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가 거리낌 없이 알몸을 드러낸 누드비치의 평화로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67년 2월, 이란의 친미군주 레자 팔레비 왕이 모습을 드러낸 서베를린 거리에서는 그의 폭압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살인자"라는 함성이 메아리 친다.

 

시위 현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이란 왕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동원된 친위 시위대가 인도에 모여 있던 항의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기 시작하고 경찰은 말리기는커녕 여기에 합세한다. 또 저항 의사가 없는 시위대에 곤봉세례를 가하는가 하면 붙잡힌 이들을 군화발로 무참하게 짓밟는다.

 

1970년대 독일의 급진 혁명 단체인 적군파(RAF)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바더 마인호프>의 도입부는 2009년 대한민국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적군파의 탄생

 

ⓒ 마스엔터테인먼트

당시 시위에서는 대학생 한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정부 정책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서독 내 학생운동은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한다.

 

학생들을 폭도로 몬 유력 보수우익 신문 <빌트>의 수송 차량은 몰려든 시위대에 길이 막혀 꼼짝 못하고 이 신문사의 차량과 건물은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불길에 휩싸이고 만다. 이쯤 되면 지난해 촛불집회 당시 시위대가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며 항의표시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쓰레기를 투척한 사건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다.

 

특히 혁명을 꿈꾸던 바더(모리츠 블라입트로이 분)와 엔슬린(요한나 보칼렉 분)은 동료들과 백화점에 불을 지르고 좌파 언론인 마인호프(마르티나 게덱 분)가 이들의 활동을 옹호하고 탈옥을 돕는다. 이를 계기로 '바더 마인호프 그룹', 즉 테러집단 '적군파'가 결성된다. 이들은 폭력투쟁을 넘어 무장투쟁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행동강령'은 마인호프가 쓴 것처럼 이런 것이었다.

 

"돌 하나를 던지는 행위는 범죄가 됩니다. 하지만 1000개의 돌을 던지면 정치적인 행위가 됩니다. 차 한 대를 불태우면 범죄가 됩니다. 하지만 1000대의 차를 불태우면 정치적인 행위가 됩니다."

 

이들은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후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털고 독일 내 미군 기지와 경찰서에 폭탄 테러 공격을 가한다. 특히 당시 검찰총장, 대법원장과 자본가에 대한 테러와 납치까지 감행한다.

 

딜레마에 빠지게 될 관객들

 

ⓒ 마스엔터테인먼트

곤혹스러운 것은 관객들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탄 테러의 굉음과 누군가를 향해 난사되는 총소리가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적군파의 활동에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도, 단순히 손가락질만 할 수도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노장 울리 에델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한다. 에델 감독은 '적군파들이 왜 무장 투쟁에 나서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가치 판단을 관객들의 몫으로 남겼다.

 

2시간 30분의 러닝타임 동안 1967년부터 1977년까지 10년에 걸친 적군파의 활동을 섣불리 미화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원작인 슈테판 아우스트의 책 <신화의 시간>((Der Baader Meinhof Komplex)과 당시의 재판 기록과 수사 기록, 적군파들이 주고받은 쪽지들을 토대로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적군파의 활동을 연대기순으로 사실적으로 좇아간 탓에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경계도 명확하지 않다.

 

노련하다고 혹은 비겁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다. 독일 영화 사상 최대 제작비인 2000만 유로(약 335억 원)를 들여 독일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른 <바더 마인호프>는 '테러와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를 피해가면서도 많은 논란을 남겼다.

 

22일 저녁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현재 저널리스트가 된 마인호프의 딸은 엄마에 대한 반발심으로 우파적 성향을 지니게 됐는데 '테러리스트를 영웅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적군파에 납치돼 살해된 당시 기업연합회 회장 슐라이어의 아들은 '적군파의 잔인한 폭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전했다.

 

"미치광이들을 끝장 내자"고?

 

ⓒ 마스엔터테인먼트

그래도 영화에 감독의 진심이 숨어들 곳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적군파를 추적하는 독일연방범죄수사국 호르스트 헤롤드 국장은 에델 감독의 충실한 대변자처럼 보인다.

 

그는 "미치광이들을 끝장내자"는 부하직원들을 향해 "30세 이하의 독일인 25%, 700만 명이 적군파에 공감하고 있다"며 신중한 대응을 주문한다.

 

"우리의 무지가 테러리즘을 부추기고 있어. 뿌리는 더 깊은 곳에 있어. 우리의 임무는 테러리즘과 싸우는 거야. 그러려면 우리는 저들의 동기를 이해해야만 해. 팔레스타인 문제, 미국이 벌인 베트남전, 그런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적군파의 활동은 민간인을 희생시키기 시작한 1972년을 기점으로 점차 대중의 지지를 잃어가게 된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적군파의 무장투쟁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점이 많다. 적군파는 1996년 4월 20일 AP통신에 보낸 해체 선언문에서 "우리의 노력은 비현실적이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혁명과 히피'라는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2009년 우리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거리에 선 시위대는 경찰의 무차별 폭력을 감수해야 하고 "나라 전체가 경찰국가가 되어가고 있어"라는 영화 속 외침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비극의 되풀이를 막는 방법

 

'용산 참사'에 이어 연일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쌍용차 사태'라는 또 하나의 비극도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사태 해결을 외면하는 정부는 물론 사태를 다루는 일부 언론의 행태는 비극을 희극화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들의 초점은 너트를 발사하는 새총과 '사제' 다연발총, 그리고 화염병에 맞춰져 있다.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들의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는 70년대 독일 연방범죄수사국장보다 떨어지는 인식 수준이다.

 

사태의 해결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용산의 세입자들이 왜 망루에 올라가야만 했는지, 쌍용차의 노동자들이 왜 다연발 총을 공장 옥상에 설치해야만 했는지, 깊은 곳에 있는 그 '뿌리'를 보는 것이다. "우리의 무지가 폭력을 부추기고 있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도 호르스트와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빈다.

덧붙이는 글 | <바더 마인호프>는 23일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와 CGV 압구정에서 개봉한다.

2009.07.23 19:14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바더 마인호프>는 23일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와 CGV 압구정에서 개봉한다.
바더 마인호프 적군파 울리 에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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