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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첫날, 설레는 마음을 안고 숙소로 이동하는 도중, 옥에 티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싱크홀 수준의 일을 겪었다. 달리는 승용차 안, 여행사 가이드의 손이 슬쩍 내 엉덩이에 닿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웃음 섞인 사과를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진짜 미안해요. 콜라병인 줄 알고 잘못 만졌네. 아, 근데 사실 콜라병치고는 너무 크다 싶었어요, 크하하하!"

순간 내 마음은 햇살이 쏟아지는 따뜻한 섬나라에서 시베리아 벌판으로 바뀌었다. 기분이 더럽고, 불편했다. 띠동갑이라며, 삼촌처럼 생각하라는 그 양아치 같은 가이드는 여행 내내 비슷한 종류의 말들로 내 휴가를 망쳤다.

콜라병인줄 알고 만졌다고? 이걸로 때릴 뻔했다.
 콜라병인줄 알고 만졌다고? 이걸로 때릴 뻔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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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인지, 얼평(얼굴 평가)인지...

사실 나는 그런 종류의 말들을 특정 경험을 통해 상당히 많이 들어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런 발언들이 일종의 '성희롱'임을 인지한 것과 불편함을 느낀 시점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내가 경험했던 그 현장에서는 비슷한 류의 발언을 듣는 것이 정말 일상이었다. 바로 대학생 시절의 아르바이트 현장에서다.

나는 나름 잔뼈가 굵은 '도우미'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보통 백화점이나 마트, 사람의 왕래가 많은 길 위에서 판촉 행사나 시음 행사를 진행하곤 했다. 주로 단기행사를 많이 했었는데, 기간은 짧게는 1일에서 길게는 10일이었으며, 근로 시간은 6~8시간 정도였다. 정말 짧게는 하루나 2~3일 정도의 일정도 있어서 개인 스케줄 맞춰 행사를 잡기가 편했다.

도우미의 채용 절차는 대략 이렇다. 도우미 전문 구인 사이트나 인터넷 카페에서 구인 글을 보고, 채용 대행회사(도우미들끼리는 이벤트사라 부른다)에 지원한다. 대행사에선 도우미의 프로필과 전신사진(필수) 등을 보고 적당한 도우미를 선별해, 직접 행사를 진행하는 백화점 등의 업체로 연결해준다.

보통 도우미 구인 카페 게시물. "얼굴·몸매만 이쁘면 오케이!" "여자는 미니스커트+민소매"라니... 이 행사 면접은 안 봐도 뻔하다.
 보통 도우미 구인 카페 게시물. "얼굴·몸매만 이쁘면 오케이!" "여자는 미니스커트+민소매"라니... 이 행사 면접은 안 봐도 뻔하다.
ⓒ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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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려면 대체로 2번(이벤트사 → 행사 진행 회사)의 면접은 거쳐야 한다는 것. 전부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벤트사 면접 시, 여성 도우미의 경우 외모나 신체사이즈 등에 대해 적나라한 평가 및 취조를 듣곤 한다. 그때는 마치 옷을 입고 있어도, 벗겨진 채로 있는 것 같은 수치심이 든다.

"(사이즈가) 66이에요? 아, 유니폼 예쁜 라인으로 빠지려면 55가 딱인데, 행사 전까지 좀 굶고 와 봐요."
"다리 알통이 너무 돋보이는 거 아냐? 원래 행사 땐 무조건 치마인데, 자기만 봐줄게. 치마 정장 말고, 바지 정장 입어요"
"피부도 깨끗한 편이고, 웃는 상이라 괜찮은데, 눈이 좀 쳐져서 생기가 없어 보여. 행사 때는 아이라인 좀 새초롬하게 빼고 와요. 눈 화장 필수인 거 알죠?"
"이건 팁인데, (유니폼) 지퍼는 답답하게 다 올리지 말고 딱 가슴 중간까지만 올려요. 가슴 라인 살짝 보여야 보기 좋잖아. 그래야 하나라도 더 팔지. ㅎㅎ"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맛" "뽀뽀하자" 귓속말까지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맛!"이라는 상사...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까(자료사진이다, 오해 마시라).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맛!"이라는 상사...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까(자료사진이다, 오해 마시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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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수모에서 그친다고 생각하면 오산. 본격적으로 행사에 뛰어들고 나서도, 각종 망언은 도사리고 있었다. 주로 시음 행사 도우미를 관리하는 상사는 백화점이나 마트 식품 매장의 대리급인데, 수십 번의 아르바이트 경험 중 남성의 비율이 90%였다.

그중 역대급 '꼰대'는 백화점 내 주류매장에서 2인 1조로 시음행사를 진행할 때 만났다. 당시 파트너였던 A군과 술을 따라주며 시음을 전담으로 하는 역할, 고객 응대와 물건 내어주기의 판매 역할로 나눴는데 나는 후자였다. 둘 다 준비에 열중이었는데, 행사 시작 몇 분 전 담당 대리가 슬쩍 매대 앞으로 다가왔다.    

대리 : "시음은 누가 해?"
A군 : "제가 하기로 했어요."
대리 : "뭐야. 둘이 포지션 바꿔."
: "네? 저희끼리 그렇게 역할 분담한 건데, 혹시 뭐 잘못된 건가요?"
대리 : "당연히 잘못됐지.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맛이니까!"

