽에 있는 양조장에서는 독일 정통 스타일의 맥주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수도사들은 더 이상 양조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20세기 들어 대부분 수도원은 수도사들의 고령화와 지원자 하락이라는 문제를 겪었다. 벨텐부르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1973년 추가적인 투자가 필요하자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비쇼프쵸프(Bishofchof)에 양조 권한을 이양했다. 

비쇼프쵸프는 현재 벨텐부르거(Weltenburger)라는 이름으로 수도원 맥주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수도원 맥주답게 과도한 이익을 보지 않고 소량 생산을 하며 품질에 가치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벨텐부르거는 셰예른(Scheyern), 안덱스(Andechs)와 함께 독일 3대 수도원 맥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물론 다른 양조장에는 없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양조장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가장 벨텐부르크다운 맥주 아삼복
 

새로워진 라벨의 아삼복 ⓒ 윤한샘


벨텐부르거를 대표하는 맥주는 아삼복(Asam bock)이다. 아삼 형제는 1716년부터 1739년까지 성 게오르그가 있는 메인 교회당을 완성한 건축가다. 바로크 후기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벨텐부르크의 상징이자 핵심이다. 벨텐부르거는 아삼 형제를 위한 헌정 맥주로 도펠복 스타일을 선정했다. 

도펠복(doppelbock)은 7~9% 알코올을 갖는 어두운색 라거다. 1634년 파울라너에서 시작됐으며 사순절 기간 수도사들이 마시는 맥주라는 기원을 갖고 있다. 건자두와 초콜릿 향과 툭 치고 나오는 쓴맛 그리고 묵직한 바디감은 도펠복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다.

벨텐부르거 아삼복은 마치 바로크 시대 작품 같다. 붉은 기가 살짝 도는 마호가니 색은 고혹스럽다. 풍성한 아이보리 색 거품 사이로 스미는 향은 진득한 건자두와 흑설탕이다. 7.3% 알코올을 받치고 있는 뭉근한 바디감과 쓴맛은 혀 위에서 맥주를 잠시 두고 음미하게 한다. 섬세하지만 또렷한 알코올과 복합적인 향미는 헨델의 음악을 마시는 듯하다.

640년 아르눌프가 레미레몽에서 사망하자 제자들은 그가 성직을 받았던 메츠로 시신을 옮기기로 한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던 642년 7월, 운구를 하던 도중 가지고 있던 물과 맥주가 바닥났고 사람들은 점점 지쳐 쓰러져갔다.

그때 일행의 대표였던 노토 공작이 아르눌프에게 갈증을 달랠 수 있는 맥주를 달라고 기도했다. 곧 통에는 맥주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무사히 메츠에 도착했다. 성자 아르눌프의 축성일인 7월 18일이 전 세계 브루어의 날로 지정된 것은 이처럼 맥주가 세상을 이롭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수도원 맥주가 다른 맥주와 달리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제 벨텐부르거 아삼복 뒤에 있는 밝은 아우라가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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