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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를 읽으면서

내가 제러미 리프킨을 만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3년 전 우연한 기회에 리프킨의 '엔트로피'(이창희 옮김, 세종연구원)를 읽게 되었다. 그 책은 내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내 좌우명과 깊이 연결되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누군가가 내게 좌우명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는 곧잘 '생각은 깊게, 생활은 검소하게(think globally, act locally)'라는 에머슨의 말을 인용해 왔다. 어떤 말보다 이 명구는 내 삶의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리프킨을 만날 때까지 그 좌우명은 그저 좋은 사고방식에 불과하였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나의 좌우명에 이념과 철학을 불러 넣어 주었다.

제러미 리프킨의 종말 시리즈. 왼쪽부터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
 제러미 리프킨의 종말 시리즈. 왼쪽부터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
ⓒ 민음사/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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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나는 리프킨의 다른 책을 탐독해 왔다. 종말 시리즈라고 하는 책들(<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을 읽었고, 작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언젠가 나도 이런 책을 써보고 싶다고 했던 <유러피언 드림>을 읽었다. 이러한 책들은 내게 자동차 문화보다는 도보 문화가, 과도한 육식 문화보다는 채식 문화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임을 알려 주었다.

내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연전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인 김선수 변호사에게 어떻게 해서 채식주의자가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 중에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이 나왔다. 이렇게 리프킨은 나와 내 지인들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책표지.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책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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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러미 리프킨이 또다시 사고를 쳤다. 몇 년의 공백 기간을 갖더니 드디어 대작을 출판한 것이다. 리프킨의 신작 <공감의 시대>(이경남 옮김, 민음사)가 출간된 것이다. 800쪽이 넘는 대작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리프킨 저술 작업 40년의 종합판이다. 그가 쓴 이야기가 다시 한 번 요약되고 심리학, 정신분석학, 역사, 철학, 과학기술 등 모든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공감과 엔트로피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읽기가 쉽지 않다. 쪽 수도 부담스럽지만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생각할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비록 리프킨 저작을 다 읽어 볼 수는 없지만 그가 말하는 핵심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몇 주 전 나는 이 책을 한 주일 동안 치열하게 읽었다. 밑줄을 치고, 전작을 찾아 읽어보면서 말이다.

이런 나에게 주변 사람들이 말한다. 그렇게 읽었으니 한 번 봉사하라고. 이름하여 <공감의 시대> 길라잡이를 만들라는 것이다. 이에 자신은 없지만 도전해보고자 한다. 나의 이 안내가 독자들에게 리프킨의 새로운 대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 책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무엇일까. 그의 표현대로 "공감을 통한 문명사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리프킨은 우리 인류의 문명사를 그가 발견한 '공감'이란 잣대로 재면서 우리 인류가 어떻게 공감을 발견해 왔는지, 그것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인류는 공감이라는 감정을 발견하면서 성장하고 또 그것으로 불행을 맛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성장과 불행의 최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분석해낼까, 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 낼까,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의 구조와 내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제1부(호모 엠파티쿠스)는 인간의 본성이 공감적 존재(호모 엠파티쿠스)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를 위해 리프킨은 인간 공감능력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철학을 동원하고, 심리학, 정신분석학, 심지어는 생물학적 관점을 동원한다.

제2부(공감과 문명)는 공감이라는 틀로 인류문명사를 서술한다. 저,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공감을 어떻게 발견하고 인류문명을 발전시켜 왔는지를 본다. 여기에서는 공감의 역사가 곧 문명의 역사이고 그것은 묘하게 역설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예증 된다.

제3부(공감의 시대)는 이 책의 결론 분야에 해당한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공감과 엔트로피의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노정된 시기로 볼 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구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또 다른 공감의 지혜를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공감이란 무엇인가

이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안내하기에 앞서 '공감'이라는 말부터 이야기해 보자. 공감이라는 용어는 1872년 로베르트 피셔가 미학에서 사용한 독일어 einfühlung(감정이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는 이 미학용어를 빌려 와 정신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에 있어 이 용어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용어가 오늘날 공감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empathy로 영어권 소개되는 것은 1909년 E.B. 티치너에 의해서이다.

