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거: 유관순 이야기>.

<항거: 유관순 이야기>. ⓒ 디씨지플러스, 조르바필름


광해군·사도세자·정조 못지않게 유관순에 관한 이야기도 언제 들어도 지겹지 않다. 매번, 항상, 새로운 감동을 주는 인물이라는 느낌이 오는 27일 개봉 예정인 조민호 감독의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보면서 생겼다.
 
열일곱 살짜리 소녀가 무슨 철이 들어 '대한독립 만세!'만 외치다 순국할 수 있었겠느냐고 비웃는 이도 없지 않다. 조작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하지만 17세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지금과 달랐으며, 당시로서는 고학력자인 고등보통학교(중학교) 재학생이었다는 점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장터 시위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으니, 17세 아니라 10세라도 일본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16년 촛불집회 때 유관순보다 어린 학생들이 뛰어나온 사실을 생각하면, 17세 여성의 정치 의식을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온종일 감방 안을 줄지어 순례하는 수감자들

배우 고아성이 주연한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주인공이 양력 3월 1일 서울 시위에 참가한 데 이어 음력 3월 1일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스토리의 주된 부분은 수감 생활이다. 수감 이전 상황은 유관순의 회상을 통해 영화 중간 중간에 제시된다.
 
부모도 잃고 자유도 잃은 채 수감된 영화 속 유관순을 괴롭히는 게 감방 안에 또 있다. 너무나도 열악한 감방 구조다. 그가 수감된 감방은 대여섯 명 정도만 발 뻗고 누울 수 있을 듯한 공간이다. 그런 곳에 20명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갇혔으니, 그 고통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간수의 안내를 받아 8호실 감방 문을 처음으로 열고 들어가는 유관순의 시선을 가로막은 것은 빽빽이 서 있는 수감자들이다. 출퇴근 시간대의 만원 지하철에 빽빽이 서 있는 승객들처럼 감방 안에 수감자들이 그렇게 운집해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감방이 비좁다.
 
이런 속에서 수감자들은 고도의 협동심을 발휘한다. 눕지도 못할 곳에 빼곡이 앉아 있으면 다리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며, 다들 일어서서 온종일 감방 안을 줄지어 순례한다. 밤에는 대여섯 명씩 번갈아 잠자고 나머지는 서 있는다.

실제로도 매우 비좁은 서대문형무소 여성 감방
 
 비좁은 감방.

비좁은 감방. ⓒ 디씨지플러스, 조르바필름

 
영화 속 장면이라 좀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실제의 서대문형무소 여성 감방도 매우 비좁았다. 역사학자 박경목은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여(女)수감자 현황과 특징'이란 논문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수감되었던 것에 비례하여, 여성 수감자 또한 전국에서 가장 많이 수감되었"다고 말했다.
 
1937년을 기준으로, 전국 수감자 중에서 여성 수감자가 3.3%인 것에 비해 서대문형무소에서는 그 비율이 7.8%였다. 다른 형무소에 비해 여성 수감자 비율이 2배 이상 높았던 것이다. 3·1운동 얼마 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여성 감방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위 논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기결감(기결수 수용동)는 초기 144.5㎡(43.79평)에 큰 감방(8.74㎡; 2.65평) 8개와 작은 감방(4.08㎡; 1.23평) 2개로 구성되었다가 1936년 증축되어 큰 감방 4개(크기 앞과 동일)가 늘어났다. 미결감(구치감)은 79.9㎡(24.21평)에 큰 감방(크기 앞과 동일) 2개와 작은 감방 6개로 구성되었다."
-한국근현대사학회가 2014년 발행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8집에 수록.
 
큰 감방은 8.74㎡, 작은 감방은 4.08㎡라고 했다. 큰 감방은 가로·세로 각 3m가 안 되고, 작은 감방은 각 2m가 약간 넘었던 것이다. 3·1운동 17년 뒤인 1936년을 기준으로 할 때, 여성 감방의 1인당 수용밀도는 아래와 같다. 위 논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1937년 서대문형무소의 여성 수감자가 193명이므로 평당 수용밀도는 4.1명이나 되었다. 2.65평 남짓의 큰 방에 10~11명, 1.23평의 작은 방에 5명이나 수용되었다. 1930년대 전국 감옥의 수용밀도가 1평당 3.12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여성의 수용밀도가 1명이 많고, 일본 감옥의 수용밀도가 1.19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조선 여성들은 1평당 3명이나 많은 밀도로 수감되었다."
 
가로·세로 각 3m가 안 되는 큰 감방에 10~11명, 각 2m가 약간 넘는 작은 감방에 5명이 수용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1937년 상황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수감됐다. 이정은(남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 쓴 <3·1운동의 얼, 유관순>은 이렇게 말한다. 1919년을 기준으로 한 설명이다.
 
"서대문감옥은 500명이 정원이었다. 하지만 3·1운동 후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이 수감되고, 그 후 시위운동으로 붙잡혀 온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기결수·미결수를 합해 3000명이 넘었다."
 
