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한 달 전, 캐나다 연방법원에서 정신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박해를 당한 오미숙(42)씨와 그녀의 딸 조에(15)양에게 난민 지위를 허용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화제가 되었다. 오씨는 2008년 3월 캐나다 난민위원회(IRB)에 난민 지위를 신청했는데 한국 여의도에 있는 한 대형 교회의 목사가 정신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박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사 결과, IRB는 2008년 10월 오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난민 지위를 부여했다. 다만 오씨 주장과 달리 오씨를 박해한 측은, 교회 목사가 아니라 한국의 의료시스템이었다고 결론내렸다. 오씨는 한국에서 정신질환으로 세 차례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됐지만, 적절한 치료는커녕 오히려 학대를 받았다는 게 IRB의 판단이었다.
 
그러자 캐나다의 이민자 관리 당국인 '시민권 및 이민부'가 이에 불복해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오씨 사건이 선례가 되어 한국의 다른 정신장애인들의 난민 신청이 쇄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국의 사회적 비용이 증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연방법원은 올 5월 '시민권 및 이민부'의 주장을 기각하고 IRB의 손을 들어 줬다.(에이블뉴스 2009.06.23)
 

시네마서비스 배급 이 영화는 가족 부양의 의무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두 남녀(인구-한석규 분, 혜란-김지수 분)의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두었다.

▲ 시네마서비스 배급 이 영화는 가족 부양의 의무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두 남녀(인구-한석규 분, 혜란-김지수 분)의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두었다. ⓒ 박용민

한국의 정신장애인이 '한국의 의료시스템' 때문에 캐나다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인들은 격리와 배제의 대상으로만 간주될 뿐, 더불어 살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정신장애인들의 가족만이 이들을 돌보거나 함께 살아갈 뿐이다. 오씨의 경우처럼 어른이 되어 일상을 생활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고 해도, 정신장애인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사회 속 구성원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이번 글의 소재인 변승욱 감독의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 등장하는 정신장애인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가족 부양의 의무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두 남녀(인구-한석규 분, 혜란-김지수 분)의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두었다. 남자 주인공의 형(인섭-이한위 분)은 정신장애인으로서 50살이 다 되었으나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음에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채, 단지 집에서 생활하며 동생과 어머니(정혜선 분)로부터 부양을 받는다는 식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동생은 이런 형을 돌보는 과정에서 겪는 이런저런 어려움, 가령 엄마와 사랑하는 여자와의 갈등 상황을 수위만 달리 한 채, 반복적으로 맞이한다.

 

때문에 인구는 인섭을 정신병원에 보내기도 하나, 엄마의 반대로 다시 함께 살아간다. 물론 정신병원에 다녀온다 해도 제대로 된 사회재활을 받을 수 없는 현실에서 인구의 어려움은 여전하다. 그런데다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시고 혜란과의 결별 앞에서 인구는 인섭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 매우 어려워하나, 결국 형과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시네마서비스 배급 <사랑할 때...>는 정신장애인인 인섭과의 관계에서 동생인 인구가 겪는 부담감과 어려움이 줄거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 시네마서비스 배급 <사랑할 때...>는 정신장애인인 인섭과의 관계에서 동생인 인구가 겪는 부담감과 어려움이 줄거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 박용민

 

이와 같이 <사랑할 때...>는 정신장애인인 인섭과의 관계에서 동생인 인구가 겪는 부담감과 어려움이 줄거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의 상영 직후, 몇몇 장애인 단체로부터 '장애인을 가족의 짐으로 그려두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장애인의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부적절한 비판이었다.

 

실제 우리 사회 정신장애인의 현실은 한국 생활이 너무 힘들어 캐나다로 난민 신청을 하는 모습이나, 영화 속 인구의 돌봄을 둘러싸고 엄마와 인섭이 겪는 일련의 갈등에서 드러나듯이, 오롯이 개인/가족에게 부양을 책임지도록 하는 반면 사회 책임은 매우 소홀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어느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우리 사회가 정신장애인을 담당하는 부분을 다루고 있지 않는 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오히려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닐까?

 

이러한 사회적 책임의 부재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정신장애인과 관련된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 진정 접수 현황이다. 2006년 228건, 2007년 548건, 2008년 520건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2008.) 물론 이러한 진정의 대다수는 흔히 정신병원으로 이야기되는 정신보건시설에서 일어난 사례들이다. 그러나 인섭과 같이 사회적 편견과 낙인의 결과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격리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정신장애인들의 삶을 상상해본다면, '차별공화국'이란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실제 이와 같이 격리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는 점은, 갈수록 늘어나는 정신보건시설 등의 입원(소)자 수에서도 살필 수 있다. 1980년 12,000명에서 2005년 62,117명, 2006년 64,498명으로 계속 증가 추세이다. 또한, 입원 기간도 평균 267일로서 독일 25일, 영국 52일, 프랑스 35.7일, 이탈리아 13.4일 등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게다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정신장애인의 계속입원 비율은 95% 이상이다. 요컨대, 장기입원자의 경우, 한 번 시설에 들어가면 시설 밖으로는 거의 나오지 못하고, 이 사회에서 격리된 채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는 것이다.

 

시네마서비스 배급 인섭과 인구 어머니의 말처럼, 과연 우리 사회 속에서 정신장애인이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못한 게 뭐가 있는가?

▲ 시네마서비스 배급 인섭과 인구 어머니의 말처럼, 과연 우리 사회 속에서 정신장애인이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못한 게 뭐가 있는가? ⓒ 박용민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도 쉬이 개선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잖은 곡절 속에서도 인구가 인섭의 손을 내밀어 함께 살아가고자 한 것처럼 우리 사회도 정신장애인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제반 사회적 제도들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또 다른 오씨와 같은 사례들이 발생할지 모르며, 우리나라는 전세계적으로 '차별공화국'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다른 나라의 비난보다, 우리 스스로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우리 사회 속에서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섭과 인구 어머니의 말처럼, 과연 우리 사회 속에서 정신장애인이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못한 게 뭐가 있는가?

2009.07.13 15:34 ⓒ 2009 OhmyNews
장애영화 정신장애인 차별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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