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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에 들어서면 행복해진다고 말하며 웃어 보이는 카헬.
 대장간에 들어서면 행복해진다고 말하며 웃어 보이는 카헬.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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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여름, 카헬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고3으로 진학하기 직전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언덕 위의 별장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바닷가로 나가 조깅을 한바탕 하고 들어와 노자를 읽기도 하고 만화책을 들춰보기도 했다.

오후에는 내내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돌아와 식구들을 위해 직접 저녁을 준비하곤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크레이프 요리의 대가였고, 디저트도 제법 만들 줄 알았다. 밤에는 동네 청소년들이 모이는 클럽에 가서 기타도 치고 춤도 추며 놀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자기 식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부모는 그의 일상에 간섭하지 않았다. 수험생을 둔 집안의 긴장감 따위는 한줄기도 스쳐가지 않았던 그 집에서 보낸 일 주일 동안 바지런 떨며 인파 속에 떠밀려 다니던 한국식 휴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박진감 넘치는 바캉스에 비하면, 권태를 견디는 법이라도 익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나른한 휴식, 특히 이 '띵가띵가' 놀기만 하는 고3의 자태에 좀처럼 적응할 수 없었던 나. 급기야 어리석은 질문의 돌멩이를 던져 보았다.

"그런데, 넌 공부는 안 하니?"
"방학은 쉬라고 있는 거예요."


한 수 가르쳐 주는 듯한 여유있는 미소와 함께 자신만만한 그의 대답이 날아왔다(이 나라의 애들은 세 살짜리한테 물어봐도 항상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꼿꼿한 자아를 등에다 심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내친 김에 두 번째 돌멩이까지 던져보았다.

"그래도 방학 동안 한 글자도 안 보면 까먹지 않니?"
"괜찮아요. 다른 애들도 다 쉬어요. 개학하고 나서 하면 돼요. 처음에는 좀 낯설지만 금방 다 회복해요."


그럴 테지. 네 말이 맞다. 인간이 방학을, 바캉스를 만든 까닭은 인간에게 일만큼이나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30년 전, 5주간의 유급 휴가의 위업을 달성하고, 마치 자신들이 달성한 위업이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전투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바캉스를 즐긴다. 억울했다. 그리고 이렇게 고3을 보낸 카헬의 10년 뒤가 궁금했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왜 대장장이가 되려 하는가

직접 만든 도끼로 망치의 손잡이를 다듬는 카헬의 모습.
 직접 만든 도끼로 망치의 손잡이를 다듬는 카헬의 모습.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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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지났다. 그동안 간간히 그의 소식을 들었다. 부르타뉴의 해변에서 보았던 탄탄한 몸의 햇살 같던 소년은 그사이 콤피엔느엔지니어대학(UTC)에 들어갔고, 캐나다 대학으로 교환학생,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렌느(Rennes)에 있는 국립과학연구소(CNR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순조럽게 흘러간 카헬의 청춘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그가 불현듯 대장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창고에 대장간을 장만했고, 이미 어지간한 도구를 직접 만들어서 쓰고 있었다. 어쩌면 다니던 연구소마저 그만둘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시시각각으로 급격히 정상(?) 궤도를 이탈해가는 카헬.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탄탄대로를 여유롭게 달리다가 갑자기 급커브를 틀더니 저 깊은 원시의 숲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리는 이 놀라운 급변침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그가 살고 있는 렌느로 향했다.

- 지금 몇 살인가?
"스물여섯 살."

- 지금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해 달라.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인공위성에 찍힌 사진을 통해 프랑스의 자연지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결정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이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기도 하다."

- 엔지니어대학에서 그 분야를 전공했나?
"그렇다. 이 분야가 그나마 지자체나 국가단체를 위해서 일할 가능성이 높아서 선택했다. 고등학생 때까지 내가 배운 과학은 순수한 과학 그 자체였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결국 내가 입문한 엔지니어가 되는 공부는 과학을 기업의 이해를 위해 사용하는 일이었다. 기업가의 배를 불리는 데 봉사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고 인공위성을 통해 지구를 관찰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이 분야를 택했다." 

