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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다섯 명은 결국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차라리 천형이라고 믿고 싶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오는 18일부터 사흘간 마지막 세월호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오마이뉴스>는 긴급 기획을 편성해 세월호 마지막 네 가족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이들에게 조그마한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후원(좋은 기사 원고료)은 전액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전달됩니다. (후원하기) http://omn.kr/olvf [편집자말]
16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거치된 세월호 앞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이 해양수산부의 수색 종료 방침을 수용하며 기자회견을 하던 중 미수습자의 이름을 부르자 박영인 군 부모인 박정순, 김선화씨가 오열하고 있다. ⓒ 이희훈
세월호 미수습자 박영인군 가족 박정순(오른쪽), 김선화씨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진도와 목포에서 머무른 컨테이너 하우스를 떠난다. ⓒ 이희훈
박정순씨와 김선화씨는 지난 3년 7개월동안 이미 두 번 장례를 치렀다. 이제 곧 세 번째 장례를 치른다. 아들의 장례를. 시신도 없이. 박정순씨와 김선화씨는 세월호 미수습자 단원고 박영인 학생의 아빠와 엄마다.

영인이의 외할아버지는 지난 2015년 4월 세상을 등졌다. 영인이를 못 본 지 1년 만이었다. 평소 지병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영인이의 소식을 알게 된 후 상황이 악화됐다.

영인이의 친할머니도 그랬다. 건강하던 할머니가 시름시름 앓았다. 영인이를 키운 할머니였다. 방학이 되면 영인이는 늘 할머니를 찾아갔다. 혼자 버스를 타고 강원도까지.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 한 켠에쌓아놨다. 2013년 겨울 영인이가 해 놓은 나무가 2014년 4월에도 남아있었다. 손주가 남겨놓은 나무를 보며 할머니는 애가 탔다. 마음의 한을 몸이 먼저 알아챈 것일까. 림프종이었다. 여섯 번의 항암 치료 끝에 결국 2017년 2월 할머니는 떠났다.

"너무 애타는 마음이라 영인이를 보러 가신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키운 손주, 당신이 다시 보살피러 떠나신 거 같아요. 아들이 그곳에서 할머니 품에 안겨있지 않을까요? 그리워하고 애타던 할머니가 잘 살피지 않을까 생각해요."

엄마의 유일한 위안이다.

제발 아니길

인양된 세월호가 2017년 3월 31일 오전 전남 목포 신항만으로 들어오기 위해 목포 구등대 인근 해역을 지나고 있다. ⓒ 이희훈
16일 오후 전남 목포 신항만에 거치된 세월호 앞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이 해양수산부의 수색 종료 방침을 수용하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그렇게 두 번째 장례를 치른 직후 세월호가 인양됐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는 찾을 수 있을까? 엄마 아빠는 서둘러 목포신항으로 향했다. 기대를 걸면서도 무서웠다. 그 해, 2014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72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단원고 2학년 6반 박영인이 맞는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주머니에서 영인이의 신분증이 든 지갑이 나왔다고 했다. 지갑에는 외할머니가 사는 강원도 홍천행 버스표가 들어있었다. 영인이의 중학교 학생증 두 장도 있었다. 영인이가 태어난 영동세브란스의 병원카드도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아직 구조의 골든타임이 지나지 않았다고 말 할 때였다.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데… 제발 영인이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아, 아니었다.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는 살 수도 있을 때였으니까. 영인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죠. 막연하지만 희망하게 되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죠."

언제부터인가 그 누구의 이름도 불리지 않았다. 하루에 10구 이상의 시신이 발견돼 수습된 날도 있었지만, 어느덧 뜸해졌다. 이제 인정해야 했다.

"이제는 틀렸구나. 영인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어요. 이제 영인이는 없구나. 시신이 되어 돌아오겠구나. 그걸 인정해야 했을 때,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아빠가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래, 시신이라도 찾아 돌아가자, 생각했다고.

잔인한 무소식

세월호 미수습자 박영인군의 교복에 붙어 있던 이름표. ⓒ 이희훈
세월호 미수습자 박영인군의 물건들. ⓒ 이희훈
2014년 추석을 앞두고 영인이의 가방이 나왔다. 영인이의 흔적은 나오는데, 영인이만 없었다. 진도 체육관에 남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피 말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체육관 벽 쪽 계단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계속 시신을 찾았다. 왠지 그 자리가 명당자리 같았다. 중앙 통로에 있던 짐을 챙겨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소식이 없었다.

영인이의 교복이 나왔다. 세월호가 인양돼 수중 수색과 선내 수색이 시작된 후였다. 영인이가 머물던 곳으로 추정되는 4층 객실, 4-2구역이었다. 바다 냄새가 짙게 밴 아들의 교복을 부여잡고 아빠는 울었다.