실로 술병을 집어던지고 싶은 발언이었다. 꾹 참았다. 단기 알바의 경우, 넘치는 도우미들 중 새로운 도우미를 구하면 끝이니, 밉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에 거의 참고 넘길 수밖에 없다. 불성실하거나 현장에서 물의를 일으킨 도우미로 찍혔을 때, 내 이름이나 구인 사이트에서 쓰는 아이디가 이벤트 회사끼리 공유된다고 하니, 언행을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괜히 큰소리를 냈다간, 나만 일자리를 잃을 게 뻔할 테니 말이다.

유니폼에 대한 간섭도 징그러울 정도였다. 백화점에서는 보통 흰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 검은 신발이 규정이었다. 늘 입던 적당한 복장으로 출근했는데 대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기인씨는 블라우스가 왜 그래?"
"보통 이렇게 입었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아니 블라우스가 너무 헐렁하잖아. 자기는 가슴도 큰 편이니 자신감 가져도 돼. 내일부터는 라인 딱 드러나는 걸로 입어. 그래야 프로페셔널해보여."

라인이 드러나는 블라우스와 프로페셔널의 연관성은 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인지(그러면 지도 스키니진 입고 출근하든가). 그나마 나는 참을 만한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구인 글을 보고, 다른 매장으로 배치된 한 언니는 해당 매장의 담당 상사로부터 틈틈이 귓속말로 "심심한데 뽀뽀나 하자" "재밌는 놀이할까? 내가 너 아이스께끼하면 너는 내 바지 내리는 거다? 낄낄" 등의 소리도 들었다며 몸서리를 쳤다.

스타킹? 그렇게 좋으면 니가 신고 해봐라

레깅스는 불쾌감을 주니 스타킹은 괜찮다? 한겨울에?
 레깅스는 불쾌감을 주니 스타킹은 괜찮다? 한겨울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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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매장행사를 내려놓고, 로드행사로 전향한 적도 있었다. 로드는 야외에서 마이크를 잡고 적극적인 호객행위를 하는 일이었고, 나는 주로 지하철역 주변 화장품 매장에서 세일 안내를 했다. 보통 6시간 행사 중에서 50분 진행, 10분 휴식의 패턴이라 사실 그리 극심하게 고단하진 않았는데 한겨울과 한여름엔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한 겨울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말을 하려다 보면 입술이 굳고, 차가운 마이크까지 잡으면 엘사의 손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백화점 매장 대리처럼 일을 틈틈이 감시하고, 간섭할 사람은 없어서 대체로 마음이 편했다. 날씨가 추우니 쉬는 시간을 더 늘려주거나, 따뜻한 음료를 늘 챙겨주는 좋은 사장님도 많았다. 하지만 특정매장의 사장(점주)은 역시나 나를 괴롭게 했다.

그날은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날이었다. 매장에서 지정해주는 도우미 전용 패딩 안에 4겹 정도를 껴입었다. 문제는 검은 레깅스였다. 해당 매장의 사장은 '검은 레깅스가 다리가 두꺼워 보이고, 보기 흉해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살색 스타킹 착용하라 말했다. 나는 큰맘 먹고 용기를 냈다.

"이 날씨에 살색 스타킹만 신기엔... 너무 추울 것 같은데요."
"그래서 긴 패딩 줬잖아. 몇 분만 고생하다가 안에서 10분 쉬면 금방 괜찮아질텐데, 뭐."
"그래도, 그게..."
"아~! 돈 때문에 그래? (3000원을 주며) 이거로 사."           

더 이상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살색 스타킹으로 바꿔 신고, 남은 5시간의 행사를 마쳤다. 다 끝나고 나니 한동안 정말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사실 지금도 후회되곤 한다. 스타킹을 얼굴에 집어던지면서 "그렇게 이게 좋으면, 네가 신고 네가 해라!"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꼰대들의 성희롱... 수많은 이들이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

입장 바꿔서 한 번만 생각해봐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입장 바꿔서 한 번만 생각해봐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 BUKOWS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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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 두렵고 무서웠던 걸까. 그 상황이 불편하다고 시원스럽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은 늘 나의 우위에서, 내게 일자리로 불이익을 줄 수 있을 만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내 목걸이 명찰을 만지며 "너 어느 이벤트사에서 온 애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 나는 '갑'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부당하게 느껴질 만한 외모 지적 그리고 성희롱 발언도, 상사가 원한다면 그것을 교정하고 그냥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겪은 일들은 일종의 권력 관계의 체험인 셈이다.

아르바이트의 현장에서, 수많은 도우미들이 내가 겪은 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더러운 상황들을 얼마나 일상적으로 참아내고 있을지 생각하니 착잡해진다. 각자 저마다의 사정으로 금전이 필요해, 그 현장으로 뛰어들었지만 '금방 바뀔 테니, 막 대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니까.

내가 경험한 몇몇 진상 상사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그들의 딸, 누나, 여동생 등이 같은 일을 하고 있더라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지. 딱 한 번만 다른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게 정말 그토록 어려울 일인 걸까. 내가 받기 싫은 대우는 남도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기초적인 인권 감수성을 기대하기엔... 아, 차라리 남북통일을 기대하는 게 더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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