이렇게 해서 영어권으로 번역된 '공감'은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고통만을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공감하므로 혹자는 공감을 "다른 사람의 곤경 또는 기쁨에 대한 총체적 반응으로 인식하는 경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공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말하는 유대감이기도 하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상호 유대감을 추구하고 그것을 확장해 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엔트로피'란 무엇인가
이 책 여기저기에 나오는 엔트로피, 이 물리학 용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이 책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러니 이것을 일단 정리하는 것이 이 책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제레미 리프킨 저/이창희 역 <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저/이창희 역 <엔트로피>
ⓒ 세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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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 리프킨은 30대에 <엔트로피>라는 저작을 발표하고 평생 이 엔트로피 사상에 근거한 사유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엔트로피를 순수 열역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면 물리학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리프킨이 사회과학적으로 변환한 개념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지만(이를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 한다. 열역학 제1법칙이라 함) 엔트로피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우주의 에너지는 늘 일정하지만 그 형태는 끊임없이 바뀌며 한번 바뀐 에너지는 일방적이어서 다시는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을 나타내는 물리량"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달리 말하면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물리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비행기를 타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우리가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이는 모든 것이 엔트로피적 관점에서 보면 엔트로피 증가이고, 이것을 물리학적으로 보면 에너지는 한 번 변환하면 결코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 달구어진 쇠부짓갱이는 식어서 열평형 상태가 되면 다시 불에 넣어 달구기 전에는 저절로 뜨거워질 수가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바로 이것이 엔트로피가 증가한 현상이다. 나아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말은 엔트로피 법칙을 생활법칙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다.

이 책의 중심축(핵심)은 무엇인가

이제 이 책 전편에 흐르는 중심 생각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확실히 잡아야 이 책을 이해했다 할 수 있으리라. 리프킨은 책 이곳저곳에서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을 강조한다.

그렇다, 리프킨은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그 역설이 가져온 인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에 의하면 인류사는 공감의 역사이면서도 엔트로피의 역사이다. 즉, 인류는 긴 역사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고 공감적 감수성을 고조시켜 왔다.

한 마디로 인류역사는 공감의 확장이다. 반면 이런 공감의식이 확산되면 확산될수록 지구의 에너지와 자원의 소비는 급증하여 지구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세계는 기후변화에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가 전 지구적으로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켜 오면서 수많은 탄산가스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엔트로피를 급격하게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인류는 공감을 확장시켜 오면서 역으로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이다.

리프킨은 인류의 역사에서 이것을 발견하고 그 심각성을 고발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역설한다. 우리 인간은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을 추구해 왔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우리 인류의 여정은 단순한 사회에서 점점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것은 우리의 공감능력의 발현이었다. 우리의 공감이 확대되지 않고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의 행동양식에는 크나 큰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 인류의 위기로 다가왔다. 이것이 바로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의 관계이다.

이제 덤으로 위의 이야기를 우리가 사는 거대사회(거대도시사회)와 문명의 본질로 연결시켜 보자. 이 연결을 통해서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은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먼저 인간의 공감이 엔트로피를 극대화시키는 거대사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공감은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도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만들게 하였다. 사회생활이나 사회조직은 인간의 공감(능력)이 없으면 상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만일 우리 사회가 모두 공감이 없는 사람들, 예컨대 자폐적 불구자들로만 구성되었다면 사회조직이 가능하겠는가. 옆 사람이 누군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진면목이라면 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인식을 할 수 있다면 사회가 점점 커져 간다는 것은, 사회가 점점 복잡해져 간다는 것은 바로 공감의 확산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공감의 확장=문명의 발전"이라는 도식이 성립된다.

다음으로 문명의 본질이다. 리프킨은 철저히 문명의 본질을 엔트로피라는 관점에서 본다. 이것은 리프킨만의 견해는 아니다. 조지 메커디는 문명의 본질을 통찰하면서 "에너지를 인간의 발전과 필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바라보았다.

레슬리 화이트 또한 비슷한 견해를 취한다. 그는 문화의 진화를 "개인이 1년에 이용하는 에너지의 양이 증가하거나 에너지를 일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적 수단의 효용성이 증가"라는 측면에서 관찰한다. 모두 리프킨과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엔트로피적 입장에서 문명이란 바로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이다. 또한 고에너지를 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명의 본질이다. 위와 같은 설명이 이해가 간다면 리프킨이 말하는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의 결론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식으로 성립된다.

