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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기질을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우울질 등 4가지 기질로 나누어 그 특성을 분류했다.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지 않으며, 치료에 앞서 그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천착한 점에서 탁월한 관점을 가진 것인데, 보건 수업 시간에 이성교제에 관한 주제를 다루면서, 이 4가지 유형의 기질적 특성을 소개하곤 한다. 그 어떤 천재가 인간을 완벽하게 분류할 수 있겠는가마는, 다소 미흡하더라도 같은 여성이거나 남성이어도 사람마다 기질과 특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나면, 실제 이성 교제시 훨씬 더 깊은 관심과 배려가 가능하리란 생각에서다.

 

기질 특성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1학년 8반 남학생들과 함께 고등학교 1학년 현재를 기준으로 내가 만나고 싶은 여자 친구, 그리고 조선시대처럼 지금 나이에서도 결혼이 허락된다면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특성을 5가지씩 꼽고, 첫 데이트 코스를 기획한 후 어느 정도 예산이 필요하겠는지 써보도록 했다.

 

만나고 싶은 여자 친구로는, 간혹 '발바닥이 예뻤으면 좋겠다', '돈을 많이 쓰게 하지 않는다'는 소수의 의견도 있었지만 대체로 '예쁘다', '귀엽다', '순진하다' '착하다', '몸매가 좋다', '애교 많다', '생각이 깊다', '지적이다', '청순 글래머형이다', '여리다', '언제나 밝다', '키가 나보다 크지 않다', '내 말을 잘 들어준다', '웃음이 자연스럽다', '화를 잘 안 낸다' 등으로 주로 외모나 심성에 초점이 모아졌다.

 

그런데,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꼽는 대목을 추려보니, 성인들만큼이나 너무 현실적(?)이어서 깜짝 놀랐다.

 

'자녀 교육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가정적이어야 한다', '요리를 잘 해야 한다', '부모님께 잘 해야한다', '충동적이지 않고 책임감이 있어야한다'는 소수의 답변이었고, '돈이 많아야 한다' '부유해야 한다', '맞벌이를 해야 한다'부터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된다'가 대다수 아이들의 답변.

 

데이트 코스를 구성하라는 질의에 대한 답변을 받고 보니, 아이들의 놀이 문화를 방치하고 있는 기성 세대로써의 부끄러움이 한 순간에 몰려왔다. '한강 둔치를 걸으며 이야기하고 싶다'는 명훈(가명), '공원에 가겠다'는 현석(가명), 명랑소년 기창(가명)이는 '전용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산에서 암벽 등반을 한 후 이집트 오아시스에서 물을 먹고 온다'는 황망한 답변으로 머리를 잠시 어지럽게 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주로 까페, 노래방, 놀이공원, 영화관, 스케이트 장을 조합하여 데이트 코스를 작성했는데, 단 1회 데이트 비용으로 3만 원에서 최고 15만 원까지 들 것으로 예상해 구성했다. 결과적으로는 단 2명만 큰 돈이 들지 않는 데이트 코스를 기획한 것.

 

누가 우리 아이들에게 결혼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현재 단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3만 원이 훨씬 넘는 데이트 코스만을 꿈꾸게 하고 있는 것일까. 주인공이 바뀌어도 판박이로 구성되는 뻔한 데이트 경로, 돈이 없으면 데이트할 수 없다는 방법론을 쫓으면서 그속에서 아이들이 과연 얼마만큼 깊어지고 넓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지난 4월 10일, 사단법인 보건교육포럼이 주최한 제 1회 교사 아카데미에서 <핀란드 디자인 산책>의 저자 안애경씨를  만나 핀란드 문화와 교육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선생님께서 핀란드 아이들의 성의식에 대하여 질의를 했는데,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핀란드 아이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하기에, 부모님의 경제력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번 돈 안에서 데이트도 해야 해서 무척 검소하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지금껏 가장 인상 깊은 추억으로 남는 데이트가 대학생 때 단 300원으로 만났던 때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설마'하는 표정을 짓는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값비싼 곳에서 소위 칼질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비싼 커피 마시면서, 재미없는 영화여도 눈치 보며 끝까지 봐야했던 영화관 데이트보다, 남들 안 하는 방법으로 도전 정신을 갖고(?) 데이트 해보자는 데 합의, 자판기 커피 300원만으로 데이트 해보니, 이야기도 더 많이 하고, 그래서 상대방이 더 기억에 남아, 지금도 단연 가장 즐거웠던 데이트로 추억된다고 강조해도 도무지 못 믿는 눈치다.

 

다른 학급에서는 5천 원 이내로 데이트하는 방법을 기획하도록 숙제를 내볼까 싶다. 인간에 대하여 더 깊고 넓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성교제가 필요하다는 교과서를 보면서, 돈으로 데이트마저 피상적으로 구성할 수 있고, 결혼 상대마저 그 무엇보다 돈이 많은 게 최고라는 아이들의 허튼 믿음을 깨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더욱 두터워지는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보건교육, #이성교제, #보건교육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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