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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공화국 대한민국

오늘은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겠다. 입에 담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만 할 숙제를 말하고자 한다. 낙태다. 이 뜻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노파심에 그 뜻을 이야기해 보자. 낙태란 자연분만기 이전에 태아를 자궁에서 인공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를 말한다.

낙태는 법률상 명백히 범죄행위다. 우리 형법은 낙태를 한 여성도, 이를 도와준 사람(의사)도 모두 처벌한다. 그중에서도 낙태를 시술한 의사에 대한 법정형은 징역형만 있고 벌금형도 없으니 의사가 낙태를 하다가 걸리면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해야 한다.

다만 우리 법은 예외를 인정한다. 그것이 모자보건법이라는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몇 가지 사유(임신이 강간에 의한 경우, 임신 지속이 산모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가 있으면 인공임신중절이라는 이름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낙태공화국이 된 지 오래다. 민주공화국은 좋지만 정말로 만들지 않아도 좋을 공화국 하나를 더 만들고 말았다. 그만큼 낙태가 광범위하게,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낙태 건수 중 90% 이상은 불법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낙태가,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모자보건법이 인정하는 편법낙태(인공임신중절)라는 이름으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범죄행위이다.

낙태가 전국적으로 정확히 어느 정도로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확한 통계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단지 추정할 뿐이다. 2005년 보건복지부가 실태조사를 통해 추정한 건수는 연간 34만 건 정도였다. 하지만 낙태전문가들은 이 수치를 믿지 않는다. 일부 전문가들은 연간 150만 건 이상의 낙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연간 신생아 수가 40만 명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

대한민국에서의 낙태는 법률상 범죄인 것이 분명하나 사실상 처벌되지 않는 이상한 범죄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낙태를 하다 보니 사법당국도 손을 놓고 만 것이다. 낙태는 이미 사실상 사문화된 범죄 유형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가끔 이 낙태죄가 수면 위에 오르는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무분별한 낙태가 사람들의 양심을 흔들기 때문이리라. 이런 눈으로 보면 최근 낙태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낙태라는 사회현상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이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프로 라이프 의사회'라는 단체가 나타나 그동안의 무분별한 낙태현실을 고발하고 낙태를 하는 의사들을 색출하여 고발하는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그런데 '프로 라이프'가 있다면 사회 일각에서는 '프로 초이스'도 존재한다. 이것은 낙태는 본질적으로 여성의 생식에 관한 자기 결정권의 문제라고 하면서 낙태를 무조건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한다. 이렇게 되다 보니 우리 사회도 낙태를 둘러싸고 큰 전선이 만들어진 느낌이다. 마치 미국에서 지난 반세기 이상 동안 진행되어 온 찬반 논쟁을 한국에서 보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오늘 낙태의 본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은 낙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낙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낙태 문제는 생명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오늘 나와 함께 생명을 논해보자.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인 낙태라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 보자.

로널드 드워킨과 <생명의 지배영역>

 

오늘 나는 낙태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 시대의 저명한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을 소개한다. 드워킨은 임마뉴엘 칸트 이후 영문으로 된 법률문헌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법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의 법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이 국내에서도 몇 권 번역되었지만 일반 독자가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명색이 법대 교수이고, 그의 책 대부분이 나의 전공과 유관함에도, 나는 드워킨의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기는 시도했지만 이해에 성공한 적이 없다.

 

그러다가 2년 전 내가 담당하는 인권법 수업을 위해 열일 제치고 <생명의 지배영역, Life's Dominion>(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대 생명의료법연구소 발간)을 읽게 되었다. 읽어 내려가는 순간 이 책이 종래의 번역서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래의 책이 드워킨의 법철학의 내용을 보여주는 순수한 이론서임에 반해 이 책은 그의 법철학을 현실에 응용한 실용 철학서였다. 낙태와 안락사라는 사회적 문제의 본질을 번득이는 법철학적 논리로 정리해 나가는 것이 여간 신선해 보이질 않았다.

 

번역의 수준 또한 가독성을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드디어 나는 드워킨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왜 그가 세계적 철학자로 그토록 대접받고 있는지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생명의 지배영역>은 낙태와 안락사를 법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책이다. 비록 전문 학술서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철학자만을 위한 책이 아닌 것처럼 이 책은 소수의 전공자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칸트의 철학서에 비하면 읽기가 훨씬 수월하다. 이글이 드워킨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다만, 지면의 한계로 드워킨이 다룬 두 가지 문제(낙태와 안락사) 중 오늘의 주제인 낙태에 한정해 소개하고자 한다.