500명 정원인 1919년 당시의 서대문형무소에 정원을 6배나 초과하는 인원이 수용된 것이다. 이랬으니, 여성 감방 수용밀도도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투쟁심을 잃지 않았던 유관순

그 밀도를 높이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다른 시기의 항일투쟁과 달리 3·1운동 때는 여성들이 특히 많이 가담했다. 여느 때는 주로 지식인들이 참여한 데 반해 이 시기에는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수감자 숫자가 다른 때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큰 감방에는 '10~11명'의 몇 배, 작은 감방에는 '5명'의 몇 배가 수용되었으리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항거: 유관순 이야기> 속의 감옥 실태가 그렇게 과장됐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영화 속 유관순은 투쟁심을 잃지 않는다. 제국주의 침략자에 대한 분노가 그의 심장 속에서 잠시도 식지 않는다. 유관순이 이 정신을 지키면서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시위를 조직하는 과정을 영화는 묘사하고 있다. 불사조 같은 유관순의 정신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우내 장터 시위에서 쓰러진 유관순.

아우내 장터 시위에서 쓰러진 유관순. ⓒ 디씨지플러스, 조르바필름

  
하지만, 아쉬운 점은 유관순의 실상을 실제보다 축소해서 묘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회상으로 구성된 아우내 시위 장면도 그중 하나다. 현장에서 쓰러진 유관순 부모님의 순국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주인공 유관순이 입은 참상은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유관순의 감방 동료이자 독립운동가인 어윤희가 유관순한테 들은 사실을 토대로 그때를 회고한 적이 있다. 이정은의 < 3·1운동의 얼, 유관순 >에 어윤희의 언급이 소개돼 있다. 일제 헌병이 칼 달린 총을 들고 유관순한테 달려드는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다.
 
"헌병이 쫓아와서 맨 가운데로 달려가 유관순이 들고 있는 작대기를 칼로 쳐서 분질렀습니다. 그리고 창으로 앞에서 찌르라 치면(서), 뒤로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창 끝에 무슨 약을 칠했는지, 창에 찔린 처녀가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 않고 항상 고름이 나서 감옥에서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칼에 찔린 유관순은 그 상태로 끌려갔다. 이 상황에서 부모님이 순국을 했다. 어윤희의 언급이 이어진다.
 
"어머니·아버지는 일본 헌병들이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면서 차고 때리고 하는 그 뒤를 쫓아가면서 '만세!', '만세!' 하고 부르짓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헌병대 앞까지 들어갔다가 그놈들 한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관순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유관순은 목숨은 건졌지만, 칼에 찔려 부모님보다 먼저 쓰러졌다. 나중에 체포돼 이송되는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발길질과 주먹질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몸 상태로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갔기 때문에, 수감 초기부터 건강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보다 약하게 묘사된, 유관순의 옥중 투쟁

영화에서는 처음 수감될 당시 유관순의 몸이 비교적 온전했던 것처럼 묘사된다. 수감 기간 동안 그의 육체가 망가지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사실과는 좀 다른 대목이다.
 
또 영화에서는 유관순의 옥중 투쟁도 실제보다 약하게 묘사됐다. 실제의 유관순은 거의 일상이다 싶을 정도로 감방 안에서 만세를 외쳐댔다. 이정은 책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이다.
 
"유관순은 감옥 안에서도 수시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다른 감방에서도 이에 호응하곤 했다. 그러고 나면 분위기가 술렁술렁거렸다. 그때마다 유관순은 끌려나가 발길로 모진 매를 맞았다."
 
유관순의 옥중 투쟁은 다른 수감자의 간곡한 부탁으로 가라앉았다. "만세 부르는 것도 좋으나 몸만 상하고 효과는 적으니 ··· 뿐만 아니라 동지들의 신상에도 관계가 되는 것이니, 제발 만세를 그만 불러라"라는 부탁을 듣고 중지했다고 이정은 책은 말한다. 비교적 차분한 영화 속 유관순과 달리, 실제의 유관순은 미칠 듯한 목소리로 감옥을 울려댔던 것이다.
 
1864년에 로버트 로우리(Robert Lowry)가 지은 기독교 찬송가 '우리 그 강가에서 만날까요?(Shall We Gather at the River)'에다가 누군가 가사를 붙여 만든 '3·1절가'란 노래가 있다. 상하이 등 중국에서 3·1절 기념식이 열릴 때 제창됐던 노래다. 그 노래 2절 및 3절은 이렇다.
 
잊지 마러라 삼월하루, 반도에 소년소녀들아
자자손손이 전해가며, 천만대 가도록 잊지 마라
 
십년간 받은 원수 치욕, 이 날에서 버렸고나
삼월 하루를 기억하고, 우리의 원수를 잊지 마라
 
3월 1일을 잊지 말자는 가사처럼, 유관순은 법정에서도 감옥에서도 목숨을 다해 만세를 외쳤다. 그런 불굴의 투쟁 끝에, 차디찬 감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유관순의 그 같은 투쟁 정신을 비교적 잘 표현했다. 일부 아쉬운 점도 있지만, 유관순의 가슴 아픈 투쟁을 우리에게 잘 전달하는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 서대문형무소 어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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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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