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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구매하기] '백발의 거리 투사' 백기완 선생님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 공동 저자로 나서서 <두 어른>이란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책 수익금은 비정규노동자들이 '꿀잠'을 잘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데 보탭니다. 사전 구매하실 분은 기사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편집자말]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은 비정규노동자들의 쉼터 '꿀잠'을 마련하기 위해 칼과 붓을 들었다.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은 비정규노동자들의 쉼터 '꿀잠'을 마련하기 위해 칼과 붓을 들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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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겨울, 뜨거운 전화가 왔다. 문정현 신부님이었다.

"송 시인, 내가 뭘 도우면 좋겠어. 꼭 필요한 게 뭐야."(문정현 신부)
"……."(송경동 시인)

"괜찮으니 말을 해봐."(문정현 신부)
"정말 말씀드려도 돼요."(송경동 시인)
"그럼."(문정현 신부)
"용산 참사 현장에 거점농성을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 갈 사람들이 없어요."(송경동 시인)
"그거야. 젊은 사람들이 해야지."(문정현 신부)
"죄송한데, 결의되는 단위가 없어요. 조직들도 모두 어렵다 하고…."(송경동 시인)
"왜들 그러는 거야. 명박이가 무서운 거야."(문정현 신부)
"모르겠어요."(송경동 시인)
"……."(문정현 신부)
"뭣보다 용산 투쟁에 어른이 없어요. 신부님이 오셔서 어른이 되어주시면 큰 힘이 될 거예요. 전 신부님이 오시면 용산은 절반은 지켜진다고 생각해요."(송경동 시인)
"내가 무슨 어른이야. 서울에 어른들 많잖아."(문정현 신부)
"……."(송경동 시인)
"평화바람 동지들이 유랑차 끌고 함께 와준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아요."(송경동 시인)

공권력의 '학살' 용산참사, 그리고 문정현 신부

용산철거민참사가 발생한지 337일째를 맞이한 지난 2009년 12월 22일 저녁 서울 한강로 남일당 빌딩앞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생명평화미사에서 문정현 신부가 손모아 기도를 하고 있다.
 용산철거민참사가 발생한지 337일째를 맞이한 지난 2009년 12월 22일 저녁 서울 한강로 남일당 빌딩앞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생명평화미사에서 문정현 신부가 손모아 기도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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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9일. 용산4가 철거 현장에서 다섯 명의 철거민들이 무자비한 경찰 진압작전 과정에서 불태워져 죽었다. 명백한 공권력 '학살'이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후 간신히 살아난 이명박은 용산 철거민 학살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투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초기부터 엄청난 공안탄압을 가해왔다. 이명박은 자신이 서울 시장으로 있을 무렵 건설투기자본들과 일부 자산가 계층을 위해 서울 전역 100여 곳을 재개발 재건축 뉴타운이 가능하도록 규제들을 풀어줬다. 투기 개발을 보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용산 재개발은 삼성물산과 대림산업, 포스코건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들어왔는데 재개발 이익만 3조 원에 이른다고 했다. 건설 자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리베이트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이명박은 재임 내내 토건 자본들의 이해 대변자였다. 4대강 대운하 사업에 쏟아부은 국민혈세가 자그만치 20조 원, 해외 자원개발 투기에 또, 20조 원. 이명박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사업만 골라서 했다. 국가를 사유화했고, 합법을 가장한 불법 자본 축적을 대리한 자본의 주구(앞잡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계획들이 용산 철거민 학살로 지연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든 추모집회가 불허되고 원천봉쇄당했다.

밝혀진 것처럼 당시 일어난 군포 연쇄살인사건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용산 문제를 덮으라는 청와대발 보도통제도 있었다. 편승한 언론들에 의해 몇 달 전까지 구두방, 도서대여점, 호프집, 24시간 편의점, 옷가게, 김밥집, 포장마차 등을 하던 지극히 평범한 철거민들이 '도심 테러리스트'가 되고, 개발이익의 부스러기들을 탐내는 탐욕스런 '건설브로커'들로 매도당했다. 연대 사회단체들은 불순한 의도로 쓸데없는 사회갈등이나 부추기고 다니는 '전문 시위꾼', '외부세력' 등으로 규정되었다.

극심한 탄압과 전망없는 투쟁을 이유로 여러 사회단체들이 범국민대책위에서 철수해 가기도 했다. 토요일마다 진행한 집중대회가 끝나면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들에겐 바로 출두요구서가 나왔기에 사회자 구하는 게 일이기도 했다. 공동상황실장을 맡아 초기 주로 마이크를 잡아야 했던 김태연 선배는 영안실과 대책위가 함께 있던 순천향병원 정문 앞에서 표적 구속당한 상태이기도 했다.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박래군과 이종회 선배는 이미 준 수배 상태라 여겨 집을 나와 병원 안에서만 생활하던 때였다.

