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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는 말에는 불안, 설렘, 용기 같은 단어가 따라붙는 것 같다. 난생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을 때 선뜻 여행가방을 들고 나서지 못한 건 뭔가 불안해서였다. 하지만 꼭 그만큼 설레기도 했다. 나를 집 밖으로 내몬 것은 용기가 아닌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였다. 오래 전부터, 혼자 여행을 한다면 땅이 꽝꽝 언 겨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읽은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고트프리트 뷔르거 지음)에 나온 한 장면 때문이다. 주인공인 허풍쟁이 남작은 친구들에게 러시아로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하필 한겨울에 추운 곳으로 여행을 간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울퉁불퉁 험한 길이 겨울에는 서리와 눈 때문에 매끌매끌해지거든. 그러면 여름보다 더 가기 쉽잖아."

황당무계하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책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나도 꽁꽁 언 길을 나서면 그가 겪은 신기하고 재밌는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십대의 마지막 1월, '혼자여행하기' 미션을 조만간 실행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2월이 다 지나도록 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칼바람은 이미 기세가 꺾였다. 그래도 아직 겨울점퍼를 벗기엔 이른 시기. 날이 더 따뜻해지기 전에 어서 떠나야 했다.

2월 마지막 주, 휴가를 내고 강원도행 버스에 올라탔다. 외딴 국도를 걷고 또 걷는 일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았다. 춥고, 배고프고, 지루하고, 쓸쓸했다. 그래도 눈 쌓인 산과 시리게 파랗던 하늘, 폐를 가득 채운 차가운 공기의 쨍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생한 기억도 지나고나니 무용담으로 변했다. 이후로 몇 년 동안 강원도부터 통영까지, 전국의 눈 쌓인 산을 찾아다녔다. 겨울만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병이 이 무렵부터 생겼다. 가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엔가 조금씩 매여 있는 탓에, 돈과 시간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늘 다음을 기약하곤 한다. 아쉬움은 추운 나라 여행기로 달랜다.

책 속에선 눈발이 휘날리고, 찬바람이 몰아치고, 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는데, 지금 나는 따뜻한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게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겨울은 해도 짧으니 책 읽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따뜻한 차 한 잔에 무릎담요와 전기난로. 이 정도면 방안에서 즐길 겨울여행 준비 끝이다. 이제 책만 있으면 된다.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강은경 지음, 어떤책 펴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강은경 지음 / 어떤책 펴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강은경 지음 / 어떤책 펴냄
ⓒ 어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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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대필, 희곡 집필, 영화 보조출연, 건설현장 '노가다'로, 딱 입에 풀칠할 만큼 돈을 벌며 30년 간 신춘문예에 매달렸다. 나이 쉰을 앞두고 노안으로 돋보기안경을 쓰면서 '인생 볼 장 다 봤다'는 절망감에 절필을 선언했다.'

작가 프로필에 반해 집어든 책이다. '소설가가 되려다가 좋은 시절 깡그리 흘려보내고 노년의 문턱에 들어선 인생 실패자!'(5쪽)라는 생각에 펜을 꺾고 그는 아이슬란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어떤 책에서 본 '아이슬란드에서는 실패가 낙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를 찬양한다'는 한 줄 때문이다.

뚜렷한 직업도,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이도 없던 그는 고모가 가입해 준 보험을 깨고 막노동해서 번 돈을 보태 아이슬란드 행 최저가 비행기표를 끊는다. 370만원을 모두 현금으로 바꿔(그는 카드를 만든 적이 없다!) 여행길에 오르지만 아이슬란드는 '생맥주 한 잔에 만 원, 햄버거 하나가 2만 원쯤 하는' 물가 높기로 악명 높은 나라.

일주일 치 여행경비에 해당하는 돈으로 그는 장장 71일 동안 그곳에서 '버틴다'. 비결은 캠핑과 히치하이킹. 끼니는 라면, 식빵, 미숫가루, 삶은 달걀 등으로 때운다. 여행 9일 째 되던 날에야 처음으로 아이슬란드 음식을, 그것도 마을축제에서 공짜로 맛보는 그야말로 궁색한 여행길. 하지만 그에게도 자부심은 있다.

