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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년 20, 30대 청년 6명은 시력을 잃었습니다. 파견노동자로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만졌던 메탄올이 실명을 불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노동건강연대'와 <오마이뉴스>는 실명 청년들에게 닥친 비극과 현재의 삶을 기록하고, 누가 이들의 눈을 멀게 했는지 파헤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시력을 잃은 청년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다치기 전, 양호남씨의 모습.
 다치기 전, 양호남씨의 모습.
ⓒ 양호남씨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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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10살 어린 동생 양호남씨의 사진을 보내왔다. 너무나도 앳된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친구들한테 동생 자랑을 많이 했었어요. 아이돌 같다고..."

또 다른 사진도 보내왔다. 사진 속 2년 전 동생은 사촌의 결혼식장에서 엄지를 내밀고 있다. 동생은 당시 6년을 사귄 여자 친구와 이듬해인 2016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었다.

"항상 자기가 최고라며 사진 찍을 때 '엄지 척'을 하곤 했었어요. 그런 사진들을 보면, 가슴이 찌릿찌릿하고 눈물이 나요."

지금 동생은 그때의 동생이 아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다. 시력만 잃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호남씨는 뇌를 크게 다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남들처럼 음식물을 꿀꺽 삼킬 수 없다.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삼켜야 한다. 그나마 많이 나아진 것이다. 얼마 전까지 물도 마시지 못했다. 물이 폐로 들어갔다.

동생은 두세 달에 한 번씩은 꼭 눈이 뒤집힌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밥상 앞에서, 공원에서 쓰러지는 일은 일상이 됐다. 정신적 충격은 동생의 성격을 크게 바꿔놓았다. 엄마 아빠와 간병인들에게 신경질을 내며 막말을 쏟아낸다.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시간을 돌려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때 친구들이 있는 서울로 가겠다는 걸 막았다면..."

누나는 동생의 비극을 두고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그녀 탓이 결코 아니다. 가해자는 따로 있다. 바로 호남씨를 죽음의 공장으로 보내고 수수료를 챙겼던 파견업체와 이윤에 눈이 멀어 호남씨의 삶을 앗아간 사용업체다.

중간착취를 허용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불법 파견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고,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죗값을 묻지 못하는 대한민국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적은 계속되지 않았다

호남씨의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참 멀었다.

두 달 전부터 만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동생의 억울함을 세상에 잘 전달하겠다고 설득했다. 다행히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렸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그녀를 만났다. 전날 밤샘 근무를 한 그녀는 카페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2015년 12월 30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통근버스를 탔다. 오후 7시 30분쯤 전화가 왔다. 동생의 친구였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누님, 호남이가 쓰러졌는데, 의식이 없어요."

몸이 떨려 진정할 수 없었다. 동생이 친구들이 있는 서울에 올라간 건 불과 2주 전이었다. 8일 전에는 부천에 있는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 들어간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날 밤 렌터카를 빌려, 동생이 실려 간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호남씨는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의사는 말했다.

"평생 식물인간으로 살 수 있어요."

엄마와 아빠가 뒤늦게 병원에 왔다. 아들의 모습에 엄마는 눈물을 쏟더니 곧 까무러쳤다.

여자 친구는 호남씨 곁에 머물렀다. 그에게 KCM 노래를 들려줬다. 호남씨가 좋아하던 가수였다. 며칠이 지나자 호남씨는 눈을 떴다.

"사지가 마비될 수 있어요."

의사가 말했다. 다시 기적이 찾아왔다. 호남씨는 계속 경련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적 충격 탓에 몇 달 동안 말도 못한 호남씨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기저귀도 몇 달 만에 뗐다.

"앞을 볼 수 없을 거예요."

의사가 말했다. 그는 호남씨가 삼성전자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메틸알코올(메탄올)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농도의 메탄올은 호남씨의 중추신경계와 시신경을 파괴했다.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죽은 시신경은 되살아나지 않았고,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쓰러진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호남씨는 언제 재활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을까.

양호남씨가 보는 세상은 암흑이다.
 양호남씨가 보는 세상은 암흑이다.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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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씨와 가족들은 아직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그대로 남아있다.

호남씨는 한 달 동안 대학병원 중환자실과 응급병동에서 치료를 받았다. 파견업체 세울솔루션과 사용업체 덕용ENG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호남씨가 재활병원으로 옮긴 뒤에야, 덕용ENG를 운영하는 조아무개씨가 호남씨를 찾아왔다. 호남씨의 누나가 따졌다.

"왜 이제야 왔어요?"
"전화번호를 몰랐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회사가 직원의 연락처도 모를 수가 있을까. 파견노동자라서 그랬을까. 동생의 친구는 계속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누나는 그를 병원에서 쫓아냈다. 그 후로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사실 호남씨 가족은 조씨가 호남씨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호남씨 쪽 노무사가 덕용ENG를 찾아 호남씨의 위독한 상태를 알렸다. 조씨가 반문했다.

"자살 시도를 하려고, 메탄올을 마신 게 아닌가요?"

누나는 지금도 그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

"진짜 당장이라도 가서... 어떻게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계시고,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도 있었는데, 호남이가 뭐가 모자라 자살을 하겠어요."

