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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을 읽으면서 처음 딱 든 생각은 '내가 이런 여행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구나!'였다. 저자의 이력을 보고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읽는 중에는 여행 자체에 푹 빠져들었다. 고생, 고생, 생고생하는 여행기를 어디 읽기가 쉽던가.

세련되고 단정하고 감성적이고 예쁜 이야기들이 수놓인 여행기는 많지만, 차라리 모험기라고 할 만한 여행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듯하다. 그래서 섭섭하던 차에 아이슬란드를 무려 히치하이킹으로 71일 여행한 기록을 담은 이 책을 만났다.

위에 언급된 '저자의 이력'이란 이런 걸 말한다. 문예창작학과를 나와 30년간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지 못한 사람. 노동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 최소한의 수입을 거둬들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글과 여행에 전력을 다 한 사람.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갑자기 '노안'이라는 날벼락을 맞아 절망한 끝에 '절필'을 선언한 사람. 이후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실패자'란 낙인을 찍은 사람.

"'내 인생은 실패했다'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사회적 지위, 돈, 명예, 사랑, 결혼, 꿈. 그것들 중 변변하게 이룬 것이,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에 실패했고, 사랑에 실패했다. 그나마 이루고 말겠다는 꿈 하나로 모든 결핍과 상실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 본문 중에서 

처음에 저자의 이력을 보고 '이 책을 읽어야겠다' 하고 생각한 건, 내가 원래 소설가가 쓴 산문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봤다. 30년 동안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소설가일까, 아닐까.

30년 내내 소설을 쓴 사람을 소설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10년이나 20년 전쯤 등단한 후 글을 쓰고 있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봤을 때(실제 첫 소설이 마지막 소설이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함), 누가 '더' 소설가일까. 누가 뭐라 하든 내 기준으로 저자인 강은경의 글은 소설가의 글일 게 분명했다.

저자가 소설가인 것도 모자라 여행지로 택한 곳이, 바로 아이슬란드 아닌가. 재미있는 점은 내가 아이슬란드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저자와 같다는 거였다. 저자 역시 4년 전쯤(나도 이때쯤이다)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를 읽고 아이슬란드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은 듯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아이슬란드란 나라에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아이슬란드가 행복 지수 1위의 나라, 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은 나라, 최장수 나라, 화산, 빙하, 용암 등을 집에서 얼마간 걸어나가면 볼 수 있는 나라, 2008년 경제 위기 때 자본이 아닌 국민의 편에 서서 국가 위기를 극복한 나라, 주말마다 고주망태가 되는 사람들이 가득한 나라, 반면 평일에는 술 한 모금도 자제하며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여서만은 아니었다.

아이슬란드는 예술을 찬양하는 나라이고, 국민 열 명 중 한 명이 작가인 나라이며, 작가가 그렇게 많은 데도 작가를 우대하고 또 국가가 작가에게 보조금까지 주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의 명언을 아이슬란드 국민은 실생활에서 몸소 실천하고 있기에 독서율도 높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왠지 아이슬란드에서라면 나도 글을 쓰면서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이슬란드를 꿈의 나라로 막연히 점찍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난 꿈만 꾸고 있었는데 저자는 직접 찾아 나섰다는 거?

2년 전, 저자는 눈이 침침해진 이후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슬란드 여행을 결심했단다. 아이슬란드는 무엇보다 '실패로 끝난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성공으로 끝난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와 '실패로 끝난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 전자의 나라에서도 실패는 해도 되지만 그 끝은 '꼭' 성공이어야만 한다면, 후자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실패로 끝난 실패를 더 높게 쳐준다. 얼마나 마음이 착하면 계속 실패하겠냐는 게 후자 나라 사람들의 생각이다.

강은경은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에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을 품고 하나, 둘 여행 준비에 돌입한다. 아이슬란드가 아직은 여행지로서 크게 알려지지 않아 정보가 많지도 않고, 더군다나 우리나라에는 저자가 하려는 여행을 시도해 본 사람조차 없어 준비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저자는 100퍼센트 캠핑과 히치하이킹만으로 아이슬란드를 여행할 예정이었다(실제로 계획대로 여행했다). 하지만 저자의 이 계획은 아이슬란드 여행자 카페의 주인장과 여행사 사장까지 혀를 차게 만든다. 너무 무모해 보였달까. 달랑 현금 370만 원을 들고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높다는 나라 중 하나인 아이슬란드를 과연 두 달 넘게 여행할 수 있을까 싶었달까(저자는 돈도 많이 남겨 온다).