공감의 확산→새로운 에너지 및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엔트로피의 증가→지구의 위기

공감의 확산은 새로운 에너지 및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을 가져왔고(이들의 관계는 선후의 관계는 아닐 것이다. 이 둘은 상호작용으로 일으키면서 발전한다) 그것은 결국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와 급기야 오늘날 전 지구적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공감으로 보는 문명사

자, 이제 이 책의 각론에 해당하는 부분에 접근해 보자. 제1부는 인간이 과연 공감적 존재인지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 혹은 생물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읽어 보면 된다. 독서에 시간이 걸릴 뿐이지 리프킨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것만은 이해하자. 인간은 우리가 알아 온 것보다는 훨씬 '공감적 존재'(호모 엠파티쿠스)라는 사실을. 그것은 제대로 된 철학자라면,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제2부와 제3부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곳에서 공감의 문명사를 읽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에서 빚어진 지구의 위기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낼 것인가.

제2부에서 리프킨은 인류사를 공감의 역사로 보고 그것을 설명한다. 크게 다섯 시기(고대, 로마와 기독교, 중세 말, 근세, 포스트모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곳을 읽을 때 염두에 둘 것은 리프킨이 생각하는 문명사가 왜 공감의 역사인가이다.

이 부분을 그냥 읽으면 단순한 역사적 기술에 불과하다. 만일 그렇다면 꼭 이 부분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특별히 리프킨이 다섯 시기를 공감의 역사로 보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리프킨은 역사를 공감의 진화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리프킨에게는 이 진화과정이 엔트로피적 입장에서 보면 에너지-커뮤니케이션의 패러다임의 변화과정과 괘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즉, 공감의 역사는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니 그 패러다임의 변화과정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공감의 역사가 된다.

여기에서 커뮤니케이션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 보자. 리프킨은 에너지 제도의 변화는 그 흐름을 관리하는 소통방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즉, 에너지 제도와 커뮤니케이션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하였고 이 속에서 인간의 공감은 진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고? 불의 사용을 후대에게 전한다고 생각해 보라. 사람들 간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에너지 제도가 고도화되면 될수록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방법도 고도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치가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 간의 소통이 발달하면 문화는 자연스럽게 발달한다. 예를 들면 저 원시시대를 생각해 보자. 그때는 문자가 없었다. 오로지 구두의 소통이 있었을 뿐이다. 이때 인간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의식은 주로 신화적 의식이다. 무리 중심의 사고이다. 토템적 사고는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지 못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인간의식의 결과이다.

자, 이제 사람들이 문자를 발명하였다 생각하자. 이때 나올 수 있는 것이 소위 경전문화이다. 비로소 인간사회에서 종교문명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문자로 전승 되는 문화에서는 인간의 종교적 의식은 보다 고도화되고 체계화된다.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의 진화는 인간의식의 진화로 연결된다는 것이 리프킨이 설명하는 문명사에서 공감과 에너지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관계이다. 이런 시각을 갖고 공감의 역사(제2부)를 보면 어렵지 않게 리프킨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명방법을 토대로 공감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아의식'을 보자. 공감은 나와 타인의 구별이 전제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인간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아의식은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제6장 '고대의 신학적 사고'를 통해 리프킨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아의식은 공감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렵생활을 통해 인간이 생존하던 시대는 공감의 여명기에 불과했다.

공감은 수렵생활에서 농경문화에 진입해서야 비로소 정상단계에 돌입한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데서 공감이 발견된다고 볼 때 연중 이리저리 돌아다녀야만 하는 수렵생활보다는 농경생활(관개농업사회)을 시작하여 정착문화가 만들어졌을 때 공감능력이 확대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신화적 의식에서 신학적 의식으로 발전하였다고 리프킨은 추정한다.

