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뜻 식상해 보이는 이 물음엔 여러 가지 말들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사제 헨리 나우엔은 이 질문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답했고, 미국의 배우 토마스 제인은 '관계'라고 답했다. 질문에 대한 해답이 무엇이 되었든, 4차 산업 혁명으로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질문이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만의 전유물이라고 믿어왔던 능력들을 점차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인간을 대신해 운전을 하고, 요리를 하며, 심지어는 고도의 창의성이 요구되는 작곡이나 회화까지도 도맡아 하는 기계들이 하루가 다르게 등장한다. 언뜻 편리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짐에 따라 우리는 인간의 존재에 회의를 느끼며 상술했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애프터 양〉 스틸컷 양의 가족의 모습.

▲ 〈애프터 양〉 스틸컷 양의 가족의 모습. ⓒ A24


인간의 형상을 한 로봇인 안드로이드들이 보편화된 미래, 한 3인 가족이 중국에서 입양한 딸에게 중국의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안드로이드를 구매한다.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 분)은 자신의 동생 격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 분)를 위해 오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돌연 작동을 멈춘다.

하루아침에 식구가 없어진 미카네 가족은 혼란에 빠진다. 수리 업체에선 다시 작동하기는 어려울 거란다. 양을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아빠 제이크(콜린 패럴 분)는 한 박물관의 학자 클레오(사리타 슈드후리 분)에게서 양의 기억 장치를 기증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하루에 몇 초 정도의 순간을 촬영해 저장하도록 되어 있는 안드로이드가 촬영할 순간을 정하는 기준을 연구해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제이크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뒤 집에 돌아와 양의 기억 장치를 열어본다.

눈앞에 수많은 영상들의 다발이 나타난다. 기억의 편린들이다. 은하수와 같은 양의 기억 다발들을 둘러보던 제이크가 처음으로 재생한 기억은, 한 여성(헤이리 루 리차드슨 분)의 모습이 녹화된 짧은 영상이었다. 다음 기억도, 그 다음 기억도 그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서로 다른 날 서로 다른 시간에 녹화된 같은 여성의 영상이다. 그렇다고 양의 기억이 모두 그 여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마당에 비치는 햇빛, 차 위에 떠 있는 찻잎, 비 내리는 오후 등의 일상 속 사소한 기억 또한 기억 장치에 담겨 있었다.

이 기억들은 양의 정체성을 정의한다. 철학자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백지 상태, 즉 타불라 라사(tabula rasa, 깨끗한 석판)에서 태어나 경험을 통해 지식과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경험론을 주장했다. 이때 경험은 기억의 형태로 저장된다. 어떤 경험에 대한 기억이 부재하다면 그 경험은 개체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지 못한다. 지식을 습득하거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경험에 대한 기억이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하여 우리는 양의 기억들을 통해 양이 기계인 동시에 다층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역설할 수 있다. 양의 마음도 처음에는 백지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양이 살아가며 겪은 경험들은 양에게 기억의 형태로 남아 지금의 양을 형성했다.

모든 개인에게는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서사가 있다. 서사를 통해 개인은 더욱 입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렇지만 그 서사를 부여하는 주체도 결국 경험에 대한 기억이다. 양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별 것 아닌 일상 속 작은 일들에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다른 개체에 끌림(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사랑이든 이성적인 친밀감이든)을 가지고 있었다. 제이크를 포함한 주변인들은 그것을 몰랐다. 하지만 제이크가 양의 기억 장치를 열어보게 되면서 이러한 양의 서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을 형성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주관적인 판단이 아닌, 그들이 스스로 소유한 기억인 것이다.
 
〈애프터 양〉 스틸컷 양과 동생 미카의 모습.

▲ 〈애프터 양〉 스틸컷 양과 동생 미카의 모습. ⓒ A24

 
이런 주제 의식은 후반부에서 제이크가 양의 기억들 중 가장 근본적이고 잠재적인 기억들인 '알파' 기억들을 보게 되며 심화된다. 제이크네 가족이 양을 구매했을 당시에 양은 중고품이었는데, 양의 이전 주인들에 대한 영상이 담겨 있는 기억들의 집합이었다. 이전 주인들과 처음 만나고, 함께하고, 또 그들에게서 헤어져야 했던 기억이 가장 근본적인 '알파' 기억으로서 지금의 양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분히 경험론적인 이 시각은 우리의 삶이 기억에서 시작해 기억으로 끝난다는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이후 제이크는 차를 끓이던 중 자신이 양과 차에 대한 대화를 하던 기억을 회상하게 된다. 기억 속에서 양은 묻는다. 차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러자 제이크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못하지만, 대신에 차에 대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을 양에게 말해준다. 그 영화 속에서 차를 찾던 한 남자가 자신의 독일 친구에게 '차의 신비한 특성을 묘사할 수 있는 적정한 단어가 없다'고 했고, 그러자 그 친구는 말했다는 것이다. "맞아, 근데 이런 걸 상상해 봐. 넌 숲속을 걷고 있고 땅에는 나뭇잎이 깔려 있어. 한참을 비가 내리다 그쳐서 공기는 아주 축축하지. 그리고 넌 그런 곳을 걸어. 왠지 이 차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아."라고.

양은 안드로이드로서 차의 발상지나 차의 다양한 종류나 제조법은 알고 있지만, 이는 단순히 사실들의 나열일 뿐이다. 다시 말해 양은 차에 대한 교과서적인 지식들을 알고 있었을지언정 그 영화 속의 독일 친구나, 혹은 그 영화를 봤던 제이크처럼 차에 대한 자신만의 감정과 기억을 가지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양은 제이크에게 말한다. '차에 관한 진짜 기억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 점에서 양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은 차에 대한 진정한 감정과 기억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코고나다 감독은 어떤 대상에 대한 피상적인 사실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을 소유하고 있어야 그 대상을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모든 것의 근본은 기억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그 사람과 함께했던 기억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도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어야 한다. 사랑, 우정, 관계와 같은 인간다움의 모든 근본 가치에는 기저에 '기억'이라는 고도의 뇌 속 상호작용이 깔려 있다는 말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누구나 하나쯤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인들은 뜻깊은 일이나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영상을 촬영한다. 코고나다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이들이 학교 무대에서 공연할 때마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촬영하는 습관이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습관을 버리고 계속해서 변하는 내 기억 속에만 그 순간들을 담아 두겠다고 결심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기록할 때처럼 그 순간을 재경험하지 못하고 까맣게 잊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 속 어떤 사건이 달라지고, 더 가슴 아프거나, 유의미하거나, 어렴풋하게 변하는 과정 또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의미 있는 일들을 기억하기보다는 카메라에 저장하고 있다. 의미 있는 일들이 의미 있는 기억을 형성하고, 결국 의미 있는 기억들이 의미 있는 나를 형성하는데도 말이다. 앞으로는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갔을 때, 생일 파티에서 친구에게 축하 노래를 불러줄 때, 바닷가나 수영장에 놀러 가 수영을 할 때,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순간을 즐기고 느껴 보자.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세상을 눈으로 담아 마음속 깊이 저장해 보자. 우리가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 회상할 때마다 조금 부정확해지고 흐릿해져, 그 순간 순간의 기억들이 결국엔 고유한 '나'를 만들고 실현할 것이다.
코고나다 애프터양 콜린패럴 저스틴민 헤일리루리처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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