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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정교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의 사랑의 무대가 된 월정교가 복원되었다.
▲ 경주 월정교 신라시대 원효와 요석의 사랑의 무대가 된 월정교가 복원되었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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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일어났던 신라인들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재미있게 전해져 오고 있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를 비롯하여, 김춘추와 문희의 사랑 이야기 등 여러가지 설화들이 경주와 함께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원효대사가 파계를 감행하면서까지 요석공주와 맺은 사랑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고 생각도 많이 하게 하는 설화일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의 무대가 되었던 요석궁(瑤石宮)과 문천(蚊川)에는 월정교가 찬란하게 세워져, 이제 역사속에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로 각인되게 되었다.
 
월정교 복원은 2006년부터 시작하여 510억 원이라는 큰 예산을 들여, 문루(門樓)와 누교(樓橋, 지붕덮인 다리)를 비롯하여 주변 일대를 문화유적지로 조성하는 공사이다. 이미 월정교 부분은 공사가 다 이루어져 개방까지 되어, 관람객들이 다리 위를 오가며 누교와 문천의 흐르는 물을 구경할 수 있다.
 
다리 길이는 66미터 정도인데 아주 고풍스럽고 멋있게 복원이 되어, 강바람을 시원하게 느끼면서 신라의 옛정취를 맛볼 수가 있어 좋다. 가슴을 펴고 다리 위를 천천히 활보해가면 마치 스스로 원효대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아름다운 요석공주를 그리는 연정(戀情)이 솟아나기도 한다.
 
월정교 남쪽 문루 월정교 글자를 흘려 새긴 현판이 붙어 있다.
▲ 월정교 남쪽 문루 월정교 글자를 흘려 새긴 현판이 붙어 있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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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누게 되는 스토리도 월정교 앞의 게시판에 상세히 기술해 놓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의 딸이었는데 화랑 김흠운에게 시집을 갔으나 김흠운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여 과부가 되어 딸을 데리고 요석궁에서 살게 되었다. 공주는 원효대사의 설법을 듣고서 연모하게 되어 마음을 담은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하면서 애정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원효가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공주는 상심하여 상사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어느날 원효가 거리에서 큰소리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몰부가(沒斧歌)를 불렀다.
태종무열왕이 그 뜻을 이해하고 요석공주와 연결시켜 주려고 원효를 찾게 하여 요석궁으로 데려가라고 하였다. 관리가 문천교를 지나는 원효를 발견하고서 다리 아래로 밀어 물에 빠뜨리고 젖은 옷을 말린다고 요석궁으로 데려갔다(원효가 직접 뛰어내렸다고도 함). 요석궁으로 간 원효는 옷을 말리다가 요석공주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사흘 후에 궁을 떠났다. 
 
월정교 내부 모습 굵은 기둥들이 지붕을 바치면서 길게 이어져 있다.
▲ 월정교 내부 모습 굵은 기둥들이 지붕을 바치면서 길게 이어져 있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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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사랑을 맺은 역사적 시기를 태종무열왕의 재위 후기인 655년에서 66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원효의 나이는 39세에서 44세에 해당되고 요석공주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청상과부였다고 하니 20대의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40전후의 왕성한 중년 사내와 20대의 청상과부가 만났으니, 아마도 세속의 남녀라면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원효도 이미 파계를 결심하고 감행한 사랑이었으니 여느 사내처럼 공주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 사흘간의 열렬한 사랑으로 아들 설총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부모의 우수한 자질을 물려받은 설총은 천재적인 학자가 되어, 신라 문자인 이두를 고안하는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승려가 되어 금욕의 수련을 하던 원효가 요석공주를 받아들이며 파계를 감행한 구체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원효가 부른 노래 몰부가만을 가지고는 그 동기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뛰어난 후손을 만들어 세상을 구하는 인재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그 노래가 후손을 만들겠다는 뜻만 들어 있는지, 아니면 더 원대한 뜻이 숨어 있는지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원한 해석이 없는데, 원효가 워낙 큰 인물이다 보니 누구도 그 속마음을 함부로 풀이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월정교 북쪽 문루 월정교 글자가 바르게 새긴 현판이 붙어 있다.
▲ 월정교 북쪽 문루 월정교 글자가 바르게 새긴 현판이 붙어 있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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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 수련을 하는 승려가 파계를 했으면 비난의 대상이 될텐데, 원효의 요석공주와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운 설화로 전해져오니 모순적이기도 하다. 아마도 원효의 파계가 단순한 욕정의 발로가 아니라, 불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중속에 뿌리 내리려는 고심에서 나온 행위라고 좋게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랑으로 파계를 하고난 후에는,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 하층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불교를 전파하였던 것이다.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파격적인 처신을 하면서, 무애(無碍)의 경지로 나아가 신라 불교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불교사의 불멸의 명언이자 염불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만들어, 불교를 누구나 가까이 하며 믿을 수 있는 대중종교로까지 확산시켰던 것이다.
 
이제 머잖아 월정교 일대가 역사유적지로 완전히 복원되면, 천년고도의 경주에 매우 아름답고 유서깊은 관광명소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게 될 것이고,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도 더욱 아름답고 재미있는 스토리로 되살아날 것이다. 
 
경주 문천 월정교에서 내려다 본 문천으로 원효대사가 뛰어내렸다고 전해 온다.
▲ 경주 문천 월정교에서 내려다 본 문천으로 원효대사가 뛰어내렸다고 전해 온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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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원효대사를 흉내내어 월정교를 활보하며 몰부가를 부르고, 그 아래 문천의 물로 뛰어드는 스님도 나타나 매스컴의 화제로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평소에 문천의 물이 깊지 않아 물에 뛰어들어도 허리춤 정도일 것 같고, 익사할 깊이는 아니라서 목숨을 잃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월정교가 단순히 화려하게 복원된 역사 유적지가 아니라,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더욱 의미깊은 관광명소가 된다.
 
월정교의 지붕 아래 난간에 앉아서 문천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인연을 맺는 정경을 떠올려 본다. 원효대사가 여기서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눈 일도 중생을 위해 걸어간 길인지 되물어 보지만 생각은 간단히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계율이 충돌하는 지점이고, 파계와 구도(求道)가 혼재하는 일이기도 하여 판단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읊으면서 원효대사의 마음이 되어보려 하는데, 족탈불급(足脫不及)의 수준에 불과한 속인에게는 좀체로 잘 되지 않는 일이다
 
월정교 난간 월정교 난간 너머로 문천이 보인다.
▲ 월정교 난간 월정교 난간 너머로 문천이 보인다.
ⓒ 배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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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월정교 남쪽 입구로부터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서 머리를 깍은 원효대사가 활보하면서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다리 북쪽의 입구에는 곱게 차려 입은 아름다운 요석공주가 커다란 기둥 뒤에서 고개를 내밀며 스님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원효대사가 다리의 중간쯤에 오는가 싶더니 날렵하게 몸을 날려, 어느새 문천 아래로 뛰어들고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일었다. 요석공주가 다리 위를 달려와 난간에 올라서서 아래로 고개를 숙여, 문천에 빠진 원효대사를 바라보며 요염하게 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사라지고 다리 건너 요석궁에서 풍악 소리가 들려나오고, 공주의 아름다운 웃음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이렇게 혼자서 월정교 난간에 걸터앉아 잠깐 꿈을 꾸어보는 것도, 인생에 흔치 않은 재미있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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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촌학당에서 강학을 하고, 경주의 시골집에 내려가 나무도 가꾸면서 인문학 공부와 글쓰기를 하고 있음 저서는 '사기(史記)의 인간학'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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