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人 人 人 人 人

중학교에 입학한 후 첫 번째 한문 시간에 선생님은 칠판에다 큰 글씨로 '사람 인(人)'자를 다섯 개 쓰고 나서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셨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뚝뚝 끊어서 말씀하셨다. 아주 짧은 말이었지만 그때의 메시지는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뜻의 고유어 '사람'에 대응하는 한자가 '인간(人間)'인데, 사람(人)과 사람 사이(間)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환갑이 다되도록 살아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임을 절실히 느낄 때가 적지 않다.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사람답다는 말은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산상보훈 가운데서 나오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황금률은 사람의 도리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행복하려면 남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고, 내가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사람의 도리이다.

아기가 옹알이할 무렵부터 '도리도리 까꿍', '곤지곤지 잼잼' 등의 소리를 하며 어르는 것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육아법 '단동치기십계훈(檀童治基十戒訓)'에서 유래한다는 내용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단군왕검의 혈통을 이어받은 배달의 아이들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가르침이라면서 적어 놓았는데, 예컨대 '도리도리 까꿍(道理道理 覺躬)'을 '머리를 좌우로 흔들 듯 이리저리 생각해 도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뜻'으로 풀이해 놓았었다. 무척 그럴듯하게 생각되어 출전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견문이 적어서인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출전은 불확실하지만 많은 사람이 진실로 믿고서 서로서로 인용하여 많이 알려진 것 같다. 단군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자손으로 하여금 하늘 백성의 정체성을 주지할 필요가 있어서 애무요(愛撫謠)로 만들어 아기의 무의식 속에 심어주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단동십훈'의 근거가 분명하다면, 옛날 우리 조상들은 자녀가 아기 때부터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습관화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단동십훈'은 <격암유록> '농궁가(弄弓歌)'에 대부분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네 가지'를 볼 줄 알아야

젊은 시절 전국문화원연합회 기자로 근무할 때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에 대하여 쓰려고 그의 고향인 울진으로 취재를 갔었다. 남씨 문중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격암 사당과 묘소 등을 둘러본 후 종갓집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여러 기록을 살펴보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격암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천문·지리 등에 통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속에서 공부할 때 신인(神人)을 만나 '비결'을 받았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신인을 만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놀랍도록 앞날을 예견하여 조선 최고의 예언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명성이 너무나 유명하여 전국에서 그를 빙자한 예언들이 끊이질 않았다. 구한말에 와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내용을 첨삭하고 윤색하여 마치 격암이 직접 말한 것처럼 세상을 현혹하는 무리가 많았다.

<남사고 비결>은 <격암유록>이라고도 하는데, 수많은 책이 출간되었으나 위작이 많아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일본식 한자로 표기된 철학 용어와 성경 용어, 심지어는 성경 일부를 고스란히 베껴 놓은 구절도 보이고, 파자법(破字法)으로 기록한 인물은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농궁가'는 단군의 '단동십훈'에서 근원하여 동학으로 이어진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알뜰하게 담아냈다. 갓난아기도 하늘님처럼 섬기라고 중의적으로 표현한 가사 속에 사람을 '四覽(사람)'이라고 표기한 한자가 나온다. 아주 생경한 단어였는데, 느낌이 강렬하여 늘 머릿속에서 빙빙 돌며 떠나지 않았다.

그 후 동양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만나면 이것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고, 갖가지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넉 사(四)'는 <주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을 함축하며, '볼 람(覽)'은 '볼 감(監)'과 '볼 견(見)'을 합한 글자로, '두루 비교하여 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네 가지를 볼 줄 알아야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 가지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동서남북, 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천지만물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가지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얼굴에 있는 이목구비가 열려야 한다. 귀가 열리면 총(聰)이요, 눈이 열리면 명(明)이다. 사람은 총명해야 사리를 분간할 수 있다. '귀밝을 총(聰)'을 파자해 보면 귀(耳)도 있고 마음(心)도 있다. 마음의 귀로 듣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사람마다 얼굴에 두 눈을 가지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만을 보면 속기 쉽다. 두 귀를 가지고 있지만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 들으면 헛소리에 현혹되기 쉬운 법이다.

