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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우리 가족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보내는 마지막 해이다. 올 1년 이 곳에서의 시간들을 더 충만히 채워가기로 다짐하며 새해를 맞았다. 그렇게 시작한 2018년을 일주일 남짓 보내고 있던 아침. 아이의 등교 준비를 하다 문득 한국에서의 바빴던 아침이 떠오르며 '내년에 귀국한 후엔 어쩌지'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난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시간제로 상담일을 하는 '직장 맘'이자 '공부하는 엄마'였다. 그리고 돌아가면 다시 나의 치열한 일상을 살아갈 예정이다.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자면, 아이의 방과 후가 늘 문제였다. 친정 부모님은 안 계시고, 시댁은 다른 지방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곳이 부재한 상태에서 아이는 낯선 '이모님'과 함께 지내는 걸 싫어했다.

때문에 우리 부부는 최대한 둘이 시간을 맞춰서 내가 학교에 가거나 일하는 날엔 남편이 정시 퇴근 해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 둘 중 누구에게라도 돌발 상황이 생기는 날엔 어김없이 그 뒷감당은 내가 해야 했다.

학교에 있다가도 남편에게 '오늘 회식 있음' 이렇게 문자가 오면, 난 교수님께 사정을 설명 드리고 수업 중 교실을 빠져나오곤 했다. 내가 발표를 해야 해서 그마저 안 되는 날이면, 쉬는 시간에 아이 친구 엄마나 같은 아파트의 이웃들에게 전화를 돌려 사정을 설명하고 아이를 부탁했다. 갑작스레 일이 생겨 약속을 못 지키는 게 남편이든, 나이든 구멍 난 자리를 매우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렇게 간신히 학업과 일을 병행해왔던 그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니 그게 1년 후이긴 하지만,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을 지금부터라도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 아침 남편에게 물었다.

"한국 돌아가면 내가 학교 가거나 일 하는 날 오후에 집안일도 도와주고 아이도 봐주는 도우미 이모님을 오시라 할까? 이제 좀 컸으니까 이모님하고도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은 아무 답이 없었다. '뭐 1년이나 남았는데 그 때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내 꿈을 포기할 수 없기에, 그리고 아이도 포기할 수 없기에, 지금부터 무슨 대책을 세워놔야만 할 것 같았다.

왜 '직장대디'는 없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 앞서 새해 국정운영 구상이 담긴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 앞서 새해 국정운영 구상이 담긴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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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밴쿠버 시간으로 이 날 저녁(한국시간 10일). 한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를 발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멀리 있으면 고국이 더 궁금해지는 걸까. 한국에 있었으면 그냥 연례행사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대통령의 신년사 전문을 찾아 읽었다.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다짐과 중요한 정책들이 많이 있었지만, 내겐 딱 세 구절이 마음에 와서 꽂혔다.

'방과 후 혼자 있는 아이를 걱정하는 직장 맘'
'직장 맘의 걱정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여성이 결혼, 출산, 육아를 하면서도 자신의 삶과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방과 후 아이 걱정을 하는 직장 맘의 마음을 대통령이 알아주고, 이 걱정을 덜어주며, 결혼, 출산, 육아는 물론 자신의 삶을 지켜가는 사회를 만들어 주신다니. 정말 고마운 말이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너무나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왜 직장 맘만 아이 걱정을 하는 거지? 아빠는 어디로 간 거야? 일하는 엄마는 직장 맘인데, 일하는 아빠는 왜 '직장 대디'가 아닌 거지?'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아동수당이 지급되고, 국공립 어린이집이 늘어나고, 보육서비스의 질이 좋아지고, 온종일 돌봄 서비스가 확대되면, 정말 엄마들이 일하기 좋을까? 물론, 그럴 것이다.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있으면, 아무래도 일하는 데 조금은 편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육 시설이 늘어났건, 지원금이 늘어났건 결국 육아에 대한 책임을 엄마 혼자 오롯이 지는 일상은 바뀌지 않을 테니 말이다.

갑작스레 주말에 일을 해야 하거나, 공부를 더 하고 싶을 때 엄마들은 또 미안해하며 아이를 봐줄 사람을 구해야 할 것이다. 주중 내내 열심히 일했던 엄마가 주말에 재충전할 시간을 갖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여전히 불가능할 것이다.

'직장 맘'이라는 표현에는 아무리 일에서 전문가라 하더라도 엄마로서의 정체감을 잊지 않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아빠에게는 '직장 대디'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이는 대다수의 아빠들이 부모로서의 정체감을 일터에서의 정체감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사회에서의 정체감과 엄마로서의 정체감을 동시에 생각하는 엄마들과 아빠로서의 정체감보다 사회에서의 정체감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빠들. 때문에 육아에 대한 책임은 아직까지도 대부분 가정에서 엄마의 몫인 경우가 많다.

대통령의 약속, 효과 제대로 발휘하려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직장 맘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 대신 '부모들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라며 육아정책을 설명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직장 맘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 대신 '부모들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라며 육아정책을 설명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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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통령이 약속한 지원들이 제대로 그 효과를 발휘하려면 남편들이 좀 더 아빠로서의 정체감을 가지고 '직장 대디'가 되어 '직장 맘'이 홀로 지고 있는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단순히 누가 더 아이를 많이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지와 같은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정신적으로, 동등한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하자는 뜻이다. 아이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에 관심을 가지고 아이의 스케줄을 알고 있는 아빠, 아내가 늦는 날 갑작스런 약속이나 회식은 거절할 수도 있는 남편, 주말에 아내가 재충전을 해야 할 때 기꺼이 자신의 약속쯤은 접고 함께 해 줄 수 있는 남편.

그리고 아빠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 회식에 가지 않겠다'는 게 흠이 되지 않는 기업문화. 가정과 사회에서 이런 변화들이 함께 할 때 국가의 지원도 효과를 발휘할 것이고, 여성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혼인신고를 하면서 자녀의 성을 엄마, 아빠 누구로 할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아빠 성이라고 답을 하다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 사회에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우리의 일상이 달라지지 않으면,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육아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늘 함께하는 남편, 나와 가장 친밀한 관계인 남편의 태도가 달라질 때, 육아가 엄마의 일이 아닌 엄마 아빠 모두의 일이라는 인식이 확대될 때, 여성들이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저녁. 남편에게 1년 후 우리의 아이 돌봄 계획에 대해 다시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당당히 요청해야겠다. '알아서 정하면 도와줄게'가 아니라 고민단계부터 진심으로 함께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직장 맘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 대신 '부모들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라며 육아정책을 설명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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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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