'히치하이커들은 대부분 20대 유럽 젊은이들이었다. 아시아인은 본 적이 없다. 나처럼 나이 많은 히치하이커는 유럽인이고 아시아인이고 아예 없고. 어쨌거나 아이슬란드는 히치하이킹의 천국이다. 잘 태워주고, 무엇보다 안전하다. 지구 어디 다른 곳에서 이렇게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254쪽)

아이슬란드에는 빙하와 활화산이 공존한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얼음행성'을 촬영했을 정도로 '지구 느낌'이 아닌 곳. 낯선 곳에서 '50년 만에 닥친 악천후'와 자전거를 탄 채로 날아갈 '생애 최고의 바람'을 만나고 절벽에 매달렸다가 미끄러져 죽을 고생을 한다. 30년 소설 쓴 내공이 책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공포에 휩싸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채색 세상에 갇혔다. 아무리 둘러봐도 회색빛 하늘, 회색빛 안개, 검은 땅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원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점점 패닉 상태에 빠져 갔다. '지금까지 사는 게 이랬구나!' 나는 그만 차갑고 딱딱한 땅 위에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했다. 엉엉! 소리쳐 울기 시작했다. 태어나 그토록 큰 소리로 운 적이 없었다. 심장에서 뜨거운 불길과 시뻘건 용암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234쪽)

'불과 얼음의 땅'에서 71일을 보내고 돌아온 후 일상은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그런 일상을 맞는 저자의 마음이 이전과 확 달라졌다. 더 이상 '인생 실패자'라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고, 막노동을 하며 사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나. 실패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책 속의 이야기가 마냥 '무모한 여행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스파시바, 시베리아> (이지상 지음, 삼인 펴냄)

<스파시바, 시베리아> 이지상 지음 / 삼인 펴냄
 <스파시바, 시베리아> 이지상 지음 / 삼인 펴냄
ⓒ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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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숫자 '4'자로 표현하는 세 가지가 있다. 400킬로미터가 넘지 않으면 먼 거리가 아니고, 영하 40도가 아니면 추위가 아니고, 알코올 도수 40도는 되어야 술이다. 바로 시베리아다. 한반도와 연결된 그야말로 혹한의 땅이다. <스파시바, 시베리아>는 가수 겸 작곡가 이지상씨가 무려 열 번이나 러시아를 오가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바이칼 호수, 6박 7일 동안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거쳐 모스크바에 닿는 과정에서 저자는 숫자 '4'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영하 32도, 체감온도 영하 50도를 훌쩍 뛰어 넘는 앙가라 강에서 '화사하게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에 내 몸을 맡기'는 듯한 체험을 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의 한증막처럼, 러시아에선 뜨겁게 달군 돌에 물을 부어 올라온 수증기로 사우나를 한다.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면 밖으로 나가 얼음 깬 강물에 풍덩 빠진다. 추위라기보다는 고통, 공포라는 말이 적절하다. 하지만 물 밖으로 나온 순간 세상이 달라진다.

'단지 7초 혹은 8초 정도 되는 짧은 시간인데도 입수 전의 오한은 간데없고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체감온도는 상쾌한 훈풍으로 바뀌어 있다. (중략) 그새 기온이 바뀌었나 싶어 머리카락을 더듬어 보니 몇 개의 덩어리로 뭉쳐 꽁꽁 언 고드름만 잡힌다. 내 보잘것없는 몸도 시베리아의 극한을 포근한 갈바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33쪽)

저자는 바이칼 호수의 어느 숙소에서 컵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숙소마다 하루 사용할 물의 양이 배정되어 있어 물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런데 바이칼이 어떤 곳인가. 전 세계 담수량의 무려 20퍼센트를 담고 있는, 세계 최대 담수량을 자랑하는 곳 아닌가. 그는 '물의 천국에서 물 부족 현상'을 겪으며 투덜대기보다 '바이칼이 없으면 관광객도 없고 삶도 없다는 그들의 기본 철학'을 떠올리며 감탄하고 고마워한다.