조씨는 민사소송이 진행되자, 합의금으로 2000만 원을 제시했다. 호남씨 가족이 거부했다.

"그 사람도 자식 키우는 부모일 텐데... 애가 스물여섯 살 밖에 안 됐잖아요. 앞으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꿈도 많았는데, 다 사라져버렸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진짜 합의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2000만 원을 얘기했겠어요."

호남씨의 변호사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조씨 명의의 재산이 얼마 남아 있지 않네요. 소송을 끝까지 해도 돈을 받기 힘들어요. 5000만 원에 합의를 보면 어떨까요."

"그 돈을 안 받으면 안 받았지, 가해자들이 감옥에 갔으면 좋겠어요."

기자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원치 않는 진실을 마주해야할 때다.

"법원은 조씨를 감옥에 보내지 않았어요. 반성한다는 이유로 선처했어요."

양호남씨가 다녔던 당시의 덕용ENG 공장 내부 모습. 파견 노동자들은 어떠한 보호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드럼통에 든 유해물질 메탄올을 생수통에 나눠 담았다.
 양호남씨가 다녔던 당시의 덕용ENG 공장 내부 모습. 파견 노동자들은 어떠한 보호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드럼통에 든 유해물질 메탄올을 생수통에 나눠 담았다.
ⓒ 양호남씨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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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씨가 쓰러지기 11개월 전, 김영신씨도 같은 공장에서 시력을 잃었다. 영신씨의 존재는 2016년 10월에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조씨를 재판에 넘겼다. 공소장에는 크게 세 가지 범죄사실이 적혔다.

① 150여 명의 노동자를 불법으로 파견 받았다.
② 메탄올 취급 노동자에게 유해성을 알리지 않고 보호장비를 지급하지 않는 등 안전보건 조치를 취하지 않아, 호남씨와 영신씨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끼쳤다.
③ 호남씨 사고 이후, 메탄올에 노출된 노동자 72명으로 하여금 임시건강진단을 받도록 한 고용노동부의 명령을 어겼다.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은 공소 제기 이후 두 달 보름 만인 지난 2월 판결을 내렸다.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조씨는 감옥에 가지 않았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산업안전보건법과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7개의 조항을 적용했음을 밝혔다. 집행유예 판결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판결문을 살폈다.

'근로자 양호남·김영신이 실명되는 중한 상해가 발생한 점은 인정되나'

조씨에게 불리한 양형 사유는 단 하나였다. 그 뒤로는 그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가 쭉 이어졌다.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점, 이 사건 범행은 메틸알코올의 위험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이 일부 근로자들이 건강진단을 받도록 노력한 점, 양호남·김영신이 산재보험 혜택을 받고 있는 점, 피고인이 벌금형으로 2회 처벌받았을 뿐 동정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없는 점, 그 밖에 피고인의 나이, 성행, 환경, 건강상태, 가족관계, 범행의 동기, 수단과 결과, 범행 후의 정황 등 이 사건 변론에 나타난 여러 양형 조건을 참작하여 주문과 같이 형을 정한다.'

인천지검 부청지청은 항소장을 법원에 냈다. 부천지청 차장검사는 기자에게 말했다.

"근로자들이 실명에 이르렀습니다. 조씨의 죄가 가볍지 않고 중하다고 봤기 때문에 항소했습니다."

그녀에게 판결문 내용을 전했다.

"감옥살이도 안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면 벌을 받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사람이 벌을 안 받으면, 누가 벌을 받나요? 그런 나쁜 사람이 벌을 받지 못하는 게 너무 억울해요. 힘 없는 사람만 피해를 보는 거잖아요. 그 사람은 우리에게 사과 한 번 안 했는데, 어떻게 반성한다고 할 수 있어요?"

기자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덕용ENG가 있었던 공장에는 공작기계가 있었던 흔적만 남았다.
 덕용ENG가 있었던 공장에는 공작기계가 있었던 흔적만 남았다.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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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호남씨는 안과 병원에 다녀왔다. 이미 많은 안과를 다녔지만, 의사가 하는 말은 비슷했다. 그래도 희망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날 의사가 말했다.

"현대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호남씨 누나의 마음은 조금씩 약해져간다.

연세 많으신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면, 호남이 혼자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소송에서 이겨도 가해자들로부터 돈을 못 받는다는데, 적은 합의금이라도 받아야할까.

그녀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어지러웠다.

호남씨 가족은 중국 교포다. 누나와 동생은 돈을 벌기 위해 차례로 한국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호남씨의 결혼 준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한국에서 일했다. 2015년 가을 온 가족이 모여 거제도를 여행하며 추억을 쌓았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동생이 쓰러졌다.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땅일까.

며칠 뒤 그녀에게 연락했다. 7월 16일 일요일 오후 3시 홍대로 나와 달라고 했다.

가톨릭청년회관에서 메탄올 중독 실명 피해자를 위한 토크콘서트를 여는데, 재활 비용 1700만여 원을 만들어준 수백여 명의 후원자가 모인다.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문재인 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여당 국회의원, 기자도 함께 한다.

수많은 이들이 그녀와 호남씨, 그리고 다른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녀는 말했다.

"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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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
 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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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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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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