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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 겨울풍경
 산내 겨울풍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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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술은 만백성의 피요,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이몽룡의 시를 읽은 호방이 벌벌 떨었다. 탐관오리 변학도의 생일잔치 자리였다.

"오메! 이를 어쩌나... 사또, 우리 민박집에 갑자기 단체 손님이 온다네요. 저는 이만..."

호방이 주절대며 줄행랑을 쳤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도 몸을 비비 꼬며 줄행랑을 놓았다.

"에고, 배야! 갑자기 뭔 변고람... 똥이, 윽... 저는 뒷간에 좀..."

객석에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바야흐로 극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암행어사가 출두할 차례였다. 그런데 이몽룡이 무대 위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무슨 문제가 생겨 칸막이 뒤에서 늑장인지. 장구재비가 장구채를 빠르게 내리쳤다. 급기야 공연 진행자 역인 각설이가 나와 이몽룡의 등장을 종용했다.

"빨리 안 나오고 뭐 하나? 어허, 싸게 싸게 나오시오!"

마패를 잃어버렸나, 어사화가 부서졌나, 이몽룡은 감감무소식. 그러나 관객은 극이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지연이 되든 말든... '산내 놀이단'의 '춘향전' 무대였다. 산내 초등학교 체육관이 어르신들로 꽉 찼다.

산내 놀이단의 '작당'

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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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연하는 배우들
 열연하는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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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지리산 자락 남원시 산내면에서 '산내 놀이단'을 만든다는 풍문이 지난여름에 돌았다. 그 후로 나는 '산내마을 신문'에 실리는 놀이단의 기사를 눈여겨보았다.

산내면은 지리산 북쪽 자락에 높은 산들이 사방 둥글게 둘러싼 분지다. 풍수지리로 '금빛 찬란한 닭이 알을 품었다'는 이른바, 금계포란(金鷄抱卵). 명당이라 한다. 그 분지 안에 16개 마을이 있다. 현재 3천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고, 그 중 300여 명이 귀촌, 귀농인이다.

우리 마을은 분지의 남쪽, 바래봉 자락에 있다. 해발 400여 미터 고지에. 이런 산골에서 원주민, 외지인 가릴 것 없이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공연을 모의한단다. 추진위원장 주상용씨와 9명의 위원회원들, 어찌어찌 꼬인 놀이단 10여 명이 함께 작당해서.

나도 거기 슬쩍 껴볼까, 싶었다. 그 마당에서라면 톡톡히 한몫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서서 잘난 척하기 좋은 기회였다. 도시에서 먹물깨나 먹었다는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지역이라 해도, 그 방면에 나만한 전문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대학로 연극판을 수십 년 얼쩡거린 사람 아닌가. 대학 때 연극영화과 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연기를 배워보겠다고 호흡, 발성, 움직임 등 신체훈련을 받은 경험도 있다.

연극학개론, 세계연극사, 브레이트 연극이론, 스타니슬랍스키, 메소드, 등등의 이론서들을 책장이 닳도록 들춰봤다. 연출을 한답시고 깝죽댔고, 희곡도 썼다.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학로 공연장을 기웃거리며 배우나 연출들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신랄하게 작품과 연기를 분석했다. '강독'이라 불릴 정도로.

내 눈높이로 보면 산골 마을의 공연단이라, 오합지졸일 게 뻔했다. 그렇든 저렇든 어쩌다 보니 그쪽 일은 잊은 채,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오합지졸이라 예상했던 산골 마을 공연, 반전이었다

열연하는 배우들
 열연하는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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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이었다. 농협 앞에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걸 봤다. '동남아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산내놀이단...' 춘향전을 네 마당으로 나눠, 2주일에 한 마당씩, 한 달 동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마당극을 펼친단다. 지난 2014년 12월 20일부터 1월 31일 까지였다. 산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동장군이 기승대는 한겨울 산골에 훈풍이 불었다. 나는 세 번째 마당을 구경했고, 마지막 네 번째 마당을 구경 왔다.

"암행어사 출두요!"

마침내 이몽룡이 어사화를 쓰고 등장했다. 극은 멈출 듯, 말듯 흘러갔다. 지난번 공연에서도 춘향이 옥중 장면에서 월매가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에고, 불쌍한 년, 내가 니 때문에 정신이 나가 대사를 까먹었다. 니가 앞에 했던 대사를 다시 쳐봐라."

또 극 중에 까닭 없이 각설이가 나오더니 이러는 것이었다.

"어이구, 장면 하나를 그냥 건너 뛰었네요. 그 장면으로 돌아가 다시 허것습니다아~!"

