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격투무대에도 '역사'라는 자랑스러운 부산물들이 하나둘 쌓이고 있다. 한 장 한 장 낱본으로 흩어져있던 파이팅의 잔상들은 선수들이 링 안에서 쏟아낸 피와 땀으로 엮여져 기록이라는 페이지를 만들어냈고, 각 대회를 통해 뿜어진 명장면의 흔적들은 미래의 챔피언을 꿈꾸는 유망주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다.

 

입식격투의 최고봉인 K-1 역시 마찬가지다. 다소 불안했던 출발에 비해 시간이 지날수록 '레전드'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은 파이터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열광 섞인 팬들의 함성 또한 자연스레 뒤를 이었다. 한층 두터워진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수들은 저마다의 특기와 기술을 개발해냈는데 각종 전략·전술은 물론 세세한 컴비네이션까지, 테크닉과 세기에서 장족의 발전이 거듭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열매와 잎은 계절 따라 피고 지고를 반복해도 뿌리만큼은 항상 그 자리에서 나무를 지탱하고 있다'는 말처럼 항상 변하지 않는 사항들 역시 존재하고 있으니, '압박!'이라는 요소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K-1 역사에서 강자로 꼽혔던 파이터 중 이 압박이라는 부분에 약했던 선수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파이터들은 각자 자신만의 레퍼토리가 추가된 압박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를 향해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는 공격, 공격, 공격,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날카로운 눈으로 동작을 읽어가며 마음속 깊은 곳부터 눌러버리는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때로는 한순간에, 때론 지속적으로 심신을 모두 꺾어버리는 압박이라는 존재, 그 위압감과 파워 속으로 같이 들어가 보자.

 

피터 아츠 피터 아츠는 '폭군'이라는 별명답게 끝없는 공격을 통해 상대를 압박한다

▲ 피터 아츠 피터 아츠는 '폭군'이라는 별명답게 끝없는 공격을 통해 상대를 압박한다 ⓒ 오마이뉴스 남궁경상

 

아츠와 밴너, 끝없는 전진의 압박!'

 

'네덜란드의 벌목꾼' 피터 아츠(38·네덜란드)와 '하이퍼 배틀 사이보그' 제롬 르 밴너(36·프랑스). 해외는 물론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인기와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이들은 불혹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링을 호령하고 있는 그야말로 K-1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비록 한쪽은 그랑프리 3회 우승에 빛나고, 다른 한쪽은 단 한차례의 타이틀도 없는 불운을 겪었지만 K-1을 사랑하는 팬들은 두 선수 모두에게 '제왕'이라는 호칭을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듯 이들이 높은 인기를 얻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이 된 것은 바로 결코 물러서지 않는 특유의 파이팅스타일에서 기인된바가 크다.

 

특히 젊은 시절의 그들은 경기 시작부터 종료공이 울릴 때까지 공격만 쏟아 부을 정도로 고집 센 사나이들이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파이터가 가질 수 있는 꿈틀거리는 '공격본능'을 제대로 실천한 전형적인 '불파이터'들이었다는 평가이다.

 

링 중앙을 선점한 채 끊임없이 전진 스탭을 밟고 나가면 그 위압감에 웬만한 상대들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그저 브레이크가 고장난 거대한 탱크 마냥 기관총과 대포를 번갈아 뿜어대며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설프게 가드를 하느니 차라리 한 대 더 때리는 형태의 수비(?)를 취할 정도로 이들의 공격은 끝이 없었다. 이렇듯 계속되는 거침없는 공격은 반격기회의 말살은 물론 심리적인 면에서도 쉼없는 압박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레미 본야스키, 방심을 허용치 않는 '시간차 압박'

 

그랑프리 2연패에 빛나는 '플라잉 젠틀맨' 레미 본야스키(32·네덜란드). 비록 성적에 비해 인기나 존재감은 떨어진다는 혹평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K-1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정상에 선 남자다.