 

로널드 드워킨은 누구인가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1931년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과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미국 사법사에서 연방 대법관이 아닌 법률가로서 가장 저명한 판사였던 러니드 핸드(Learned Hand) 밑에서 로클럭 생활을 했다.

 

그 뒤 잠시 로펌에서 일했지만 1962년부터 예일로스쿨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법철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옥스퍼드 대학과 뉴욕대(NYU)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뉴욕대와 런던대(UCL)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영미권의 법철학 및 정치철학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법철학은 주류 법철학인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넘어서서 법이 도덕과 관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법은 정치도덕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권 몰락과 함께 천대받았던 평등의 이념을 새롭게 해석해 자유주의적 정치이상으로 다시 살려 놓았다. 이런 공로로 그는 2007년 인문사회과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홀버그상을 받았다.

 

그는 이 글에서 소개한 <생명의 지배영역> 외에도 다수의 저서를 출간하였는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의 제국>(장영민 옮김), <자유주의적 평등>(염수균 옮김), <법과 권리>(염수균 옮김) 등은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낙태는 인간을 죽이는 행위인가

 

드워킨은 우선 이제까지의 낙태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첫 번째 논쟁은 '태아가 인간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 관점에서 낙태를 반대하면, 태아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므로 낙태는 인간의 생명권에서 파생된 문제가 된다. 드워킨은 이러한 낙태 반대를 '파생된 반대'라고 부른다. 그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태아가 처음부터 자신 스스로의 이해관계 또는 이익을 가진 생명체이며 이 이익은 살아남을 이익을 포함하고, 모든 인간들이 이와 같은 기초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태아도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이 권리는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도 포함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낙태는 나쁜 것이다. 낙태는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다 자란 어른을 죽이는 것이 그 사람의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보통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주장을 낙태에 대한 '파생된 반대(derivative objection)'라고 부를 것인데, 이 주장은 모든 인간이 갖는 권익이 존재하고 태아도 이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 전제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12쪽)

 

이와 같은 견해는 낙태에 관해 보수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태아는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말로 대립각을 세운다. 이들에겐 생명권이란 인간으로 출생한 이후에나 갖는 권리지 어머니 복중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낙태를 인간 생명권이란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드워킨은 이 논쟁은 낙태에 대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선, 보수주의자에게도 낙태를 허용하는 데 크게 반대하지 않는 때가 있다. 예컨대, 강간에 의해 임신이 된 경우 보수주의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낙태를 허용한다. 그런데 이것은 태아가 인간이라고 보는 것과는 정면으로 모순이다. 태아는 강간과 무관한 별도의 생명체요, 별도의 인간인데 도대체 어떤 도덕적 이유로 그의 생명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태아에게도 인간 생명권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데 아무런 도덕적 논리를 제시하지 못한 채 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논리모순이라는 것이다.

 

또한 보수주의자는 산모의 건강이 위험할 경우도 낙태를 허용하는데 그 경우도 산모의 생명이 새로운 인간생명체인 태아의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도덕적 근거는 없다. 이렇듯 낙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어떤 경우도 태아가 인간이라는 입장에서는 모순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태아가 인간인가 아닌가는 자유주의자의 낙태 허용론에도 큰 논거가 될 수 없다고 드워킨은 진단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유주의자라 해도 아무 때나 낙태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라 해서 낙태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대부분 낙태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더욱 임신 후반기의 낙태는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자유주의자라 할지라도 낙태가 그저 편도선 수술 정도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태아가 인간이 아니라고 믿는다고 해도 생명체인 태아를 없애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이라는 생각은 자유주의자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입장차가 낙태논쟁의 핵심

 

그렇다면 낙태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드워킨은 그 핵심이 인간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입장차라고 주장한다. 그는 낙태반대를 이 입장에서 하는 것을 '독립적 반대'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인간생명은 내재적이고 선천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인간생명은 그 스스로 신성하며 인간생명의 신성성은 생물학적 생명이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 (이 주장에 따르면) 낙태는 원칙적으로 나쁜데 생명의 단계와 형태가 어찌되었건 인간생명의 내재적 가치, 즉 신성성을 무시하고 모독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주장을 낙태에 대한 '독립적 반대(detached objection)'이라고 부를 것인데, 이 주장은 특정한 권익의 존재를 전제하거나 그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12-13쪽)

 