이렇게 극심한 탄압 탓에 도심 추모 집회도 어려워지자 범국민대책위에서는 참사 현장인 용산 4가로 거점농성에 들어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문제는 실행에 옮길 이들이 보이지 않는 거였다.

그러던 때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반대 투쟁 이후 군산에 머물고 계시던 문정현 신부님이 순천향병원을 찾아오셨다. 왼쪽 어깨가 내려 앉아 서울 병원에 올라오신 길이셨다. 곧 핀을 박는 수술을 해야 하셨다. 그런 신부님께 어떤 부탁도 드리면 안된다는 게 대책위 벗들의 사전 당부였지만 난 그만 참지를 못했다.

"제가 얘기했다고는 절대 말하시면 안돼요."

하지만 신부님도 알리바이가 필요하다는 건 잊었다.

"송 시인이 하도 얘기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왔지."

나는 한참동안 '나쁜 놈'이 되어야 했지만 안도했고, 행복했다.

두 어른과 희망버스, 이명박과 공안탄압

한진중공업 부산공장에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1차 희망버스가 도착했다. 두 어른은 맨 앞줄에 서서 부당한 대규모 정리해고를 반대했다.
 한진중공업 부산공장에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1차 희망버스가 도착했다. 두 어른은 맨 앞줄에 서서 부당한 대규모 정리해고를 반대했다.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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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건넨 10여일 후 신부님은 오두희 선배 등 평화바람 벗들과 함께 앰프 시설을 비롯 모든 집회용 기자재가 실린 평화바람 유랑차를 끌고 용산 현장으로 입성하셨다. 비로소 용산 학살 현장을 중심으로 한 장기투쟁이 가능해졌다. 신부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당시 평양까지 간다는 계획이었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오체투지단이 임진각에서 길이 막힌 후 전격적으로 용산 현장으로 결합해 주시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미술전'과 '끝나지 않는 연극제', '행동하는 라디오와 텃밭' 등을 만들며 함께 했던 문화예술인들의 힘도 컸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문화예술계의 연대을 통해 '용산'은 사회적 고립을 피하고 장기적으로 싸워나갈 수 있었다.

신부님은 말없이 매일 용산 추모집회를 지켜주셨고,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이명박의 파상공세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켜주는 '거리의 하느님', '우리들의 하느님'이었다. 그 모든 존경과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친동생인 문규현 신부님이 끝장단식 과정에서 갑자기 심정지 현상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갈 때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용산 투쟁이 끝난 후 다시 짐을 꾸려 한국 천주교의 자성을 요구하며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가실 때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근래 촛불항쟁과 이에 따른 최소한의 시민정부가 들어서며 경찰청에도 국가폭력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용산참사 진상규명'도 과제로 설정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당시 진압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에게도 진상규명과 함께 책임이 물어져야 할 것이다. 부당 전입 하나, 음주나 과실 인사 사고 하나로도 공직자 임명을 제한하는 나라에서 자국의 국민 여섯 명을 공권력 진압 과정에서 불태워 죽인 자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 어느 날 용산 공원에서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신부님 곁에서 어떤 말도 붙일 수 없던 날의 분노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왜, 또. 난 송 시인 전화 안 받고 싶어."(문정현 신부)
"이번엔 간단한 거예요."(송경동 시인)
"거짓말하지 마. … 뭔데."(문정현 신부)
"희망버스 참가비 납부 계좌를 래군 형 명의로 부탁해 만들어놨는데 이명박이 형을 또 잡으려고 해서요. 바꿔야 하는데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송경동 시인)
"그러게 왜 그렇게 했어. 생각이 좀 있어야지. 음…."(문정현신부)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2차가 끝난 후였다. 2차에서만 현장에서 60여 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전국 버스 회사 계좌를 털고, 개인 참가자들까지 소환장을 보내고 있었다. 후일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검찰 조사기록을 받아보니 희망버스 계좌로 참가비 3만원을 입금한 모든 이들의 개인 통장 거래내역 수개월치가 조사되어 있기도 했다. 광우병촛불항쟁 당시 양초공장을 조사한 치졸한 수법 그대로였다.

