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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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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나에게 나타난 여러 가지 징후는 매우 미심쩍었다. 나는 매일 아침 고통 속에서 눈을 떴다. 몸을 약간만 움직여도 통증을 느꼈고 모든 근육과 관절이 이처럼 골고루, 공평하게 쑤신다는 사실에 놀랐다. 거울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정말 끝이야.' 

그러나 해가 질 무렵, 나는 또 그곳으로 갔다. 어둑한 계단을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금속과 고무, 지하의 냄새를 맡았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의 쇳덩이와 밴드에 눈길이 갔다. 오늘은 또 어떤 종류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 

누군가에겐 이것이 위험한 남자와의 피가학적인 러브 스토리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오의 이야기'도, '나인 하프 위크'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아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사랑의 징후처럼, 자율성을 잃고 휘둘렸던 것은 사실이다. 맨몸운동에는 실로 너무 깊숙이 얽혀서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랑처럼 지독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운동이 대세였던가? 맨몸운동은 현대적인 스타일의 운동법이 휩쓸고 간 자리를 차지하면서 급부상했다. 원래 유행은 돌고 돈다. 바지통이 한없이 좁아지다가 다시 헐렁해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어느 날부터 사람들은 첨단 기계와 프로틴(단백질보충제)의 도움을 받아서 근육을 인위적으로 디자인하다시피 하는 운동법에 질려버렸고 대신에 몸의 무게를 이용하는 고대의 운동법에 관심을 보였다.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이 운동은 '남자의 운동'으로 통했다. 근력을 키우기에 좋은 운동이라고 홍보한 탓에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맨몸운동의 바이블로 통하는 '죄수 운동법'의 저자 폴 웨이드도 체조 선수 출신의 남성이고 그의 추종자도 대부분 남성이었다. 그는 무려 19년이나 교도소에서 복역했는데 맨몸운동 덕분에 운동 전문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죄수와 맨몸운동의 만남.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맨몸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몸과 의지, 약간의 공간이라는 점과 여타의 재미있는 운동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완성되는 점에서 교도소는 맨몸운동에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내가 처음 맨몸운동을 배운 곳도 교도소를 연상케 하는 크로스핏 박스였다. 훈련하는 내내 '이건 죄수나 할 법한 중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힘들고 지루했다. 버피, 푸시업, 핸드 스탠드, 스쾃, 레그 레이즈, 런지, 플랭크 등 여러 가지 동작을 배웠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풀업(턱걸이 동작)이었다.

운동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 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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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배와 어깨, 등의 힘이 받쳐줘야 하고 고관절이 리듬을 타야 한다. 몸무게가 작게 나가는 사람이 훨씬 유리하므로 어깨와 등의 힘이 부족하고 체격이 큰 나는 악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인내심'이다. 풀업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한 가지 동작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풀업이 될 듯 말 듯 할 때마다 훈련을 중단한 나는 아직도 밴드에 의존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제야 영화 터미네이터나 지아이 제인의 여성 전사가 어두운 창고 같은 곳에서 풀업을 하면서 등장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래서 버피나 플랭크, 핸드스탠드 푸시업이 상대적으로 쉬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운동은 종목을 불문하고 연습이 유일한 답이요, 진리라고 하지만 맨몸운동은 특별히 발전이 더딘 것을 각오해야 한다. 발전하고 싶으면 모든 자율성을 잃은 죄수가 돼서 어제 같은 오늘,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을 견뎌야 한다.

나는 번번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허술하게 작동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고작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 같은 착각이 온 마음을 지배했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자 그토록 자유가 간절할 수 없었다. 가장 싫어하는 버피를 오십 개쯤 하고(심박 수가 임계점에 달해서 심장에 마비가 올 것 같았다) 스쾃을 백 개쯤 하고(허벅지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캐틀밸 스윙을 할 차례가(허리가 꺾일 것이다) 됐을 때 불현듯 익숙한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이건 스톡홀름 증후군이야.'

가해자에게 이입하고 고통스러운 유대를 끊어내지 못하는 심리적 병리 현상. 복잡한 권력 관계에 놓인 현대인은 누구나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는다고 하지 않던가. 맨몸운동을 끊어내지 못하는 나의 심리 상태를 병증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온갖 번민에 사로잡히는 동안에도 근육은 찢어졌다가 아물었다. 어떤 부위는 점점 단단해졌다. 나는 급여가 입금된 걸 확인한 회사원처럼 슬그머니 생각을 바꿨다. 그래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보다 근육이 찢어지는 게 낫잖아? 스트레스로 목덜미를 잡을 바엔 심박수를 올리자. 그렇게 번민과 만족을 오가며 밀고 당기는 사이에 근력과 심폐력, 지구력 등 통칭 체력이라고 불릴 만한 힘이 조금씩 생겨났다.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무렵에 잃었던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 몸과 그날의 운동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도전할 것인가? 안전하게 연습만 할 것인가? 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닌 능력의 최대치를 알아야 했고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그리고 몸의 어디가 강하고 약한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도, 몸을 보호하는 것도,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내 몫의 일이다. 나는 운동을 끝까지 해내는 주체인 동시에 나를 훈련하고 전략을 세우는 코치이자 감독이 됐다. 

인생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인생의 주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인내일 것이다. 진정한 주체가 될 때까지, 인내하며 힘을 기르는 것. 어리석은 마음을 다독이며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렇게 보면 인생도 절대 복잡하지 않다. 맨몸으로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이 운동처럼 말이다.

태그:#운동하는여자, #맨몸운동, #스쾃,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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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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