꽁트
 꽁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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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살다 이런 능청스러운 공연은 처음이었다. 배우가 대사를 까먹든 말든, 극이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말든, 관객도 능청스럽게 웃어댔다. "그려, 잘한다! 잘한다!", "우, 저를 워쩌, 워쩌!", "춘향이 헌티 물 뿌리지 말어! 감기들라", "아이고, 재미지다!'" 그때그때 탄성과 추임새가 터져 나왔다. 호응이 뜨거웠다. 공연 시작부터 분위기가 그랬다.

굿패의 질굿 연주로 공연이 시작됐다. 이어서 각설이가 만담을 펼쳤다. 웬만한 아가씨도 울고 갈 만큼 몸매 호리호리한 윤여정씨가 여장을 하고, 할머니들을 배꼽 잡게 만들었다. 또 산내 치킨집 사장, 문화해설사, 도서관 지기로 일하는 내로라하는 동네 가수들이 차례로 나와 트로트를 불러 젖혔다.

"솔솔솔 오솔길에 빨간구두 아~ 가씨~"
"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콩트가 펼쳐져 또 한바탕 객석이 뒤집어졌다. 변학도 생일잔치 장면에서는 축하 공연이라며 스윙댄스를 추고, 설장구를 연주하고, 차력단이 말도 안 되게 웃기는 차력 시범을 보였다.

배우들의 연기는 시종 뜨겁고, 진지하고 자유로웠다. 혼신을 다해 걸게 한판 놀고 있는 사람들, 제대로 잘 노는 사람들.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법이니, 메소드 연기법이니, 무색해지는 무대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배우도 관객도 행복한 공연. '다 내 부모고 다 내 새끼'인 자리였다. 나는 공연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공연 참여하는 아이들
 공연 참여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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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장면
 공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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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춘향과 이 도령의 재회로 끝났다.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이어 '산내 농악단'이 등장했다. '남원 농악' 자진모리, 휘모리 가락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꽹과리, 장구 소리가 신명을 높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대로 나가 출연진과 어우러졌다. 한바탕 춤을 추며 돌았다. 2시간 여 동안 땀 뻘뻘 흘리며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한 배우들이 마지막으로 "아버님, 어머님 건강하세요!" 하며 큰절을 올렸다.

"돈 안 뜯기고 무료함 달래시라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공연장을 떠나는 어르신들에게 선물 꾸러미를 안겼다. 고무장갑과 비누. 지난번 공연 때는 휴지와 비누 세트, 그릇 세트도 나눠줬단다. 공연 전엔 떡국 한 그릇과 귤, 대추차도 대접했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일명 '떴다방'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노인들 모아놓고 경로 잔치니 뭐니 하며 미끼로 나눠주는 선물들. 놀이단 단장인, 목수 윤여정씨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번 공연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각설이 역을 맡아 놀이의 진수를 보여준 사람이다.

행복한 객석
 행복한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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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객석
 공연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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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겨울에 약장수들이 산내에 들어왔었죠. 농한기 겨울, 무료한 어르신들이 구경거리 생겼다며 한 달 내내 거길 가는 겁니다. 공연이랄 것도 없어요. 노래 두세 곡 부르고... 달변으로 어르신들 홀려 고가의 물건을 강매하다시피 하는 거죠.

1년 동안 땀 흘려 힘들게 모은 쌈짓돈, 다 털린 겁니다. 지난해는 마침 윤달이 끼어 3백만 원 넘는 수의를... 그걸 본 젊은 사람들 몇몇이 "우리가 하자!" 해서 시작됐습니다. 돈도 안 뜯기고, 자식들 재롱 잔치 보며 무료함도 달래시라고... 니 자식, 내 자식, 니 부모, 내 부모가 아니라, 우리 부모고 우리 자식이고..."

오후 4시가 넘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배우, 스태프, 자원 봉사단들과 공연 뒤풀이 자리에 끼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그들이 각자 현실 속 역할인 민박집 사장, 상추 농사꾼, 고추 농사꾼, 목수, 학교 선생, 한의원 원장, 지리산 국립공원 직원 등으로 돌아가기 전, 뜨거운 술과 떡국을 나눠 먹는 자리였다.

"다음엔 뭘 하지?"

지리산 공연 포스터
 지리산 공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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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그들은 벌써 1년 후에 있을 다음 공연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채 식지 않은 흥분 때문에 들뜬 목소리로.

"뭐로 하지? 배비장전? 차력단은 서커스를 할까? 하하핫!"

나는 속으로 찔리는 게 있어, 자꾸 낯 뜨거웠다. 고개를 들기가 민망했다.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겠다. 이몽룡을 연기했던 민박집 사장님이 일어나 '사랑가' 한 대목 펼치는 걸 듣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혼자 람천 둑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천지 간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석양이 붉게 깔리는 눈길이었다.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조용히 흥얼거렸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현대판 악질 탐관오리들이 판치는 세상이지만, 또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그래도 여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태그:#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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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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