모든 운동에서 그렇듯 희망버스 공식 계좌 개설자는 사법 처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박래군 형은 문정현 신부님 급은 아니지만 성자급이긴 하다. 박래군 형은 평택미군기지 이전반대투쟁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한차례 구속되어 집행유예 기간인 상태에서 용산학살 범국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으로 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은어로 '쌍권총', 쌍집행유예자'인 형이었지만 흔쾌히 희망버스의 상징으로 서주는 일을 마다지 않았다. 물론 동료들과 함께 얘기해서 실무에는 참여치 못하게 했다. 만약 잡혀 들어가기라도 하면 쌍집행 기간까지 모두 붙여 살아야 되는 벼랑 끝 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그래서 불똥이 래군 형에게 튀는 것을 막기 위해 황급히 계좌 명의를 바꾸려 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 하늘나라 사람을 써야 했다. 사법 처리 대상이 분명한 일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일도 사실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나야 내놓은 몸인 상태였으니 못할 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 좋은 일'들이 한 개인 이름으로만 집중되는 것은 삼가야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여하튼 떠오르는 사람은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 밖에 없었고, 나는 또 뻔뻔하게 신부님께 전화를 드려 죽는 소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1차 희망버스 때도 두 분에 기댄 바가 컸다. 백기완 선생님은 김진숙씨 얘기를 듣곤 당시 추진 중이던 '노나메기재단 건립추진위'로 모인 모든 이들이 희망버스의 추진동력이 될 수 있도록 앞장서주셨고, 문정현 신부님은 1차 때부터 '사전 논의'(?)를 통해 예의 유랑버스를 끌고 부산으로 달려와 주셨다. 1차 희망버스 당시 원천봉쇄를 뚫고 기습적으로 사다리를 타 넘어 '국가기간시설이자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한진중공업 공장 안을 점거해 들어가야 했을 때 주저하는 모든 이들 맨 앞에서 먼저 사다리를 올라 준 이들도 두 선생님이셨다.

들어 간 공장 안의 용역깡패들을 몰아내고 해방구를 선포해야 할 순간. 공장 정문턱 위로 올라가 해방구를 선포하고 사람들이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도록 포효를 내질러 준 것도 두 어른이셨다. 네 분이 올라가 주셨는데 나머지 두 분은 박종철 열사와 박창수 열사 아버님이셨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단지 노동자들만의 투쟁이 아님을 이처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시대의 사진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후 이명박의 공안탄압을 '깔깔깔' 희망모자로 희화화시키며 계속 진행된 희망버스의 첫 인사는 백기완 선생님이 해주셨고, 닫는 인사와 다음을 기약하는 당부는 늘 문정현 신부님몫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불법 폭력집회로 규정하는 현장에서 선포와 결의의 마이크를 잡는 것은 모두 사법 처리 1순위를 자처하는 일들이었다. 모두를 대신해 희망버스의 방패막이 되어 준 두 어른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싸움꾼, 붓과 칼로 집을 짓다

비정규노동자를 위해 칼을 든 문정현 신부(좌)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우)
 비정규노동자를 위해 칼을 든 문정현 신부(좌)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우)
ⓒ 이우기(좌), 유성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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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른은 평범한 싸움꾼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그리고 민중문화 저항문화에 대한 풍요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 세계를 위해 현재를 가장 투철하게 살아 온 분들이다. 정치를, 권력을, 할 일을 못 찾아서 '거리와 광장'에 끝까지 서셨던 분들이 아니다. 거리와 광장에서 노동자 민중 시민들과 함께 해서 '저항권력', '대항권력', '미래권력', '주권자 직접민주주의'의 힘이 발현되도록 하는 일이 어떤 의사당이나 행정부, 법원 등에서 하는 일 이상 가치로운 일일 수 있음을 역사적으로, 직관적으로 보는 분들이었다.

그런 역사의 길을 따라 문정현 신부님은 '지상에서 보낸 한 철' 동안 내내 어딘가에 정주하지 않고 스스로 디아스포라를 자청해서 살아가고 계시다. 어느 때 그는 평택 대추리 주민이었고, 용산4가 철거촌의 난민이었고, 지금은 제주도 강정 주민으로 살아가고 계시다. 백기완 선생님 역시 사는 내내 감옥과 경찰서와 투쟁과 저항의 거리가 집이셨다. 

어쩌다 보니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 시인 주제인데도 시대의 두 어른 곁에서 삶과 운동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런 두 어른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난 누구에게 기대 소위 '운동'이라는 것을 할까. 가장 먼저 상의할 수 있는 백전노장들을 잃으면, 현장으로 바로 달려와 줄 수 있는 최선의 동지들이 떠나고 나면 나는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울까. 현실과 탄압을 핑계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럴수록 더 '앞으로', 더 '투철하게' 온몸으로 정의를 밀고 나가는 시대의 투사들이 떠나고 나면 얼마나 이 시대가 허할까.

