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테벨룸>에 대한 심각한 스포일러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아래 글을 읽지 말 것을 권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과거는 절대 죽지 않는다. 심지어 지나간 것도 아니다."

영화 <안테벨룸>(ANTEBELLUM, 감독 제라드 부시, 크리스토퍼 렌즈)의 첫 화면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목 'Antebellum'은 미국 남북전쟁의 이전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제목과 인용문을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내용은 대략 짐작이 가능하다. 남북전쟁 이전의 어떤 과거가 '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 베로니카는 현재 저명한 사회학자로 흑인 여성의 인권과 미래를 설파하며 흑인 사회에서 큰 호응을 받는 인물이다.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흑인여성 이든은 남북전쟁 이전 목화농장에서 노역을 한다. 이 시대 모든 흑인들은 인간이 아니라 가축과 같은 '소유물'로 다루어져 불로 달군 인두로 낙인이 찍히고, 체벌과 강간이 일상화되어있는 공간에서 살아가야 한다. 탈출 시도는 곧 처형으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영화는 이 두 개의 시간대를 교차하며 진행된다.

이든은 베로니카의 선조인가? 아니면 이것은 타임슬립인가? 두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 영화는 시종일관 이 하나의 의문을 추동하며 나아가고 플롯의 쾌감은 단 하나의 충격적인 반전에 의존한다.

때문에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나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어서 비평가들의 큰 호응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관객들의 호불호도 선명하게 갈린다. 공통된 것은 모든 리뷰가 이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보지 말고 갈 것을 권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즉 영화의 무게중심이 반전의 의외성에 걸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외성이 줄어들수록 기대할 수 있는 영화적 재미는 반감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핵심적인 금기사항을 건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베로니카와 이든은 동일인물이며 두 개의 시간대로 보이는 공간이 실제로는 동일한 현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흑백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다. 최초에 던진 윌리엄 포크너의 명제대로 그 차별이 과거에 있었던 것, 이미 '죽은' 것이거나 '지나간' 것이 아니고 현재에도 살아있음을 영화 속 허구적 설정을 통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안테벨룸>의 리뷰를 읽으려다가 '아무 정보도 보지 말고...'라는 저 대목에서 딱 덮고 더 이상 읽지 않은 채 극장에 간 관객의 한 사람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영화는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동시에 이 영화가 과연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만일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반전 역시 충격적이었지만 충격 그 이상이기도 했다. 내게는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거대한 은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2022년의 한국 사회에 속한 존재가 느끼는 중의적인 감정이었다. 오늘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서도 과거는 지나가지 않았다는 사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과거는 결코 지나가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을 뿐 바로 오늘 속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돌연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무제한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에게 하루 8시간 근로는 그들의 '미래' 였을 것이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저임금 제도와 안정된 직장 또한 그들의 '미래'였을 것이다. 참정권을 비롯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전세계 모든 여성들의 '미래'였을 것이다. 비장애 사회 구성원과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는 전세계 모든 장애인들의 '미래'였을 것이다. 전쟁을 겪어본 모든 국가는 전쟁 없는 평화가 곧 '미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 그들이 꿈꾸었던 미래는 상당부분 '현재'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의 한국에서 주 52시간 노동제한의 폐지, 최저임금 폐지가 거론되고 보다 해고가 자유로와지는 노동시장 유연화가 제안되며,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고 주장되고, 장애인의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는 시민을 '볼모'로 삼는 비문명적 행위로 매도된다. '멸공'과 '선제타격'으로 전쟁이 정당화되고 평화를 위한 주체적 노력보다 강대국과의 동맹으로 우리의 안전이 도모될 것이라는 구한말의 의식구조가 재현된다.

이미 지나온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저 모든 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것은 지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현재 속에 내내 잠복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저러한 퇴행이 퇴행이 아니라 전진이라고 호도하는 어떤 욕망들이, 정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줄 것을 요구하는 욕망들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백인이 신처럼 군림하는 <안테벨룸>에서 흑인들은 절대 복종을 강요받는다. 복종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의 규칙이다. 주인이 말하라 허락하기 전에 노예들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해서는 안된다. 이 규칙은 가혹한 채찍질 아래 준수되었다. 침묵하는 한 전도된 질서는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게 마련이다. 과거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할 때, 과거가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할 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그 과거를 향해, 그것이 '과거'임을 증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페이스북에 전재된 글입니다
안테벨룸 최저임금 구조적 성차별 장애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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