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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김사장'으로 불리는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김홍민씨에게 지난 봄 다섯 번의 출판 강의를 들었더랬다. 강의에서 그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명확히 구분해서 썼다. 아주 천천히 말했는데 수강자들의 주의를 다 붙잡았다. 가끔 출판사 직원으로 시작해 사장으로 변신한 10년 동안의 일들을 정직하게 말했는데, 그런 일화들도 우리를 소소하고 절실하게 웃겼다.

'김사장'은 책의 기획과 홍보에 탁월했다. 독자들은 기꺼이 교정에 참여했다. 기차에서 비행기에서도 교정을 하게 했다. 꽁꽁 베일에 싸인 책도 사게 만들었으니 말 다했지. 그 과정은 실용성에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는 좋은 책을 위해 기꺼이 수고를 하고, 기꺼이 지갑을 열 사람이었다. 신촌역까지 퇴근을 하는 그와 걸었다. "곧 있을 국제도서전 기획을 맡고 있어요!" 그의 말에 나는 생각했다. "오! 이거 올해는 흥미진진한 도서전으로 변신을 하겠는데?" 그게 내가 23회 2017 서울국제도서전을 가게 된 첫 계기였다.

마포 김사장, 서울국제도서전을 귀띔해 주다

수요일 낭독모임을 함께 한 지 벌써 1년을 넘겼다. 지금은 문화카페 산책을 이고 있는 어린이 작은 도서관 '책읽는엄마 책읽는아이' 사람들과 함께, 지난해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신 3월경부터 시작한 모임이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부터 시작해 벌써 다섯 권을 함께 읽어온 이들이 흩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임의 초기 구성원인 김수현씨가 도서전이 열린 6월 14일 다음날, 코엑스 현장에서 '숲속 작은 책방'을 지키고, 오후 3시에는 낭독도 한다고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작은 도서관의 관장이었다. (다른) 책모임(이런 걸 네 개쯤 하신다는데) 안에서 일본이며 대만이며 도서관과 책방을 두루 탐방하는 이력이, 책의 오랜 친구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책모임인데, 도서전을 안 갈 수가 있나? 더군다나 지인이 지키고 있다는 책방엔 꼭 들러야지!" 스무 개의 전국 책방을 모아 기획한 '서점의 시대'를 기웃하게 된 이유였다.

괴산에서 온 서점 '숲속 작은 책방'에 갔을 때, 서점 주인장 백창화씨와 김수현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책 쫌 판다!"는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마치 중력이 가까이 다가온 모든 물체를 당기듯, 그네들은 블랙홀이었다. 그림책을 '발라내어' 만든 북아트책이, 일일이 책마다 두른 띠지가, (그 정성이) 그냥 갈 수 없게 만들었다.

김수현씨가 그림책 <왜냐면>을 낭독해 주고 있다. (뒤편에서 백창화 숲속작은책방 대표가 읽는 모습을 보고 있다.) 지역에서 초대된 서점(책방)들은 책을 골라 소개하고, 낭독 행사를 갖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 서점의 시대... '숲속 작은 책방'은 그림책 낭독 행사도 가졌다. 김수현씨가 그림책 <왜냐면>을 낭독해 주고 있다. (뒤편에서 백창화 숲속작은책방 대표가 읽는 모습을 보고 있다.) 지역에서 초대된 서점(책방)들은 책을 골라 소개하고, 낭독 행사를 갖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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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책을 사지는 않았다. 책 <한 치 앞도 모르면서>는 저절로 내게 끌려왔다. 충주를 고향으로 둔 내게 <충청도의 힘>을 쓴 작가의 책은 흥미를 끌었다. 내 어릴 적엔 담배를 심었고, 지금은 옥수수 농사를 짓는 외삼촌, 담배를 말리다 떨어져 장애를 갖게 된 큰외숙도 생각났다. 잠시만 책을 펼쳤는데, 우왕우왕 목소리들이 피어올랐다. 