그럴 때 들춰보라고 두 어른이 이 책을 남겨주시나 보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테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이 책을 남겨 주시나 보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면 네게 전화를 걸듯 이 책을 들춰보라고 이 책을 남겨 주시나 보다.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변하지 말아야 할 사회적 진실, 행동의 진실이 어떤 것인지를 잊지 말라고 이 책을 남겨 주시나 보다.

물론 아직도 대한민국 어떤 청년들보다 시퍼렇고 꼿꼿한 일상을 살아가시는 두 어른께는 야단맞을 생각이다. 제주 강정에서 군국주의에 맞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있는 문정현 신부님께서는 다시 한반도를 화약고로 만들고자 하는 사드 배치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경북 성주 주민들의 안위가 1번 관심사시다.

백기완 선생님은 오늘도 팔순 노구를 이끌고 싸우는 자들의 거리에 함께 서서 정신이 번쩍 들고 기운이 솟는 말씀을 거들어주신다.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싸움이 왜 그토록 존엄하고 위대한 것인지를 다시금 새기게 된다. 철저한 민중사상의 뿌리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철저히 발 딛고 서야 할 민중․노동의 관점과 대지가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신부님.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만들어보려고 해요."(송경동 시인)
"선생님. 거리에서 장기노숙하며 싸우는 노동자민중들이 자기 집처럼 넘나들 공간 하나를 마련해 보려구요,"(송경동 시인)

그렇게 시작해 작년엔 문정현 신부님이 십여 년에 걸쳐 공들인 서각 80여 점을 몽땅 강탈해 왔다.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어보지 않으셨다는 백기완 선생님께서 무릎을 꿇고 붓글씨 30여 점을 써주셨다. 제국주의의 폭압과 자본의 독점에 맞서 모든 이들의 평화와 평등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항쟁의 거리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두 어른께서 다시 첫 발을 떼주시겠다는 마음들이셨다. 그런 마음들에 또 많은 이들이 공명해주셔서 작년 '두 어른 전'을 통해 2억에 가까운 기금이 모여 올해 8월 비로소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이 문을 열 수 있었다. 그 모든 분들의 마음 또한 살아가는 내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당시 두 어른의 말씀을 좀 더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도록 대담집으로 엮어보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거리의 일을 기획하고 알려 온 <오마이뉴스> 김병기 전 편집장께서 긴 시간 마음을 바쳐 두 어른의 삶의 정수가 될 이야기들을 정리해 주었다. 두 분을 한 자리에 모시는 것만으로도 참 역사적인 책이 될 듯하다. 나아가 두 어른과 마찬가지로 <오마이뉴스>도 책 판매 기금의 대부분을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 건립 기금으로 내주시겠다고 한다. 이 또한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참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1100만 비정규직 시대. N포세대 청년들이 '헬조선'에 비명을 지르는 사회. 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함께 동참하겠다는 당신의 손길 없이는 이 부정의한 역사의 페이지는 쉬이 넘겨지지 않을 것이다.

'두 어른'의 일생의 당부를 간직하고, 이후 시대를 이어 갈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짓는 일에 벽돌 한 장으로 함께 하는 소중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선물이 필요하다면 이런 책에 마음의 글 한 줄 담아 건네봐 주면 참 좋겠다. 책 한 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함께 하나의 역사의 페이지들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여겨주면 좋겠다.

신부님 강탈한 '시인'

비정규노동자를 위해 붓과 칼을 든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
 비정규노동자를 위해 붓과 칼을 든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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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팔아먹어."

언젠가 뵈러 갔을 때 신부님이 내 귀를 잘라질 정도로 꽉 깨물며 하신 말씀이셨다.

"하지만 신부님. 앞으로 1만권은 더 팔아야 꿀잠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어요."

도대체 나는 언제쯤이나 신부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백기완 선생님의 그 거대한 민중사상의 한 실뿌리나마 붙잡을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이 아닌 한 편의 역사를 곰곰 밑줄치며 읽어봐야 할 책. 아니 삶.

그렇게 진중해져야 할 터인데도 글을 쓰는 내내 망나니 시인에게 드는 생각이란.
'담엔 문정현 신부님 흰 수염 한 올과, 백기완 선생님의 그 멋진 갈기 머리 한 올씩을 작은 액자에 한 짝으로 담아 팔면 어떨까.'

이런 불경한 생각 뿐, 아! 나는 언제나 철이 들려나.

*대담집 <두 어른>의 사전판매(1쇄) 전액은 꿀잠 기금에 보태 빚을 갚는 데 사용됩니다.


<두 어른> 책 표지 가안 이미지
 <두 어른> 책 표지 가안 이미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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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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