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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유이의 허벅지를 '꿀벅지'라 부르면서 번진 '꿀벅지' 논쟁이 한참 이어졌다. 말뜻부터 갈린다. 누구는 '탄탄하고 예쁜 허벅지'. 또 누구는'꿀을 발라 놓은 듯 핥고 싶은 허벅지'란 뜻이라 한다. 다음 아고라에 여학생들이 '성적 수치심을 주는 이 단어를 언론이 사용하지 않게 해 달라'는 청원을 내면서 논란은 번졌다. 합리적 토론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부에선 '꼴패미(여성주의자를 폄하하는 말)'들과는 얘기가 안 된다, 주간동아 모 칼럼은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과 다양성을 표현하는 말이니 존중하자'고도 한다. '꿀벅지가 성희롱이면 초콜릿 복근도 성희롱이다'이라며 남녀 성 대결도 부추긴다. '꿀벅지 논쟁'은 단면일 게다.

 

논쟁은 외모가 가수 경쟁력의 기준이 되는가? 순수하게 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사회인가? 성이 보편적으로 상품화된 세상에 왜 '꿀벅지'만 문제 삼는가? 노출은 반드시 성적 욕구를 드러내거나 불러일으키는가? 남성의 노출과 여성의 노출은 평등하게 받아들여지는가?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가? 등등 여러 갈래의 문제를 담고 있다. 문제 하나하나를 짚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다 다룰 깜냥이 안 되니, "남성과 여성의 몸을 보는 미학적 기준은 평등하지 않다"는 점을 미술사를 예로 이야기 해보겠다.

 

벗을 수 있는 자격이 사회적 지위 - 고대 사회

 

기원전 720년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서는 벌거벗은 근육남들의 경기가 벌어졌다. 우연이 제도가 된 셈이었는데, 육상경기에 참가한 오르시포스가 경기에 열중하다가 '로인클로스'가 벗겨졌다. 오르시포스는 우승을 했고, 경기 성적을 좋게 하려면 알몸이 좋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그 후 알몸 경기가 일반화 됐다. 벗은 몸으로 경기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에 아름다운 것으로 새겨졌다. 좋은 점수를 얻으니 좋고, 율동미 넘치는 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름다울 '미(美)'가 사냥을 잘 한 사람이 상으로 받은 양머리가 달린 가죽을 뒤집어 쓰고 춤추던 모습에서 기원한 것과 같은 원리다. 옛 사람들에게 좋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허나 이는 남성만의 특권이었다. 여성은 경기에 참가해도 꼭 옷을 입어야만 했다.

 

경기장에는 여성의 입장을 제한했다, 벗은 몸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기혼 여성은 성적 연상을 할까봐 관람을 막았다. 반대로 미혼 여성은 선발해서 경기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내줬다. 이유는 '꽃 장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찬사 받아야 할 아름다운 사람들 주변에 미혼 여성들이 둘러선다면 아름다움이 배가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미로의 '원반 던지는 사람'을 비롯해서 고대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누드는 실제 장면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다. 몸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 그 자체 외에는 다른 의도를 담지 않은 남성 누드는 사회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당당한 형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스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신의 형상에 담았다. 그리스 미술에 나타나는 벗은 몸은 '벗은 몸'이 아니라 '신적 존재'임을 표현하는 기호였다. 이런 특권적 형태로서 나체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벗은 여성은 문제적 여성

 

 

고대의 남성들이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낼 때, 여성은 전혀 다른 경우에만 벗은 몸을 드러낸다. 위 작품은 <죽어가는 니오베의 딸>이다. 테베의 왕비였던 니오베는 열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자녀가 많은 것은 큰 자랑거리였다. 자긍심이 넘쳐 오만해진 니오베는 자식이 둘 밖에 없는 여신 레토를 비웃고, 그의 아들과 딸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기리는 축제를 무산시켰다, 격노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니오베의 자녀를 모두 화살을 쏘아 죽였다. 왕은 충격으로 자살했고, 니오베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죽어가는 니오베의 딸>은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 간다. 옷은 다 흘러내렸고, 눈빛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등 뒤에 활을 뽑아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고대의 여성은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는 창녀이거나 죽어가는 니오베처럼 찬사는커녕 추하고 부끄럽거나 뭔가 문제가 있을 때만 벗은 몸으로 등장했다. 여성은 사회적으로도, 미술 작품 속에서도 객체였다. 여성의 몸을 감싼 옷은 보호 받는 사람, 문명의 혜택을 입은 사람의 징표였다. 보호 안에서만 여성은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니오베의 딸처럼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여성이거나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창녀에게 옷이란 보호막은 쓸 데 없는 것이었다.

 

여체의 아름다움, 대상화된 아름다움

 

고대 말부터 여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누드들이 등장하고, 여체의 아름다움은 점차 발전된 솜씨로 작품에 등장한다. 남성은 그와 달리 위엄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복색이나 소품들을 갖추고 등장한다.

 

 

 

 

성서에 나오는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를 그렸다. 멤링 한스는 당시 미인의 기준을 따라 작은 가슴과 긴 허리, 볼록한 배를 그렸다. 한스의 시선은 밧세바의 목욕을 은밀히 보고 싶어 하는 남성의 시선을 따랐다. 세바스티아노의 밧세바 역시 유혹하는 것 같은 눈길과 몸짓을 한다. 여성화가 젠틸레스키의 그림과 비교하면 결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여성은 남성 화가가 대부분인 화단에서 남성 화가의 손으로 화폭에 담겼다. 벗은 여성은 남성의 시각, 욕망이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눈으로 볼 때도 몹시 아름답다. 하지만, 고대 올림픽에서 남성을 성적 자극의 대상으로 두지 않으려고 기혼 여성의 입장을 막았던 것이나, 신성함을 드러내기 위해 남성의 벗은 몸을 형상에 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각에 서 있다. 여성은 늘 수동적이거나, 온화하거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그림에 등장한다.

 

여성, 정치적인 지위에 따라 도도해졌지만

 

여성이 선거권을 쥐게 되는 것은 1920년. 그 때부터 그림 속 여성들은 벗은 몸으로도 당당해 보인다.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이 대표적이다. 도도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성들에겐 자신감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알몸을 내보이는 이브나 다나에, 유디트에서는 강한 애로티시즘이 엿보인다. 주로 여성을 그린 클림트의 그림이 '유혹'이란 이미지를 달고 다니는 대신 당당하고 도도한 여성은 뒤로 숨는다. 이유가 뭘까? 역시 남성 중심의 시각이다. 여성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당시 남성들은 두려워했다. 상대적으로 남성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 불안한 심경이 애로티시즘을 강조하는 그림으로 외화됐다. 다른 시선의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롭고 당당한 여성은 여성화가의 손에서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여 년 전부터니 최근까지 3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성 '몸'의 아름다움은 남성의 시각을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견해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다. '초콜릿 근육'이 당당함과 건강미 자체로 '미'의 대상이 되었던 남성미의 역사를 따른다면, '꿀벅지'는 지속적으로 대상화된 존재로, 욕망의 대상으로, 미술의 객체로 지내온 여성미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 사심 없이 인간의 아름다운 몸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말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사회와 예술 안에서 동등한 위치로 보내는 시간이 보다 많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노동세상(http://laborworld.co.kr) 그림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그림,이야기,여성,남성,, #누드, 신화,종교,신성, #남미,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올림픽, #니오베, 니오베의 딸, 질투, 오만, #아폴로, 아프로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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