- 하는 일은 맘에 드는가?
"분명 재미있을 수 있는 일인데 지금의 방식으로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 연구소 소장은 과학자였던 사람인데 지금은 로비하고 정치하기에 바쁘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콩밭에 가 있고, 우리의 연구를 자신을 포장하는 데 이용하려고만 한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효율적인 연구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고 비용을 줄이는 방법만 찾으려 한다. 그러니 일하면서 신이 나지 않을 수밖에. 그나마 근무 조건은 좋은 편이다. 출퇴근 시간 자유롭고 연 11주의 유급휴가가 있어서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여러 가지 할 수 있다."

- 그 여유 시간에 대장장이 일을 하게 됐나?
"그런 셈이다."

- 그런데 왜 갑자기 '대장장이'인가?
"음… 모든 건 3년 전 캐나다에 가면서 시작됐다. 대학 4년을 마치기 전에 모든 학생들은 1년간 해외의 다른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돌아와야 한다. 2011년, 캐나다에서 1년간 지내는 동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부모님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자 했기 때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돈을 주고 사는 대신 버려진 것들을 재활용하거나 혹은 직접 만들어서 해결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버려진 의자를 가져와 고쳐 쓰고, 버려진 자전거도 주워다가 고쳐서 탔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쓸 만한 많은 물건들이 버려진다는 사실에 눈 떴고, 최소한의 기술만 가지고도 버려지는 많은 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 돈은 벌고, 자신의 직업을 벗어나는 모든 영역에 대해서는 한없이 무능해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사실이 어리석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과연 원시인에 비해 더 유능하고 현명한 인간일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면서 나는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자립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삶으로 서서히 전환하게 됐다."

소비 권하는 사회에 저항하다 

자신이 만든 대장간에서 일하는 카헬. 무척 진지하다.
 자신이 만든 대장간에서 일하는 카헬. 무척 진지하다.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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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 역시 뭔가를 직접 손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끓어 넘칠 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절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였다. 그 무엇도 사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 들고 갈 가방도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어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내 손으로 많은 것들을 직접 해결하는 삶의 방식과 직업 자체를 아예 대장장이로 전환하겠다는 생각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 보인다.
"물론이다. 약 3~4년 전부터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철학처럼 명확하게 내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사고를 겪고 나서부터다."

- 무슨 사고?
"3년 전 유도를 하다가 머리를 다쳤다. 115kg이나 되는 거구의 청년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사고로 척수를 다쳤다. 바로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검진을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고, 의사는 아무런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있고부터 나는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내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말할 수 없이 피곤해서 이 상황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같은 말뿐이었다. "당신의 증세는 우울증인데, 그것은 당신이 겪은 사고와는 무관하다"면서 우울증 약만을 처방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학생들은 기업 연수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했다. 나는 연수를 위한 면접을 보던 중에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지금 난 이 모든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나를 내버려 둬요."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사실이었다.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 지금은 멀쩡해 보인다.
"거의 정상을 되찾았다. 날마다 죽을 생각만 하면서 미쳐가고 있을 때 부모님이 의사 라블랑쉬에게 찾아가보자고 권하셨다. 그는 내과의사면서 동시에 정신과의사였다. 그는 대체의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의료보험관리공단에서 취급하지 않는 대체의학과 약들을 많이 사용했다. 번번이 그들과 갈등이 빚어지자 그는 의료보험관리공단을 탈퇴하고 제도권 밖의 의사가 돼버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가 매우 실력있고 정직하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는 정신과 신체의 문제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의사였기에 나는 그에게 갔다.

라블랑쉬는 단번에 내 사고가 내 우울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 사고로 뇌신경이 손상을 입었고, 잠을 잘 때면 쉬어야 할 뇌신경들이 완전히 살아 움직이면서 마치 밤새 켜놓은 컴퓨터가 가열돼 뜨거워지는 것처럼 뇌가 쉴 새 없이 돌아가서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더 피곤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악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죽음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했다.