한 권은 내가 읽고, 나머지는 외삼촌께 드릴 양으로 두 권을 샀다. 책은 술술술술 술처럼 넘어갔다. 나이는 오십이나 되어, 긴 머리를 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잔칫집에 가서 저자 남덕현은 수작을 건다. "지는 암만혀두 전 맛을 모르고 죽을 모냥이유." 그리고는 한 단계 한 단계 말로 고리를 걸어, 끝내 전을 얻고, 육개장도 한 그릇 말아 잡숫는다. 설사를 하느라 네 번이나 전화를 못 받은 할매와 할아비의 반전. 위화의 소설 <인생>의 인생역정에 버금가는 '한 치 앞도 모르면서' 같은 이야기들…. 고향 할배와 할매들, 아줌씨와 아저씨들이 제각각 옹골찬 인생임을 이 작은 책방이 아니었으면 지는 영 몰랐을규.

그 작은 책방이 아니믄 영 몰랐을규

도서전은 책들의 잔치, 동시에 말들의 향연이었다. 걸판지게 북쪽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에서부터 강원도 충청과 전라 경상도 그리고 제주의 말로 감탄한 저 현수막을 보라지. "책이 하영이수다! 책이 허벌나게 많아부네! 아니~ 먼 책이 이렇게 많디야~? 지역책들 다 모여 있드래요! 징하게 책도 많당께! 책이 엥가이 많은갑네!"

전라도닷컴은 온라인에서 시작했다가, 현재는 오프라인 잡지를 내고 있다. 고무신을 기운 천에서 이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 지역에서, 지역 사람들이, 지역에 대한 잡지를 내고 있다. 전라도닷컴은 온라인에서 시작했다가, 현재는 오프라인 잡지를 내고 있다. 고무신을 기운 천에서 이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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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 뿐인가? 각 지역에서 지역사람들이 지역을 다룬 책이며, 잡지들이 모였다. 맹인 어머니라면 그 책들을 아들처럼 안고는 말했으리라. "이건 바닷가 소금기가 짭조름하네!"라든가, "이건 솔향에 마늘밭 흙내음이 난다니께!" 수원에서는 사람 사이, 길과 길 사이를 다룬다는 잡지 <사이다>가 왕림을 했다. 멀리 광주의 무등산 기운, 목포 바닷기운을 싣고 <전라도 닷컴>도 여러 몸이 누웠다. 강원 문화 콘텐츠 <문화통신>이 스토리그래픽 <원주에 사는 즐거움>을 품고 있다. 부산 빨간집출판사에서는 2017년 여름 창간호로 '계절마다 한번 <어쩌다보니>'를 내었고, 역시나 말석을 차지하고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 또한 '어쩌다보니' 저런 일을 하고 있네? 아파트서는 작게 '소식지'도 내고, 작은 미술모임을 꾸렸을 땐 교재를 1호로, 동인지를 2호로 냈었지. 구에서 책으로 '마실집'도 내고, 무슨무슨 잡스러운 동네 역사문화 탐방도 자료집으로 엮고. 지금도 '규합'에 하릴없이 바쁘고. 그러니 저렇게 지역에서 잡지를 내는 대견한 일에 응원을 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나라도 빠지면 서러울까, 알뜰히 챙겨 계산대로 가져간다. "권 당 만원을 넘지 않는 이 귀한 책들이, 고향을 떠나온 숱한 도시인들에게 안길 수만 있다면." 상상도 하면서.

지역책들 다 모여 있드래요! 징하게도 많당께!