몸을 혹사한 끝에 얻은 깨달음

저자는 누가 뭐라 하든 앞, 뒤로 배낭을 짊어진 채 여행길에 오른다. 가로 124센티미터, 세로 213센티미터, 높이 1미터의 돔형 텐트에서 잠을 자고, "어떡하든 소식하며 궁핍을 견딘다"는 생각으로 식빵이나 사과 등으로 끼니를 때우며, 50년 만의 악천후라는 아이슬란드를 종횡무진 누빈다.

하루에 서너 번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하고(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착하기로도 유명하다. 어떨 때는 엄지를 척했는데 바로 차가 잡히기도 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정과 대화를 나누며, 몇 번은 생과 사의 갈림 길에서 죽을힘을 다해 고군분투한다.

"벼랑에 붙어 앉았다.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웩웩! 멀건 토사물이 바짓가랑이 위로 쏟아졌다. 구토가 멈추자 정신이 좀 맑아졌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왼쪽 벼랑이 산사태로 치맛자락처럼 아래까지 흘러내린 지형이었다. 벼랑 각도가 60도쯤 되겠다. (...) 발만 헛디디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지 않고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후들후들 떨며 초긴장한 상태로 한 시간쯤 벼랑을 타고 내려오자 발아래로 올라올 때 들렀던 여름 별장이 내려다보였다. 살았다!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 본문 중에서

강은경은 40시간을 꼼짝없이 앓고도 일어나자 마자 걷고, 또 걸었다. 비바람에 젖은 옷을 고스란히 입고 다녔고, 남이 잃어버린 목도리를 둘둘 말고 다녔다. "심장이 터질 듯 숨이 가쁘고, 가죽이 벗겨져 나갈 듯 발바닥이 뜨겁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대"는데도 그만두기는커녕 "황홀감에 젖어" 끝까지 걸었다. 지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인 장관에 압도된 채 내내 혼자.

힘들면 울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면서. 실패한 삶을 되돌아보며 자책도 하고 스스로 토닥이기도 하면서. 지나간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을 때 우리도 때때로 그러듯, 몸을 극단적으로 혹사하면서. 몸을 혹사하면 혹사할수록 삶의 의미가 뚜렷한 형태로 손에 잡힐지 모른다는 듯이, 저자는 죽지 않을 만큼 걸었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작은 깨달음은 이렇듯 단순했다.

"순간순간 잘 놀아야지. 뭐가 되려고 아득아득 애쓰지 말고."
- 본문 중에서

저자는 이제 '내일'이나 '다음'이 아닌 '지금'을 위한 삶,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니?"가 아닌 "지금 하고 싶은 게 뭐니?"라고 묻는 삶,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희망 고문에 목매지 않고, '꿈도 실패할 수 있다'는 긍정적 태도를 안고 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71일 동안 11킬로그램이 빠지는 강행군을 통해 깨달은 건, 비록 소설가가 되는 건 실패했을지 몰라도 삶이 실패한 건 아니라는 거였다. 또, 실패해도 괜찮다는 거였다. 여행에서 만난 아이슬란드 노부부는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패를 해야 뭐든 다시 도전하고 시도할 수 있잖아요? 실패를 많이 할수록 새로운 것에 더 많이 도전할 수 있게 되죠." - 본문 중에서

여행을 끝내고 가뿐한 마음으로 돌아온 저자는 '제 버릇 남 못 주고' 또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 바로 이 책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서른두 번째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고 서른세 번째 출판사에서 출판하게 됐단다. 아이슬란드 노부부 말대로 '소설에서 실패'한 후에 '뭐든 다시 도전'했더니 이렇게도 살아진 거였다. 저자는 이제 다시 소설도 쓸 수 있을 만큼 힘도 생겼다고 한다.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은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과 같은 선상에 있다. 스스로 자처해 고난 길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의 분위기는 진지한 <와일드>와 유머러스한 <나를 부르는 숲>의 중간 어디쯤에서 빌 브라이슨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 문투가 유쾌하고, 에피소드들도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다. 저자가 본인의 삶을 풀어놓을 때는 눈물이 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강은경/어떤책/2017년 04월 10일/1만5천8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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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에서 71일 히치하이킹

강은경 지음, 어떤책(2017)


태그:#아이슬란드 여행,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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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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