그는 러시아 곳곳에서 마주친 우리 역사의 흔적도 살핀다. 이르쿠츠크 자작나무 숲에서 홍범도, 최재형, 김알렉산드라, 이동희, 강우규 등 일제시대 독립을 위해 애쓰다 이국땅에서 스러져 간 이들을 떠올린다.

'그 숲에서 나는 오래전 가지가 꺾인 나무들부터 눈길을 들이대며 이름을 붙여 주었다. (중략) 모두 내가 사는 분단의 땅 남쪽의 역사에서는 사라진 인물들이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붙이다가 어느 순간 그 거대한 숲에 무릎 꿇고 앉아 보드카 한 잔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한의 땅 시베리아에 와서야 떠올리는 게 가능한 이름들이라니 너무 죄송하지 않은가.' (133)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듯한,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일화들도 흥미롭다. 감성과 재미와 정보와 지식까지 모두 맛볼 수 있는 알찬 책이다.

<세상의 끝, 오로라> (이호준 김진석 지음, 예담 펴냄)

<세상의 끝, 오로라> 이호준 김진석 지음 / 예담 펴냄
 <세상의 끝, 오로라> 이호준 김진석 지음 / 예담 펴냄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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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해보고 싶은 것 한 가지를 들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오로라 여행'을 꼽는다. 눈앞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망측한 생각도 한다. 어쩌면 나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오로라와 별빛 가득한 곳이라고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반드시!) 떠날 오로라 여행을 미리 답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끝, 오로라>를 펴들었다.

이 책은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 노르웨이 트롬쇠까지, 유럽 15개국을 거쳐 오로라를 찾아 떠난 여행의 기록이다. 글도 글이지만, 책 중간에 나온 오로라 사진이 기가 막히다.

저자 말로는 오로라가 '펄럭이'고, '춤을 춘'단다. 오로라는 한 순간도 멈춰 있지 않은 역동적인 빛이다. 그러니 내가 넋을 놓고 본 책 속의 정지화면은 진짜 오로라의 만분의 일도 아닌 거다.

중국에서 온 신혼부부는 드레스와 정장만 입고 이 오로라를 배경으로 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영하 40도의 추위에 방한복을 빌려 입어야 하는 날씨에 말이다. 내 신혼여행은 어땠지? 오로라를 보기 위해 여행을 간다는 게 아주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냥 보통 여행 가듯,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인 거였다. 물론 돈도 모아야 하고. 오로라여행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려준 책이다.

<북극여행자>(최명애 지음, 작가정신 펴냄)

<북극여행자> 최명애 지금 / 작가정신 펴냄
 <북극여행자> 최명애 지금 / 작가정신 펴냄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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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해마다 북위 66.5도 북극선을 따라 여행한 기록을 담은 책. 저자는 북극곰을 보기 위해 남편과 결혼을 했을 정도로 '북극'마니아이다.

저자는 노르웨이에서 하루 내내 해가 지지 않는 백야를 경험하고 캐나다 처칠에서 쓰레기 매립장에서 먹을 것을 뒤지고 있는 북극곰 가족을 만난다.

알래스카에선 흰돌고래 수프, 고래 고기, 희귀 조류로 끓인 수프를 먹으며 '내 평생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멸종위기종을 먹어치우기는 처음'(270쪽)이라며 미안해한다.

북극권을 여행하는 동안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환경과 생태. 낯선 여행지의 소소한 에피소드와 함께 사라져가는 생명과 파괴되는 지구 환경에 대한 안타깝고 따뜻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 실패를 찬양하는 나라에서 71일 히치하이킹

강은경 지음, 어떤책(2017)


세상의 끝, 오로라 - 여행자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이호준.김진석 지음, 예담(2016)


스파시바, 시베리아

이지상 지음, 삼인(2014)


태그:#겨울여행,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스파시바 시베리아, #세상의 끝, 오로라, #북극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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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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