누군가는 젖먹이 아기를 기르는 현명한 어머니의 눈과 귀가 바로 총명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아기가 우는 소리를 멀리서 들어도 아파서 우는지 배고파서 우는지 단번에 알아듣고, 아기의 얼굴만 보아도 즐거워하는 괴로워하는지 단번에 알아본다. 이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듣는 까닭이다.

'사람(四覽)'이란 한자에 나름으로 의미를 부여하고부터 가끔 '人 人 人 人 人, 四覽'이라고 첫머리에 쓸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실망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날 때 주로 쓰는데, 이어지는 글은 그날의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마구 들끓는 생각도 글로 쓰다 보면 정리가 된다. 감정을 진정시키고 평상심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어른이 된다고 철이 저절로 드는 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값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바닥의 벽지가 보이지 않도록 트리밍 부탁합니다.
▲ 四覽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값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바닥의 벽지가 보이지 않도록 트리밍 부탁합니다.
ⓒ 이명수

관련사진보기


사춘기 무렵부터 청년기 때까지 나는 상당히 거친 일면이 있었다. 욱하는 성질이 있어 눈에 거슬리면 주먹다짐도 피하지 않았다. 운동신경이 둔해 싸움은 못 했지만, 일단 누군가와 맞싸우면 이기든지 지든지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한 번은 학교에서 유명한 악동과 싸우게 되었다. 그의 현란한 싸움 기술에 나는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코가 깨져 얼굴이 피범벅이 되고서도 나는 무섭도록 싸움에 집중했다. 서너 대 맞는 동안 한 대쯤 때리면서 악을 썼다. 둘 중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해보자며 마치 오뚝이처럼 맞서 싸우자, 끝내는 싸우다가 지친 상대방이 도망을 쳤다. 그 후로는 다시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시비 끝에 주먹으로 싸우다가 경찰서에 붙잡혀간 적도 두어 번 있다. 모두 다 내 어머니께서 이리저리 손을 쓰고 눈물로 호소하여 훈방으로 풀려났다. 그렇게 풀려난 후 단단히 꾸중을 들었다. '제발 철 좀 들어라!' 하면서 야단을 치시다가 서러움이 북받쳐 울면서 길게 훈계하실 때 나도 덩달아 울면서 앞으로는 절대로 주먹질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었다.

'철없다'는 형용사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지각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나이가 어려 복잡다단한 세상일을 모르고, 생각이 깊지 못하기에 실수와 오류를 저지르기 쉬운데, 철부지 때의 행동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일도 있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는 것을 보면 누구나 봄인 줄 안다. 그것을 모른다면 철을 모르는, 즉 철부지이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에서 왔다.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을 구분할 줄 모르니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해야 할 일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를 구분 못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농경사회 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때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 조상들은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농사의 최적기를 정해 놓고 때맞춰 일했다. 예를 들면 곡우 때는 못자리를 하였기에 무척 중요한 농기(農期)였다. 농사는 시기를 놓치면 1년 농사를 망치거나 그만큼 손실을 보기 때문에 절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저절로 지혜로워지고 철이 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늙는 것 빼고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을 통해 지식과 지혜가 어느 정도 쌓이고, 세상 물정을 안다고 생각하다가도 철없고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직시할 때가 적지 않다.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욱하는 성질도 마음 밑바닥에 그대로 도사리고 있고,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쳐 경솔하게 처신하기도 한다. 편견과 선입견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사람마다 철을 아는 수준은 다르다. 그냥 봄·여름·가을·겨울 사철을 아는 수준부터 천문과 지리를 두루 꿰뚫는 높은 수준까지 천차만별이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의 수준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무직한 내공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고 금방 바닥이 보이는 가벼운 사람도 있다. 자기 수양이 잘되어 있는 사람은 언행에 깊이가 있다. 어느 사회에서나 나이가 어리거나 젊은 사람의 실수에는 비교적 너그럽다. 철이 없기 때문이라며 기회도 주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는다면 실수를 만회할 시간이 있으므로 희망적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실수하게 되면 나잇값도 못 한다고 비난이 따른다. 젊은이보다 만회할 시간도 많지 않으므로 그 실수로 말미암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영영 헤어나질 못할 수도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값을 못 하는 것처럼 안타깝고 슬픈 일이 또 있으랴!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올린 예정입니다.



태그:#도리도리, #까꿍, #사람값, #단동십훈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