즉, 드워킨이 보는 낙태논쟁의 핵심은 낙태는 태아가 인간으로서 생명권의 주체로서 나오는 파생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생명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 혹은 신성성, 그 자체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 우리가 좀더 면밀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단체나 개인인, 여성주의자나 가톨릭이나 모두-에게 있어 낙태에 관한 논쟁이 두 번째 종류의 논쟁(독립적 반대)의 논쟁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어떻게 그리고 왜 인간생명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가치가 낙태에 관한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결정들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27쪽)

 

낙태에 대해 보수적 입장을 갖든 자유주의적 입장을 갖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명백하게 혹은 직관적으로 인간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객관적이고 독립된 인격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그 공유된 생각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있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생명 신성성의 근거

 

그렇다면 문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인간생명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서 어떤 입장차를 갖느냐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내재적 가치, 즉 인간생명의 신성성이 어떤 근거를 통해 확보되는 지가 규명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드워킨의 설명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인간생명의 신성성의 근거로 '자연적 창조'와 '인위적 창조', 두 가지를 제시한다. 자연적 창조는 한 마디로 신(혹은 자연)에 의한 창조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닌 신의 선물이자 기적이다. 우리가 신을 신뢰하는 한 자연적 창조물에 대하여 경외하는 것은 인간의 신에 대한 의무라는 것이다. 태아는 바로 그런 존재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기적과 같은 존재, 바로 그것이 태아라는 말이다.

 

반면 인위적 창조는 우리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서 얻어진다. 생명의 잉태에서부터 인간은 그것을 의도하고 준비한다. 그런 다음 잉태된 다음에는 그것을 소중히 다루며 뱃속에서 키운 다음 출산하고 그 생명체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양육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들에 의한 창조의 결과다. 따라서 인위적 창조에서 그 가치의 정도는 인간 노력의 정도와 관련이 있다.

 

인간생명이 그 무엇보다 존엄하다는 것은 결국 위와 같은 자연적 창조와 인위적 창조의 결합으로써 만들어진 인간 생명체 대해 우리 인간들이 내재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낙태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 드워킨의 주장이다.

 

인간생명의 신성성에 대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입장차

 

드워킨은 인간생명의 내재적 가치, 곧 신성성은 자연적 창조와 인위적 창조에 의해 결정되지만 문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신성성이 침해되는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즉 좌절의 정도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낙태는 내재적 가치를 가진 생명의 폐기를 동반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나쁜 일이며 수치이다. 이런 이유로 보수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낙태는 도덕적으로 항상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경우는 더 나쁘고 또 어떤 경우는 덜 나쁘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낙태에 대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그 나쁨의 정도(나쁘다고 보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덜 나쁘다고 보면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다)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것은 이런 질문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왜 젊은 여성이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것을 노년의 남성이 죽는 것보다 더 안타까워할까. 생명의 신성성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드워킨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좌절의 정도는 죽음이 언제 오느냐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죽음을 맞은 나이와 비극성의 정도 사이의 관계를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비극에 대한 인식은 출생시점에서 올라가기 시작해서 늦은 아동기나 이른 청소년기에 이른 후에 평평하게 진행하여 중년 초기의 어느 시점을 지난 후에는 극도로 노후한 시점을 향해 다시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다.(95쪽)

 

이제 드워킨의 생명 신성성에 대한 입장을 설명함에 있어 정점에 달한 느낌이다. 그는 생명의 신성성이 침해될 때(낙태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것은 창조력(자연적 창조력과 인위적 창조력)의 침해로 보며, 침해되는 창조력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두 진영의 좌절의 정도가 다르다고 설명한다. 즉, 보수주의적 입장은 자연적 창조력에 대한 좌절을 인위적 창조력에 대한 좌절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시한다. 때문에 이 입장에서는 낙태는 원칙적으로 금지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적 입장은 인간생명에 투여된 자연적 창조력을 좌절시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여기에서는 인위적 창조력을 좌절시키는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적어도 임신 초기의 낙태는 원칙적으로 산모의 선택의 문제가 될 뿐이다.

 

… 낙태에 대한 심각한 견해차는 개별 인간생명의 신성성을 수립하는 데에 투여된 인위적 창조력과 자연적 창조력의 상대적인 도덕적 중요성에 대한 견해차를 반영하는 것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 다양한 낙태관들을 두 종류의 좌절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견해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까지 나열한 것을 중심으로 순서를 정할 수 있다. 즉 한 극단에는 생물학적 창조력의 좌절을 모든 인위적 투자의 좌절보다 더욱 나쁜 것으로 평가하는 입장이 있고, 조금 더 온건하고 복잡하게 조절된 입장들을 거쳐 다른 극단에는 인간생명에 투여된 생물학적 창조력을 좌절시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인위적 창조력을 좌절시키는 것이 항상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있다.(100쪽)

 

인간생명의 내재적 가치는 종교의 문제

 

설명을 쉽게 해보려 했지만 독자들이 얼마나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까지 어렵게라도 이해했다면 이제 드워킨 이해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야겠다.