그가 내게 내려준 첫 번째 처방은 정골사(Osteopathe)를 찾아가는 것과 해초로 만든 약이었다. 일흔이 넘은 정골사 역시 제도권 밖의 의사였다. 그는 내가 그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내 목덜미 위쪽에 손을 댔고, 마치 오래 전부터 내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두 사람의 치료를 통해 나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에게 마치 20여 년간 내가 지어왔던 집이 송두리째 불타버린 것과도 같았다."

- 어째서? 비교적 금방 회복된 경우가 아닌가?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그런데 나는 이전까지 신체적으로 완전히 건강하고, 내가 건너뛸 수 없는 역경은 없으며, 내가 원하는 일은 그 무엇이든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유도하다가 부딪힌 그 단순한 사고로 나는 잠시나마 오직 죽기만을 열망하는 시간을 겪었고, 거기서 날 구해준 사람들은 비제도권의 의사였다. 이 사회가 내쫓은 사람들인 것이다.

내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이 세상의 모든 겉모습들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내 삶이 잠시라도 헛된 일에 소모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본의 논리로만 굴러가는 이 세상의 어리석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무것도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직 돈을 내고 뭔가를 사서 소모한다는 것, 그리고 또 뭔가를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델이 역겨워졌다. 대형 슈퍼마켓에 가서 산더미처럼 뭔가를 사서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들어졌다."

- 대장장이로의 전환을 꿈꾸게 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인가?
"사실 그 꿈을 꾸게 된 건 아주 갑작스런 계기에서였다. 물론 사고 이후 일어난 가치관의 변화가 그 바탕에 깔려 있긴 하지만 말이다. 첫 직장인 렌느의 연구소로 이주 오게 되면서 나는 캐나다에서 지낼 때처럼 모든 것을 만들어 쓰고자 했다. 당연히 좋은 연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좋은 연장을 만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이 붙어 있는 대충 만든 연장들을 피해 말 잘 듣는 연장을 갖는 꿈을 꾸게 됐고, 그걸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어져서 그 기술을 가르쳐주는 데가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베트남 출신의 대장장이가 하는 연수 프로그램을 찾아냈다. 나는 1주일간 그의 집에 가서 먹고 자면서 고철을 두드려 연장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 칼이 내가 처음 만든 연장이다. 30년을 달리고 폐차 처분된 트럭으로 만들었다. 내 스승이 만드는 모든 연장은 폐기 처분된 고철을 이용해서 만든다. 처음 불 앞에 서서 철을 녹여내고, 그것으로 내가 원하는 미끈한 연장을 만들어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평생하고 싶은 일을 찾은 기분이었다. 파랗게 번득이는 불꽃 앞에만 서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대장장이의 신이라도 된 듯,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 흘렀다.

마치 정신없이 연애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나는 이 일이 너무 좋아서 연구소에서 일하다가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진다. 내 스승도 나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 다음 휴가 때 그는 나를 불러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 옆에서 보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내 대장간을 차렸다. 물론 지금은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만들 뿐이지만 곧 다른 삶들을 위해서도 연장을 만들 것이다."

- 당신의 스승은 대장장이 일이 생업인가?
"그렇다. 그가 만드는 연장은 품질이 좋기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주문을 받는다. 주로 칼인데, 도끼, 망치, 가위 이런 것들도 만든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씩 연수생을 받아서 가르친다. 한 번에 딱 한 명만 가르치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해서 배울 수 있다. 그 연수를 받고 나면 직접 연장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 나무집을 지었던 적도 있지 않나?
"혼자서 지은 것은 아니고 나무집을 짓는 데 참여해서 함께 지었다. 대장장이 일로 생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연마하게 되면 땅을 사서 거기에 집과 대장간을 함께 내 손으로 지어서 살 것이다.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해서, 100퍼센트 에너지를 자력으로 생산해내는 그런 집으로 지을 생각이다."