신화적 의식에서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였지만 관개문명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자연의 힘을 자신의 지배 아래 놓기 시작하였고 이런 가운데서 인간은 다신교, 급기야는 일신교 등의 종교를 만들고 신학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화적 의식에서는 인간은 집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신은 인간 집단인 '우리'와 대화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학적 의식에서는 인간은 비로소 개인적 의미를 갖게 된다. 신은 개인인 '나'와 대화한다. 이 이야기는 십계명을 생각하면 된다. 십계명은 신과 나의 개인적 대화를 의미하지 신이 집단인 '우리'에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신학적 의식에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공감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제3부에서 리프킨은 현대의 세계를 공감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거기에서 엔트로피의 위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 부분은 사실 리프킨의 과거 저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때문에 이 부분은 그의 대표적 저작(엔트로피,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 수소혁명, 유로피안 드림 등)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리프킨은 우선 현대를 공감의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로 묘사한다. 산업혁명 이후 지난 200년은 공감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 과거 어느 때보다 왕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는 소위 호모 우르바누스(도시형 인간)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제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을 누빈다. 언어에 있어서도 세계어가 탄생하는 시점이다. 영어가 바로 그것이다. 가치관도 유사해지기 시작한다. 인권의식에서도 공감은 확대일로에 있다. 보편적 인권이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현대사회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지구촌 상황에서 엔트로피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공감적 감수성은 극대화되었는데 그와 동시에 엔트로피 수치도 극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전 지구의 위기가 찾아왔다.

또 하나 이 시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공감적 가치는 극대화되었지만 그것이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상당한 편차가 있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엔트로피 증가에서 오는 지구적 위기감을 쉽게 느낀다. 그런데 후진국 사람들은 아직 그런 공감을 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생존이 어렵고 선진국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선진국은 지구적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후진국에게 엔트로피를 낮추라고 한다. 한 마디로 지붕 꼭대기까지 올라가더니 뒤 늦게 올라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차는 형국이다. 여기에서 현대의 엔트로피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엔트로피의 위기 대처방안을 내놓다

엔트로피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리프킨의 해결책은 망나적이다. 주로 과거 자신의 주요저작에서 이야기했던 것이 다시 반복된다. 그래서 이 책을 리프킨 저작의 종합판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제러미 리프킨의 책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의 책 <유러피언 드림>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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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만 열거해 보자. 분산자본주의(분산적이고 협업적인 글로벌 경제), 제3차 산업혁명(재생가능한 에너지 시대로 전환하는 새로운 에너지 혁명),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전환(특히 지적재산권의 비재산화), 유로피안 드림으로의 전환(사회전체의 삶의 질 증진), 민간차원의 공동체 참여(NGO의 역할 증대), 생물권 인식(예, 지구를 자체 조절기능이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 등) 등이다.

이미 그가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수소혁명>, <유러피언 드림>에서 이야기했던 말들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 해결책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위와 같은 해결방안은 또 다른 차원의 공감영역으로 보여진다.

리프킨은 여기에서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이들 방안은 엔트로피 위기를 대하는 우리들 모두의 공감능력에서 나오는 해결책이다. 따라서 리프킨이 설명한 공감의 역사에서 발견된 공감의 내용과 위의 공감은 차원을 달리하는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리프킨은 이 책의 핵심주제인 공감과 엔트로피의 역설을 새로운 차원의 공감능력으로 해결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공감'하지 않는 사람에겐 '엔트로피'뿐

이제 책장을 덮으면서 조금 삐딱한 자세로 이 책을 바라보자. 과연 이 책은 리프킨의 최고작이라 할 수 있는가. 비록 대작임이 분명하고, 지식과 교양의 대가답게 종횡무진의 지적향연을 벌리는 리프킨에 대해 찬사를 보내지만 과연 이 책이 그가 그동안 써온 그 많은 문제작을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리프킨이 그동안 말해 온 엔트로피라는 과학적 세계관에 공감이라는 감성적 세계관을 덧붙인 것이다. 엔트로피 세계관은 어쩌면 비관적이다. 종말을 예언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리프킨이 이젠 그 말을 하는 데 조금은 지친 모양이다. 무엇인가, 전환점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 시점에서 그는 과학과는 조금은 먼 감성, '공감'을 선택하여 엔트로피적 세계관에 희망을 선사하였다. 이 책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다.

그러나 공감은 기본적으로 감성인지라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세상만사는 '공감'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공감'한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이 보여준 공감의 축은 리프킨의 감성이지 독자의 감성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남는 것은 리프킨이 종래 말해 온 '엔트로피'라는 과학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은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인권법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변호사이기도 하다.



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경남 옮김, 민음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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