<신촌, 노래로 말을 걸다>는 훨씬 더 두꺼운 책인데도, 그 옆의 얄팍한 책 <물쓰듯 글쓰다>보다 훨씬 쌌다. 가격 9800원 정가를 달고 있는데다, ISBN 공인출판 마크를 달고 있음에도…. 무려 1/5 가격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책 세 권을 겨우 7천원에 살 수 있는 이 형언키 어려운 정황이 가능한 건, 여기에 이 책의 창조주이며 주인님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만 찍고 정확히 이름을 묻지는 못했다. 그네들은 마을에 살며, 노래도 하고 사람들과 '사업'도 하고, 그걸 글로 옮기고 책을 냈다. 그라포마니아, 글을 쓰고 책을 내려는 의지라는데, 그녀들은 그걸 가졌다.
▲ 책 <물쓰듯 글쓰다>와 <신촌, 노래로 말걸다>를 낸 저자들. 사진만 찍고 정확히 이름을 묻지는 못했다. 그네들은 마을에 살며, 노래도 하고 사람들과 '사업'도 하고, 그걸 글로 옮기고 책을 냈다. 그라포마니아, 글을 쓰고 책을 내려는 의지라는데, 그녀들은 그걸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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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쓰듯 글쓰다>는 100장의 낙서를 할 수 있는 공책이고, 옆에는 100가지의 글쓰는 조언이 담겨 있어요. 왼쪽에서 보고, 오른쪽에 바로 쓰는 거죠! 그렇게 하면 정말로 많은 글을 써갈 수 있을 거예요." 이 말은 아마도 지은이 변자영씨가 한 말이겠다.

<신촌, 노래로 말걸다>는 자칭 "공연방+영화방+음악방+방송방+α 만들기 안내서 및 동네 자취"를 담은 책. 기타를 들고 놀다가, 사람을 만나 놀다가, 어찌어찌 '사업'을 벌이는 데 필요한 소소한 정보와 조언들을 담았다. 아니 그 자신들의 일기와 경험이라 해야 더 적절하겠다. 책 속의 구절. - "저는 구자랑이고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노래를 하며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 모두 짝짝짝 ! 자영이 이어 말한다. "저희가 '방황'이라고 말하면 큰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 이건 청춘의 서다.

물 쓰듯 쓰고, 노래로 말을 건 두 신촌 처자 저자

물론 이 도서전이, 이렇게나 골목 이야기, 지역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국제도서전답게 곳곳에는 이국의 언어로 쓰인 수천 권의 책들이 긴 시간차를 견디고 서있다. 내 마음에 든 것은 이탈리아 부스. 시칠리아 섬의 마피아처럼 음험해 보이는 책들도 있고, 로마의 보병처럼 긴장된 책도 있다. 아주 간결한 책도, 아주 복잡한 책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들은 어떤 기대를 안고 있다. '톡 쳐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 기대를 안고 있는 책들은 마음에 더 쏙 든다.

타이완의 부스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네들의 정서는 확실히 우리와 닮아있다. 꽃들과 새들, 그러니까 화조도의 전통은 우리들에게도 흐른다. 한자어가 갖는 편안함, 한국처녀인지 타이완 처녀인지 구별되지 않는, 그러나 확실히 영어를 쓰는 안내 도우미의 '낯익음'. 한국어 교재를 설명하는 아프리카계 청년, 터키의 전통음악을 연주한 이들에게서 느끼는 묘한 낯설음. 이 익숙함과 낯설음은 도서전에선 늘 한 짝이 된다.

팔리 모왓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북극에서도 살았고, 시베리아 오지도 텀험했다. 이런 내용들은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번역이 되긴 했으나, 국제도서전에서 만날 수 있는 있는 것은 이런 낯섦이다.
▲ 캐나다 작가 팔리 모왓의 작품들. 팔리 모왓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북극에서도 살았고, 시베리아 오지도 텀험했다. 이런 내용들은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번역이 되긴 했으나, 국제도서전에서 만날 수 있는 있는 것은 이런 낯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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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줄도 몰랐던 캐나다 문학은 <빨간 머리 앤>. 내가 우연히 잡아 읽었던 책 <내 생애의 아이들>도 거기 있었다. 캐나다 부스에서 세 권의 그림책, 그러나 하나의 소재를 다룬 '모자 시리즈'를 보았다. 1981년생 존 클라센은 그저 흰자위에서 굴러다니는 눈동자만으로 서스펜스를 일으킨다. 하나의 모자를 발견한 두 마리의 친구 거북이에게선 무슨 일이 생길까? 큰 물고기의 모자를 몰래 가져온 작은 물고기는 추적을 피할 수 있을까? 모자를 잃고 찾아다녔던 곰은 거짓말했던 토끼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나는 두 번 거기로 갔다.