자본의 하수인, 과학... 저항할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 

오래 되어 폐기 처분된 트럭으로 만든 카헬의 첫 작품. 부엌칼.
 오래 되어 폐기 처분된 트럭으로 만든 카헬의 첫 작품. 부엌칼.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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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지금의 직업과는 절연할 생각인가?
"아마도. 내가 엔지니어대학에서 배운 모든 지식은 사실 매우 유용한 것들이다. 나는 매일매일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드는데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을 활용한다. 그러나 현재 연구소에서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연구뿐 아니라 다른 많은 연구들이 과학을 이용해 결국 더 많은 자본가의 이익을 창출해내는 데 이용된다. 더구나 연구소의 운용방식 자체도 자본주의적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곳에서 과학자들은 기업가나 정부를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정치가로 변신하지 않는 과학자는 도태되고, 과학을 잊고 출세의 길에 나선 자들에게만 힘이 주어진다. 환멸이 크다."

- 굳이 렌느 근교의 시골 마을로 이주한 이유는?
"일단 그쪽에 일자리가 났던 게 첫 번째 이유고, 또 언제나 부르타뉴 지방을 좋아했다. 렌느는 부르타뉴에 있는 도시고, 근교에는 싼값에 임대할 수 있는 농가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널찍한 농가를 빌려서 내 삶의 방식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걸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친구들이 자주 와서 이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넓은 집을 구했다. 집이 넓지만(150제곱미터) 난방비는 따로 들지 않는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버리는 나무판자들을 주워다 연료로 때는 벽난로 하나로도 충분히 따뜻하다.

연구소까지는 차로 20분 거리다. 대중교통 수단이 없어서 22년 된 르노 자동차를 500유로 주고 구입했는데 사자마자 덜덜거리길래 차 밑으로 들어가 2주 동안 모터를 다 분해했다. 덕분에 차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하게 됐다. 이제 그 어떤 고장이 나도 내 손으로 고칠 수 있다. 이게 신형 차였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모터가 대단히 복잡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구형 차는 아주 단순하다. 그래서 고장도 덜하고 고치기도 쉽다."

- 농사를 직접 짓기도 하나?
"그러고 싶다. 아직은 그러지 못한다. 대신 먹는 것들은 마을의 농부들이 일 주일에 한 번씩 장에 내다파는 농산물을 사 먹는다. 연구소에도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 당신의 대장간을 보고 친구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나?
"대학 시절의 친구들이 자주 집에 들른다. 내 대장간도 구경하고, 거기서 만든 물건들로 나와 내 여자 친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도 영향을 받는 눈치다. 대학을 졸업한 지 2년 정도 됐는데, 친한 친구들 가운데 절반은 벌써 현재의 제도가 엔지니어들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나머지 절반은 제도가 원하는 인간형으로 더욱 급속히 자신을 바꿔가고 있다."

- 이를 테면?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던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목수가 되기로 했다고 얼마 전 나에게 알려왔다. 대기업 연구소를 다니던 다른 친구 역시 초콜릿제과 기술자가 되기로 했다면서 연구소를 그만두고 지금은 초콜릿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한 친구 커플은 나란히 사표를 내고 곧 호주로 떠난다. 두 사람 모두 높은 연봉을 받지만 너무 바빠서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던 커플이다. 먼저 짚으로 집을 짓는 연수를 받기로 했다는데,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찾으려 한다고 말하며 떠났다.

그런가 하면, 이제 과학자의 논리를 가볍게 떨쳐 버리고 마케팅의 원칙에 입각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친구들도 보인다. 그들과는 거의 이야기하게 되지 않는다. 멀리서 소식을 전해들을 뿐이다."

- 친구들이 찾은 다른 길들이 모두 1차적인 제조업 혹은 수공업에 해당하는 직종이란 사실이 재미있다.
"나는 사고를 통해서 급격히 깨달았지만,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소비사회의 허무를 깨닫게 될 거라고 믿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더 생산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이미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생산돼 있다. 5년 안에 고장 나도록 설계되는 가전제품, 6개월 안에 다른 옷을 사도록 만들어지는 허름한 천들.

이제 자본주의 사회는 엔지니어들에게 바로 이런 기술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낭비하도록 하는 그런 기술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산된 물건들을 자신의 특정한 직업을 통해 번 돈으로 사들인다. 집 안을 채우는 모든 물건을 돈으로 사며,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그 돈으로 해결하는 인간은 실제로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들인가."

