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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교수신문은 이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았습니다. 촛불, 탄핵 인용, 조기 대선... 연이어 큰 사건을 경험한 2017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을까요. 내년엔 '파사'를 넘어 '현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올해 상황이 달라진 사안들, ‘보도 그 이후’가 알고 싶은 기사들, 사연 속 주인공의 현재가 궁금한 사례들을 모아 '2017 비포 앤 애프터'를 구성했습니다. [편집자말]
문재인 대통령이 11월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국회 본회의 상정에 따른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 문재인 대통령, 시정연설 위해 국회 도착 문재인 대통령이 11월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국회 본회의 상정에 따른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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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사실 크지 않았습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말고 지난 대선 기간 내내 뭔가 확실하거나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존경받던 인권변호사 시절의 문재인이 정치인 문재인으로 탈바꿈하고 난 뒤 어떤 정치적 업적을 쌓아갔는지 콕 집어 기억나는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 문재인이 대통령 문재인이 되고 난 뒤 놀라움은 커져만 갔습니다. 매일 매일 언론에 보도된 문재인 정부의 행보는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과는 너무나도 다른 훌륭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는 대통령의 모습이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질 좋은 일자리를 늘리고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언은 단순히 정치적 수사라고 폄하할 수 없었습니다.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에서 '이게 나라다'라고 환호하게 만들었습니다.

최저임금은 어떠합니까. 2018년 최저임금은 7,530원으로 이는 2017년 최저임금 6,470원과 비교했을 때 16.4%로 인상된 금액이고, 11년 만에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기록한, 2001년 이후 최대 폭의 인상이었습니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시대를 열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이 지켜질 것이란 안도감을 갖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최저임금이 곧 실질임금이 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전 국민의 임금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했습니다.

고용노동부의 파리바게뜨 제빵사에 대한 근로감독→불법파견 판정→시정지시→과태료부과로 이어지는 이런 일련의 신속하고도 적확한 행정을 지켜보는 것도 드문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간 고용노동부가 노동자가 아닌 기업의 이익에만 손을 들어주는 일이 워낙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법과 원칙대로 일만 해도 놀라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런 적확한 일처리가 있었다면 정규직 전환에 걸린 10년이 넘는 시간도, 대법판결 동일 이행을 요구하며 벌인 파업도, 그로 인해 목숨을 끊거나 구속된 노동자들도,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배가압류 소송도 없었을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놀라운 일은 열사 투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죽어갔는지, 살아남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상복을 입고 향내를 맡아야 했는지, 그 공포와 두려움을 견디며 싸워갔는지 열거하기도 버거울 정도였습니다.

죽음의 행렬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지난 행보가 적어도 목숨을 버리고 싸워야 하는 참혹함과는 다른 결에 서 있었다는 점은 지난 9년간 쌍용차 정리해고로 죽어간 29명의 동료와 가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열사를 지켜봤던 목격자로서 매우 고무적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의 비극 속에서 살고 있다

특성화고등학생 권리 연합회 회원들이 지난 11월 23일 오후 서울 시청 앞에서 제주현장실습에서 사망사고로 숨진 고3 고 이민호군의 추모식을 열고 있다.
 특성화고등학생 권리 연합회 회원들이 지난 11월 23일 오후 서울 시청 앞에서 제주현장실습에서 사망사고로 숨진 고3 고 이민호군의 추모식을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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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타깝게도 죽음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한 해 수천 명에 달합니다. 똑같은 현장에서 죽음이 반복되고, 언론에서 보도되고, 안전대책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이름만 바뀐 죽음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성화고 실습생 사망 사건이 이어지고 있지만 매년 수능이 끝난 뒤 전해지는 비보처럼 지역만 달리한 채 어느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반복을 되풀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중소영세 사업장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을 무력화하기 위해 상여금을 깎고 매달 월급으로 나누거나 수당을 기본급에 포함시키는 꼼수가 횡행합니다. 기업들끼리 공유하는 정보가 아니라 지자체에서 지역 기업대상으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대처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나왔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이 아니라 또 다른 임금체계로 편성된 무늬만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합니다.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니까 일부 지자체에서는 정규직 전환 제외 대상인 60세 이상을 고용하고 채용 계약을 8개월 이하로 체결하겠다고 합니다. 파리바게뜨는 제빵사들을 법이 정한대로 정규직 전환하는 게 아니라 별도의 법인을 두고 고용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대책이라고 내놓았습니다.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로 가자는데 곳곳에서 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차고 넘칩니다.

박근혜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나섰다가 수배 상태에 있는 민주노총 이영주 사무총장이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단식 농성을 이어가다 결국 체포됐습니다. 이 사무총장이 단식을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장시간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자고 노동자들이 요구하니 장시간 저임금 구조로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겠다고 국회가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권 때에도 이뤄지지 않았던 일입니다.

경찰 지명수배 상태로 더불어민주당 당사에서 단식농성을 해온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이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나오고 있다.
 경찰 지명수배 상태로 더불어민주당 당사에서 단식농성을 해온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이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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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에 의해 불법과 폭력으로 낙인 찍힌 민중총궐기투쟁으로 감옥에 갇힌 한상균 위원장을 비롯한 구속노동자 석방, 부당한 수배해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이뤄졌던 부당한 사법판결에 대해 바로 잡기를 요구하는 것은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국정기조와 상이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재계가 요구해서 근로기준법에 대한 타협을 해야 하고, 보수세력이 반대해서 사면은 어렵다는 답변만 내놓고 있습니다.

현재 여당인 민주당은 그동안 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국회의원 수가 부족해서 어렵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청와대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정당 지지율이 낮아서 힘 있게 정책을 추진하기도 조심스럽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지금만큼 민주당에게 좋은 시기는 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천만이 넘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함께한 촛불광장의 요구인 적폐청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적폐청산 의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힘들고 어렵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박근혜 정권 이후 우리 삶은 나아지고 있습니까?

한상균 위원장은 지난 2월 옥중서신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관련 기사 : 한상균 "박근혜,이재용씨 감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박근혜 탄핵 후 새로운 대한민국이 가능할 것인가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감옥에 있는 몸이라 잘은 모르지만,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욕구를 선언만 하고 요구만 한다면 불가능할 것이고, 광장의 촛불연대를 더욱 굳건히 하면서 주권자의 이름으로 준엄한 명령을 한다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위대한 시민들과 동지(同志)로 한편이 되고 싶습니다. 함께하는 데 서툴고 부족한 점 반성하며 내민 손을 따뜻한 가슴으로 잡아주십시오. 기득권의 저항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맞잡은 손 놓지 않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연대의 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동지가 됩시다. 동지라 부르고 싶습니다. 동지들 사랑합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성공'

지난 2015년 12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서울 종로구 조계사 생명평화법당에서 자진 출두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어 '비정규직 철폐'라고 적힌 머리띠를 매고 있다.
▲ '비정규직 철폐' 투쟁 머리띠 매는 한상균 지난 2015년 12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서울 종로구 조계사 생명평화법당에서 자진 출두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어 '비정규직 철폐'라고 적힌 머리띠를 매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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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노동 존중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 또한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언 속에 갇힌 존중이 아닙니다. 청와대 만찬의 초대가 아닙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진짜 존중입니다. 전 사회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노동혐오를 중단시키는 것이 질 좋은 일자리의 시작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계적인 중립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적폐청산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 권력을 시장에 팔았을 뿐입니다. 부자들과 기업의 이익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노동자와 시민들의 삶을 위한 정책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그 선택이 문재인정부의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고동민씨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입니다.



태그:#한상균, #민주노총, #노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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