 

결국 드워킨은, 낙태는 생명의 신성성의 가치판단, 그중에서도 자연적 창조력에 대한 입장이 낙태의 금지와 허용을 나누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교적 문제다. 자연적 창조력 운운은 결국 인간을 초월한 절대적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적 가치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태를 근원적으로 불용하는 것은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드워킨은 낙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도한다. '낙태의 금지여부는 종교적 문제이다. 따라서 국가가 낙태를 법으로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교분리의 헌법 원칙상 이는 허용될 수 없다.' 드워킨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는 국가는 자신의 낙태관을 의식적으로 종교적 믿음에 결부시키는 여성에게 하는 만큼, 위와 같은 여성의 자유로운 종교행사권도 박탈한다. … 낙태를 금지하는 정부는 인간생명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귀의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하나의 입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며 제1수정조항은 이를 금지한다.(176쪽)

 

다만 드워킨은 정부가 낙태를 근본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나 심대한 도덕적 중요성을 가진 낙태문제에 대하여 국민이 좀 더 책임 있는 판단을 하도록 하는 조치내에서 허용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낙태를 하기 전에 국가가 낙태의 위험성을 교육하고, 일정 기간 숙려할 것을 요구하는 그런 정책을 쓰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드워킨의 입장으로 본 로이 대 웨이드 판결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소개해야겠다. 판결 이야기다. 미국 사법사의 한 획을 긋는 판결 중 하나가 1972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판결한 로이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이다.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낙태를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역사적 결단을 선언했다. 이 판결의 간단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산모가 헌법상 가지고 있는 생식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확인하였고 주정부들이 단순히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낙태를 금지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둘째, 주정부들은 그러나 낙태를 규제할 합법적인 공익적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셋째, 그 권리와 그 공익적 목표를 조화시킬 세부적인 방식을 고안하였다. 그 방식이란 거칠게 표현하면 주정부는 임신 제1삼분기에는 어떤 이유로도 낙태를 금지할 수 없고, 제2삼분기에는 산모건강을 목표로만 낙태를 규제할 수 있고, 제3분기, 즉 태아가 자생력을 가진 후에는 낙태를 완전히 금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179쪽)

 

위 판결의 핵심은 임신 기간별로 태아에 대한 국가의 관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에서 본 드워킨의 낙태관으로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임신 초기의 낙태가 가능한 것은 자연적 창조력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간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산모의 자기 결정권에 맡겨야 할 시기다. 결코 국가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신 초반기가 지나면 자연적 창조력에 인위적 창조력이 더해지는 시기로 넘어가고 이때부터는 태아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낙태로 인한) 모독은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기가 되면 우선 국가는 산모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을 진지하게 하도록 도덕적 환경을 유지할 공익적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나아가 임신 3분기(임신 6개월 이후) 이후가 되면 이미 태아는 자생력을 획득하는 시기(이때는 조기출산도 가능하다)에 들어간다. 이 시기가 되면 국가는 사회 방어적 차원에서 낙태를 금지시킬 수 있다. 만일 이 시기에도 낙태를 허용한다면 국가는 자연적 창조력과 인위적 창조력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인간생명의 가치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그저 방관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국가는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낙태 문제에 대하여

 

오늘 나는 우리 낙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철학을 제공하기 위해 세계적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의 <생명의 지배영역>을 파헤쳤다. 나의 능력의 한계로 제대로 설명이 되었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해 보면 이 책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낙태 논쟁은 최근 미국의 '프로 라이프' 대 '프로 초이스'와 거의 같은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형법상의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상의 인공임신중절의 예외로서 이해되는 낙태 논쟁은 이제 졸업을 해야 할 때다. 낙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기해 우리의 법제를 새로이 재건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하루에도 수천 건씩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낙태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낙태를 하는 산모나 그를 돕는 의사들에게 낙태죄의 굴레를 씌우겠는가. 한국에서도 생명에 관한 진지한 철학이 활발히 논의되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수준의 법률이 하루빨리 제정되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박찬운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인권법 교수이자 변호사이다.


생명의 지배영역

로널드 드워킨 지음, 박경신 외 옮김, 로도스(2014)


태그:#낙태, #생명의 지배영역, #로널드 드워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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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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