- 부모님은 당신의 이러한 삶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내가 지금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데는 부모님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아버지는 엔지니어로, 어머니는 수학교사로 사셨고 별다른 일탈을 시도하지 않으셨지만 두 분 다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능하셨고, 그 무엇도 낭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대장간을 꾸리고 내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하며 살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숲에서 사는 법', '내 집 만들기' 같은 책들을 건네주셨고, 아버지는 온갖 종류의 나사와 공구들이 들어 있는 상자를 선물로 주셨다. 두 분은 언제나처럼 내 선택을 지지해주셨다."

우리에게 돈이란, 소비란 무엇인가 

침대 옆에 두는 탁자. 슈퍼마켓에서 버리는 나무상자들을 주워 카헬이 직접 만들었다.
 침대 옆에 두는 탁자. 슈퍼마켓에서 버리는 나무상자들을 주워 카헬이 직접 만들었다.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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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럽다. 당신 같은 선택을 하는 젊은이들보다 그런 아들을 그토록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부모를 만나는 것은 더 힘든 일일 것 같다. 여행도 많이 했던 것으로 안다.
"많이 한 것은 아니고, 한 번 하면 긴 시간을 했다. 방학 때마다 도보여행을 떠났다. 일단 비행기로 이동한 다음 한 달 정도 배낭을 메고 걸어서 여행했다. 코르시카 섬, 동유럽, 스코틀랜드, 아이슬란드…."

- 그 여행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물론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자연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들이 손으로 직접 해결해내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은 자본에 덜 종속돼 있었고, 더 많은 지식들을 손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연을 만나는 것이었다. 특히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는 하루 종일 걸어도 분화구만 만나는 날들이 허다했다. 광활한 자연 속에서 나를 느끼는 것은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떨칠 수 있게 해준다. 밤에 텐트를 치기 위해 야영장에 가면 비로소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소비 자본주의라는 독트린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 호텔이나 유스호스텔에 머문 적은 한 번도 없었나?
"없다. 한 번도."

-당신이 만든 칼을 언제쯤 살 수 있나?
"잘하면 내년쯤. 아니면 2년 뒤. 연말에 내년도 연구원 계약 연장을 위한 협상을 한다. 1년 더 할지, 아니면 올해까지만 하고 때려치울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좀더 실력을 연마한 뒤 전업할 생각이지만 내 맘이 떠난 것을 연구소가 알고 계약연장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 그런데 당신을 구한 그 의사들은 제도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의료보험에 적용되지 않았고, 그래서 비싼 돈을 내고 진료를 받아야 했다. 당신의 부모가 그 돈을 내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돈의 위력이란 걸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정말 좋은 연장을 만들어서 내 연장을 그 의사에게 치료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고 싶다.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자본의 증식을 위해 불필요한 것들은 무한정으로 생산해내는 지금의 시스템에 대항한 공동체가 서서히 구축되지 않을까. 내가 그런 식의 사회에 염증을 내고 내 주변 사람들이 서서히 변화하는 것처럼,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그런 공동체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리라 본다."

고3 때보다 5cm가 더 자라 그의 키는 지금 195cm다. 거인처럼 한참 올려다 봐야 하는 카헬은 내가 찾아간 날도 탁월한 솜씨로 크레이프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다음날엔 바닷가로 가서 굴을 따 먹었고, 돌아오는 길엔 밤나무 숲에 가서 떨어진 밤을 주워왔다. 벽난로 불에 내가 재워온 돼지갈비를 구워 먹은 다음에 그는 나무를 마찰해 불을 만드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심지어 성냥 없이 불을 만들어 내던, 우리가 원시인이라 부르던 지혜로운 인간들이 터득한 지식들을 하나 하나 터득하고 손끝에서 실현해가고 있었다. 그를 좌파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큰 보폭으로, 시스템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나가는 저 청년의 또 다른 10년 후가 몹시 궁금해진다.


태그:#목수정, #생활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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