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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구매하기] '백발의 거리 투사' 백기완 선생님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 공동 저자로 나서서 <두 어른>이란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책 수익금은 비정규노동자들이 '꿀잠'을 잘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데 보탭니다. 사전 구매하실 분은 기사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편집자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좌), 문정현 신부(우)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좌), 문정현 신부(우)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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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과 문정현, 나는 두 분을 '두 어른'이라 쓰고 두 친구라고 읽곤 한다. 두 분이 서로 친구라는 얘기가 아니라, 두 분이 나의 친구라는 의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운동에 뛰어들어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도 치열한 현장에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는 두 원로가 나의 친구라니 실로 무례한 망언이자 건방진 착각이 아닌가.

허나 그렇지 않다. 두 어른은 나의 친구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맞서는 사람들, 비바람 몰아치는 거리에서 눈비를 함께 맞는 사람들, 약한 것들의 연대로 악한 것들과 싸우려는 사람들의 거리에 머물다 보면, 느끼게 된다. 알게 된다. 누가 누구의 친구인지. 그것은 정녕 나이와 무관한 일이다. 동지라는 근사한 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동지라는 호칭은 매섭고, 친구라는 부름은 다정하다. 내 친구 백기완, 내 친구 문정현.

나는 백기완이 싫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故 이소선 어머니 1주년 추모제'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故 이소선 어머니 1주년 추모제'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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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보니 그의 이름을 안 지 꼭 30년이다. 그때 나는 어렸다.

얼굴을 본 건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이었다. 그때도 물론 어렸지만, 성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거리에서 보았다. 처음 사진기를 들이댄 건 길어야 20년, 짧다면 15년 전이리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의 인상은 편치 않았다. 사진기를 둘러맨 자들이 잠시 앞을 가릴라치면 "야, 이놈들아!"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불편했다. 나를 지칭한 나무람이 아니었대도 모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진기를 든 양아치이거나 훼방꾼인가. 나 자신이 싫었다. 동시에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3년 전이었다. 해고됐다 복직한 노동자 김수억이 다시 받은 첫 월급을 털어 '스승의 날'을 마련하고 싶다 말하고, 함께하자는 손들이 웅성댈 때 사진쟁이들에게 요청이 날아왔다. 그에 관한 사진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기꺼이 도왔지만 그가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밤, 주름진 눈가를 타고 흐르는 그의 눈물을 보았다. 그날 밤, 노동자 김수억도 왜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눈물로 털어놨다. 싫던 마음은 어느새 내 마음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거리에서 싸우는 이들이 내 작업의 '주인공'이 되었고, 어쩌다보니 가까운 친구들이 되었고, 어쩌다보니 비정규직-해고노동자들의 연대쉼터 '꿀잠'을 짓는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마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백기완은 우리 편이었다. 집 짓는 일을 크게 반겼다. 나와 친구들이 그의 삶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로 작당모의하고 붓글씨를 써 달라 했을 땐 단호했다. 거절이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도 했다.

끈질김을 누가 가르쳤나. 그가 가르친 것이었다. 우린 거듭 찾아가 늙은 당신을 괴롭혔고, 끝내 그가 졌다. 약속한 서른여섯 점의 붓글씨를 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는지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당신의 삶을 새긴 붓글씨를 팔아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한 푼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되려 밥을 얻어먹었다. 꿀잠, 지금 그 집이 지어지고 있다.

지난겨울, 여든다섯의 당신은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석하며 하루 전부터 물을 마시지 않았다 했다.

 "늙은 내가 오줌이 마려워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간다는 건, 여럿을 힘들게 하는 일이잖아."

백기완. 나는 이제 그를 사랑한다. 그를 여전히 거리에 머물게 하는 이 시대가 몹시도 불편하다.

분노한 사제 분노한 사자

문정현에겐 참사의 현장이 교회였고 고통받는 이들이 예수였다. 한뎃잠을 마다하지 않았다.
 문정현에겐 참사의 현장이 교회였고 고통받는 이들이 예수였다. 한뎃잠을 마다하지 않았다.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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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 필름에 가장 많이 담긴 이가 누구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문정현입니다.

그를 '싸움꾼이었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그는 오늘도 싸움꾼이다.

그의 곁에서, 그의 싸움을 바라보며, 그 싸움을 사진기에 담으며, 그와 함께한 시간이 어느새 20년이 되어 간다. 그는 이팔청춘 투사였다. 유신의 칼에 죽임당한 인혁당재건위 관계자들의 주검을 온몸으로 지킬 땐 말 그대로 청춘이었겠지만, 강산이 서너 번 바뀌어 육신이 늙은 뒤에도 펄펄 뛰고 날며 싸웠다. 진압경찰의 고착을 뚫고 쓰레기차에 기어올라 포효했다. 미 대사관 앞 은행나무에 올라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규탄했다.

매향리 드넓은 폭격장의 철조망을 자빠뜨렸다. 어린 두 학생을 압사시키고 발뺌하는 미2사단 앞에선 삭발했다. 국방부가 파헤친 대추리 들녘 구덩이에 뛰어들어 내 몸까지 파헤치라고 절규했다. 용산참사 참혹한 망루를 올려보며 그것이 십자가인 듯 기도했다. 해군이 파괴한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을 보듬기 위해 파도치는 테트라포드를 목숨 걸고 건넜다. 경찰에 떠밀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 되었다가 기어이 살아나 다시 길 위에 섰을 때 그를 말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런 그도 새파랗게 어린 용역깡패에게 흰 수염 한 움큼을 쥐어뜯기고 주저앉았다. 바닥에 버려진 한 움큼의 수염을 망연자실 바라볼 때 그를 덮쳤을 치욕에 대해 나는 가끔 헤아려본다.

누군가 그를 분노한 사제라 말한다. 나는 속으로 분노한 사자였지, 라고 답한다. 분노만이 그의 에너지였다. 약한 이들을 짓밟는 강한 자들을 향한 분노.

육신이 낡아가건만 분노와 한탄은 더욱 뜨겁고 깊어 견딜 수 없던 어느 날부터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어언 10년이다. 그의 젊은 벗들은 분노가 새겨진 나무판을 팔아 집 한 채를 지으려 했다. 거리에서 싸우는 비정규노동자의 연대쉼터 '꿀잠'.

멀리 제주에서 올려 보낸 한 트럭의 새김판을 찬찬히 읽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처절한 사람이 있었다. 처절한 사랑이 있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백기완·문정현, 두 어른의 대담집 원고를 읽다가 한 대목에서 멈춘다. "한 발짝만 가자, 한 발짝만 더 가자, 가다가 죽더라도." 문정현은 오늘도, 길 위에 있다.

체면을 거절한 광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좌), 문정현 신부(우)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좌), 문정현 신부(우)
ⓒ 정택용(좌), 노순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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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대를 만났더라면, 두 분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광대가 되었을 것이다. 백기완은 문학을 사랑하고, 문정현은 음악을 탐한다. 두 분의 삶은 이론의 투쟁, 머리의 투쟁이 아니었다. 옳지 않은 일 앞에선 맨몸뚱이를 던져 분노했다. 약자의 고통 앞에선 체면 차릴 것 없이 울었다. 신이 나면 춤을 추었다. 거대한 얼음덩이를 부수는 데 송곳 하나면 된다는 듯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던 우리 시대의 투사, 우리 시대의 광대.

수척해진 두 분의 늙음은 슬프지 않다. 늙은 두 분이 여전히 현역의 투사여야 하는 지금, 여기가 내겐 슬프다.

<두 어른> 표지 이미지
 <두 어른> 표지 이미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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