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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가사 中

2000년 8월 21일.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직장에 취직한 날이다. 당시 취업한 회사는 경북 칠곡군에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19세로 고등학교 실습사원 신분이었다. 내가 다니던 실업계 고등학교는 부산 실업계 중에 '명문'으로 통하는 곳이라 다른 실업계 고등학교보다 대기업에 취업할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학창시절 '좀 놀았던' 나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2+1' 제도가 있다. 2학년까지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3학년이 된 1년 동안은 취업을 나가 '실습생'이라는 명목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취업을 나가고자 하는 친구들은 2학년 겨울방학 때가 되면 매일같이 학교에 찾아가 '취업담당' 선생님을 만나곤 한다. 학교생활을 '개판'으로 해왔던 나지만 그래도 취업은 해야겠기에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갔다. 그리고 운 좋게 입사지원서 한 장을 받았다.

2학년 겨울방학이니 아직 2학년이 채 끝나기 전이다. 학교 취업담당 선생님은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좋은 기업에 취직시키기 위해 작전을 쓰셨다. 2학년 때 출결 상태가 좋지 않은 나 같은 친구들에게도 기회를 주고자 2학년 출결 자료를 빼고 1학년 출결 자료만 가지고 대기업에 지원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 덕에 2학년에 되면서 학교도 잘 나가지 않은 나도 운 좋게 'S그룹' 입사지원서를 받을 수 있었다.

솔직히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내가 원치 않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것 때문에 많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공부는 그렇다 치고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1년 넘게 해왔기에 내 출석기록과 성적으로는 그 대기업에 원서조차 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혹시 모를 '기회'가 생기니 기대를 하게 됐고 면접에서 탈락하고 큰 실망을 했다.

그 면접에서 탈락하면서 '2+1' 접수는 마감되었고 3학년을 학교에서 보내야 했다. 3학년 1학기가 지나고 여름방학이 되면서 2+1이 아닌 '일반취업'으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그때도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이 많은데 이제 내 생활기록부에는 2학년 출결 사항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대기업은 엄두도 못 냈다.

면접절차도 없이 타지의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대기업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중소기업들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경북 칠곡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학생들 몇 명 보내달라고 학교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그 회사에 취직했다. 거기는 따로 면접을 보거나 하는 절차도 없었다. 날짜를 정해주고 짐 싸서 어디로 찾아오라는 이야기만 있었다. 사람이 급한 중소기업에서 우리들의 조건 따위는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취업하면서 난생처음으로 타지생활을 해야 했다. 어린 마음에 마냥 신나기만 했다. 집을 떠난다는 사실이 그냥 좋았다. 그런데 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짐을 싸서 올라가는 날 구포역에서 배웅하며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막상 타지로 나가 열악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역시 우리 집이 최고라는 것도 느꼈다.

기차를 타고 왜관역에 내렸다. 구포에서 왜관까지는 무궁화호 열차로 약 2시간 거리다. 왜관은 아주 조그만 시골 마을 느낌이 났다. 함께 간 친구들과 피난민들처럼 짐을 싸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역 앞에 낡은 회색 봉고차 한대가 서 있었다. 우리를 데리러 나온 회사 직원이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봉고차에 올라타 한참을 달렸다.

인쇄회로 기판(PCB)에 각종 부품들을 장착하는 작업 화면.
▲ PCB ASS'Y 인쇄회로 기판(PCB)에 각종 부품들을 장착하는 작업 화면.
ⓒ 강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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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취직한 회사는 '약목'이라는 동네에 있는 조그만 'PCB 수삽' 업체였다. PCB 수삽이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인쇄회로 기판을 만드는 작업 중 마지막 공정이다. 제일 덩치가 큰 부품들을 사람이 손으로 해당 위치에 꽂고 장비를 이용해 납땜 처리까지 완성하는 단계다.

우리를 태운 봉고차는 약목이 아닌 칠곡 북삼읍에 멈춰 섰다. 우리 중 3명은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한단다. 알고 보니 이 회사는 다른 이름으로 PCB 수삽 이전 공정인 PCB 자삽회사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PCB 자삽회사로는 국내 최대규모라고 했다.

그 회사는 약목에서 멀지 않은 북삼에 있었다. PCB 자삽은 수삽에 비해 작은 부품들을 자동화 장비를 이용해 자동으로 PCB에 장착하는 일이었다. 장비를 운영하는 비교적 수월한 일이다. 대신 주야 12시간씩 2교대 근무를 해야 한다.

때마침 함께 취업을 나간 8명 중 나를 포함한 3명이 친한 친구였고 나머지 5명이 서로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우리 셋이 자발 해서 교대근무 하는 자삽회사로 가겠다고 했다. 교대근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전혀 몰랐고 교대근무를 하면 주간근무만 하는 자삽회사보다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꼬여 넘어간 것도 있다.

그렇게 함께 간 우리 8명 중 5명과는 헤어지게 되었고 남은 3명도 1명과 2명으로 나뉘어 교대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난생처음으로 산업현장에 뛰어들었다. 모든 게 첫 경험. 회사라는 곳이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취직만 하면 다 똑같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맨몸으로 사회에 뛰쳐나와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서야 알았다. 평생을 자식 먹여 살리려고 쉬지 않고 일만 하신 어머니. 처음으로 그런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면서 너무 그리웠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PCB, #자삽, #수삽, #2+1, #실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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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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