영인이만 빼고 다 나왔다. 아빠는 바닷가로 들어가고 싶었다. 영인이가 탄 세월호를 코앞에서 보면서 저 큰 배에서 왜 아무 것도 나오지 않나 이해할 수 없었다. 길게 찢어진 세월호가 한스러웠다.

"2016년에 세월호 뱃머리(선수)를 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다 지켜봤어요. 와이어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멈추더라고요. 뭐가 잘못됐나 애태우며 기다렸는데, 몇 시간이 가도 아무 연락이 없어요. 뭐가 어떻게 됐는지 얘기해주는 사람도 없고… 마냥 기다리다 와이어가 찢어져서 인양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기술자들 아닙니까. 제일 잘 하는 사람들, 배 끌어올리는 전문가들이잖아요 .결국 저렇게 찢겼어요, 저게. 그때 제대로 인양됐다면, 영인이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내가 들어가 찾고 싶어요."

지키지 못한 죄인, 찾지도 못한 죄인

세월호 미수습자 박영인군 아빠 박정순씨가 숙소에서 나오면 눈앞에 보이는 세월호를 보며 "처음에는 희망이 었는데...사실 중단안하고 계속 찾고 싶다"며 답답한 심경을 표현했다. ⓒ 이희훈
박정순씨는 세월호 수색중단 기자회견을 마치고 쓰러진 아내를 추스리고 담배 한개피로 연신 연기를 뿜어 냈다. 그리고 참아내던 눈물 한방울을 엄지 손가락으로 몰래 훔쳤다. ⓒ 이희훈
사는 게 참 바빴다. 영인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빠 정순씨는 손을 다쳤다. 가죽 회사에서 일하던 중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갔다. 2년간 병원 신세, 장애 4급 판정.

엄마 선화씨도 늘 일을 했다. 염색하는 원단 공장이었다. 실을 염색할 수 있도록 감아주는 일을 했다. 주간조일 때는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실을 감았다. 야간일 때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일했다. 그 사이 영인이가 컸다. 제대로 신경 쓴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운동을 좋아하는 사내아이로, 알아서 착하고 순하게 컸다. 큰 목소리 낼 일도 만들지 않는 아들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옷에 좀 신경을 쓰는 거 같았다. 뛰어놀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새 이만큼 자랐구나 싶었다. 키가 10cm 넘게 컸다. 내성적이던 아이가 친구들도 사귀고, 거울 앞에 자주 가기 시작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주문하기도 했다. 딱 그렇게 멋을 부리려고 하던 찰나였다. 아직 채 시작도 되지 않은 젊음이었다.

밖을 다닐 수가 없었다. 누굴 만날 수도 없었다.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봐, 부모는 죄인이었다. 내가 자식을 못 지켜서 사고가 났나, 엄마는 늘 자신을 탓했다. 지키지 못했으면 찾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못하고 있으니. 내가 잘못한 게 그렇게 많았던가. 부모는 늘 죄인이었다.

결국 영인이 없는 영인이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지만, 하루에도 마음이 여러 번 바뀐다고 했다. 10년 20년이라도 찾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수백 번 수천 번을 생각하는데, 방법이 안 떠오른다고 호소했다. 정순씨는 "이제는 내 손을 떠난 문제 같아요"라며 "내가 결단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계속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선화씨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배에서 뼈 한 조각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무리인 거 같아요. 유실되지 않았을까… 언제 어떻게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죠. 영인이가 세월호에 탄 거 그거 하나 말고는 분명한 게 하나도 없어요."

엄마와 아빠는 배에서 나온 아들의 가방과 교복, 지갑을 챙겼다. 사주고 싶었던 축구화와 평소 잘 입던 옷도 상자에 넣었다. 이제 아들을 하늘나라에 보낼 준비를 마쳤다.

버틴 세월과 버텨야 할 세월

세월호 미수습자 박영인군 엄마 김선화씨가 숙소에서 아들 사진을 옆에 두고 앉아 있다. ⓒ 이희훈
사실 엄마는 다가올 날들이 무섭다. 영인이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틴 세월을 내려놓고 다시 안산으로 가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일도 하면서 진짜 일상을 버텨야 하는데, 막막하다.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안산에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무서워요. 삶을 어떻게든 이어나가야지 하면서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싶고. 영인이를 품고 큰 아이를 챙기며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든…"

아내의 말에 정순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붉은 눈을 비비며 아빠는 주먹을 쥐었다. 몇 번 헛기침하다 목소리에 힘을 줬다.

"애를 찾는 거 너무 중요해요. 우리에겐 그게 전부에요. 그런데 진상규명 또한 중요합니다. 아이를 찾느라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뿐이에요. 이 배가 사고가 났는데, 왜 났는지, 무엇이 잘못 됐는지. 어떤 방식과 과정을 거쳐서라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세월호 미수습자 박영인군 아버지 박정순(오른쪽), 어머니 김선화씨. ⓒ 이희훈
태그:#세월호, #미수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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