 

본야스키는 아츠나 밴너처럼 시종일관 공격을 퍼붓지 않는다. 그렇다고 헌트나 세포처럼 무시무시한 한방으로 근거리에 들어온 상대를 한방으로 날려버리는 '하드펀처' 타입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아웃파이팅 스타일인 그는 탄탄한 가드와 지능형 파이팅으로 상대에게 묘한 압박을 심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파이터로 평가받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본야스키는 초반부터 발동을 잘 걸지 않는다. 원래도 난타전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그는 가드를 두텁게 한 채 상대의 주위를 빙빙 돌며 탐색전을 거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몸에 땀이 날 때 쯤 서서히 공격의 강도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맹폭을 가하지는 않는다. 계속 타이밍을 노리다가 이때다 싶으면 벼락같이 달려드는데 순간적인 그 기세가 워낙 사나운지라 대부분의 상대는 움찔하며 일단 밀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상대의 반격이 거세지면 슬쩍 물러났다가 다시 찬스를 봐 또다시 덤벼든다. 이런 본야스키의 스타일을 두고 팬들이나 경기관계자는 '사냥꾼이 먹잇감을 덮치는 타이밍을 노리고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를 모를리 없는 상대선수 입장에서는 일단 초반에 승부를 걸려는 성향이 많은데, 큰 글러브 속에 작은 얼굴을 묻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본야스키의 가드는 사실상 뚫기가 무척 어렵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언제 공격이 터질지 모른다'는 무언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점점 '시간차 압박'이 시작되는 것이다.

 

레이 세포 그의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한방은 상대에게 보이지않는 공포감을 심어주곤한다.

▲ 레이 세포 그의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한방은 상대에게 보이지않는 공포감을 심어주곤한다. ⓒ 오마이뉴스 남궁경상

 

세포와 헌트, 성큼성큼 '한방의압박!’

 

뉴질랜드의 원주민 출신인 마오리 족의 레이세포(37)와 사모아족의 마크 헌트(34). 현재는 서로 엇갈린 길을 가고 있지만 K-1의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두 선수 모두 손꼽히는 '하드펀처’들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 역시 밴너와 아츠처럼 전진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경기 내내 융단폭격을 가하는 타입이라기보다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 강력하게 한방을 꽂아버리는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상대입장에서는 언제나 '한방의 공포'에 시달려야했다.

 

전투민족의 후예들답게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인한 골격에 두둑한 배짱과 파워 그리고 근성까지 갖췄던 이들은 특히 접근전에 강했는데 조금의 틈만 있으면 순식간에 꽂아 넣는 강력한 철권(鐵拳)이 일품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세포와 헌트가 가장 장점을 보인 부분은 다름 아닌 '난타전'이다. 각각 빠른 동체시력과 맷집이라는 비장의 무기로 무장한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성을 잘살려 거리 안에 들어온 상대를 결코 용서치 않았다. 언제 어디서 한방이 터질지 모르기에 이들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을 수 밖에 없던 이유였다.

 

후스트, 너의 리듬은 나의 것! 타이밍을 부수는 '실시간 압박’

 

지능형 파이터의 대명사인 어네스트 후스트(43·네덜란드)의 압박은 은퇴한 지금까지도  '무형(無形)의 압박'의 대명사로 평가받고 있다. 계속 공격을 감행하지도, 한방의 위협으로 난타전에서 공포를 심어주는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레미 본야스키처럼 시간을 두고 서서히 압박을 감행하는 방식도 쓰지 않는다. 그저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상대와 달리 맞서는데‘파악'이 어렵다는 점에서 상대선수는 더욱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겉으로 보이는 후스트는 스피드, 파워, 맷집 등 어느 한가지도 특출 난 것이 없는 파이터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웃파이팅이 아닌 전진스탭을 즐겨 쓰는 그는 천천히 상대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다가 찰나의 타이밍에서 맥을 끊어버리며 전체적인 리듬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펀치가 강한 상대에게는 로우킥으로 스탭부터 묶어놓고, 체력이 약한 상대에게는 바디블로우로 활동량을 꺾어버리고, 가드가 허술한 상대에게는 용감하게 치고 들어가 난타전도 불사한다. 특히 선수들이 그날그날 가지고 있는 미세한 컨디션까지 파악해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컴퓨터가 따로 없을 정도이다.

 

이른바 '실시간 압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리듬과 타이밍이 번번이 끊겨버린 상대는 다른 때보다 더욱 쉽게 체력과 투지가 고갈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마치 마라톤선수를 중간에 멈추게 한 후 다시 뛰게 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공략법으로, 오직 후스트만이 가능한 '압박기술'이라 할 수 있겠다.

2008.07.05 08:25 ⓒ 2008 OhmyNews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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