이탈리아 부스는 "형식이 무수하더라도, 결국은 이야기로 모든 것이 귀결된다"고 내게 일러 주었다. 캐나나 부스는 "하나의 소재는 비록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가닿는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그런데 이런? 파느냐고 물어보질 못했네?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해 직조를 하듯, 도서전

예전에 나도 사서 보았던 책 비유와 상징은 '비상출판사'가 되어 꽤 떴나보다. 로고가 그려진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수백 명은 이 전리품을 찾는다. 나는 일인출판사를 돕는다는 몇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출판기업에도 가보고, 전자출판을 지원한다는 지원센터의 직원들과도 대화를 하고, 또 때로는 '남해의 봄날' 출판사가 만든 책방 '봄날의 책방'에도 가본다. 젊은 직원들은 풋풋하다. 대만 작가 지리 리아오의 책을 번역한 리틀빅 출판사에서도 그의 그림책을 몇 권 사고.

출판사가 만들어진 지 이제 5년여. 그간 약 25권 정도의 책을 냈다. 꾸준히 그리고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 이런 출판사가 여럿이다. 밝은 눈을 우리가 갖고만 있다면.
▲ 출판사 남해의 봄날이 만든 서점 봄날의 책방 출판사가 만들어진 지 이제 5년여. 그간 약 25권 정도의 책을 냈다. 꾸준히 그리고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 이런 출판사가 여럿이다. 밝은 눈을 우리가 갖고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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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커피를 파는 곳에 앉았다. 레몬을 넣은 달콤한 케이크와 블랙머시긴가 하는 것도 시켜 아내에게 준다(아메리카노와 똑같구만). 다시 일어나 걷는다. 책들을 다 보려면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가다보니 뒷골이 뜨끈뜨끈한 구절도 보인다. "제대로 쓰려 말고 무조건 써라!" 저건 10년 전에 지인 김은식씨가 내게 한 말이다. "어떤 분들은 글로 도를 닦으려고 해요. 저는 그냥 쓰거든요." "글을 쓰는 건, 의사소통을 하려 하는 거지요. 무슨 예술을 하나요?" 하고. 국제도서전이라 영어로도 쓰여있다. "KEEP CALM AND WRITE". 닥치고 글 써.

인연에 끌려 왔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네

한 곳에서 꽤 오래 붙잡혀 있었다. 그래픽 노블을 내는 전문 출판사 '우리나비' 분들이 말로 날 붙들고 놔주질 않는다. <내 아버지의 집>. 파코 로카가 지은 그 책의 풍경은 어쩌면 저렇게나 우리와 똑같을까?

아버지는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산다. 그리곤 주말마다 아들들, 자식들을 부른다. 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고, 울타리를 만들고…. 시골 일은 끝이 없는 뫼비우스 띠다. 수영장을 만드는 건 우리집과 달랐지만, 삽으로는 우리도 숱하게 땅을 팠다. 같이 산 <알자스의 맛>과는 다른 작품이다. 자신의 삶을 말하고 쓰고 그리는 사람들.

아버지는 2009년 쓰러졌다. 수확을 앞둔 콩과 대추들, 염소와 닭과 토끼들, 50여 주의 복숭아나무와 매실나무가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버진 중환자실에서 삶을 마쳤다. 아버지가 세상과 이별할 것을 알았다면 무슨 말을 우리들에게 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 우리의 기억은 이제 머릿속에만 있다가 흙으로 혹은 불속으로 직행할까? 글도 책도 되지 못한 채?

우연한 인연들로 외피를 썼지만, 오늘 책들과의 만남은 예정되어 있던 일일지 모르겠다. 내 마음에 빈 공책들이 한 장 한 장 펼쳐진다. 거기에 <아버지의 집>에 대해 써야지, 혹은 그려야지 하는 생각이 천천히 일어났다.


태그:#국제도서전, #김홍민, #김수현, #내아버지의집, #흐르듯글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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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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