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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지혜는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교수이며 <선량한 차별주의자> 저자입니다
[편집자말]
 
 21일 오후 동구 초량동 장애인종합회관 앞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지나고 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자료사진)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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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가지세요." 이 말은 장애인이 많이 듣는 모욕적 표현의 하나로 꼽힌다. 말하는 사람은 선의로 한 말일 텐데 이 말이 모욕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장애인의 삶을 마치 희망이 없는 것처럼 판단하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가지라'고 하는 말은 마치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게 들린다.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잠시 시간을 내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꽤 무례하고 모욕적임을 알게 된다.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그렇게 말한다면 말이다.

말하는 사람의 선한 의도가 듣는 사람에게는 선하게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많은 소수자들이 이런 경험을 한다. 이주민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라고 하는 말은 칭찬 같지만, 함께 살아도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한국인이 되어야 바람직한 것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주민이라면 아마도 그 의미를 빨리 알아차릴 것이다.

만일 이주민이 아니라면 잠시만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보면 좀 더 이해가 된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이런 말이 어떻게 배타적으로 들리거나 이주민으로서의 복합적인 정체성을 무시한 한국 중심적인 생각을 깔고 있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선의에도 상처 입는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그 잠시의 시간을 내어 상대의 입장을 살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냐고 말하기도 한다. 말하는 사람의 선의를 듣는 사람이 고맙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서운해 하는 경우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선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만큼 서운한 때도 없다. 게다가 그 선의로 내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헌신했을 때, 그 정성을 몰라주는 상대가 야속해진다. 우리에겐 자신의 선의와 헌신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슴속 어딘가 깊숙한 곳에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선의가 상대방에게 모욕으로 느껴지는 건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런데 아마도 실제로 이렇게 직접 속마음을 꺼내어 이야기하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의 말을 모욕이라고 느꼈더라도 그 사실을 표현하지 않고 넘어가곤 한다. 상대의 선의를 알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도 넘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처가 없는 것이 되진 않는다. 차곡차곡 모욕감이 쌓이는데 듣는 사람에게 계속 감당하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중 과연 누가 바뀌어야 하는 건지 생각하게 된다.

단지 말의 문제는 아니다. 말이 품고 있는 생각이 문제라면, 그 생각은 결국 태도와 행동으로 나오곤 한다.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한 사람이, 혹시 자녀가 장애인과 같은 반에서 지내는 걸 반대하지는 않을까? 이주민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다고 격려를 건넨 사람이, 혹시 동네 모임에서 이주민을 대표자로 뽑는 것에 반대하진 않을까? 이 상황은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애인이나 이주민을 함께 생활하는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무언가 부족하고 열등하고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격려와 거부 두 가지가 같은 사안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들이 동등한 구성원으로 다가서면 불편해 하곤 한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꽤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 어쩌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건 상대의 열등함을, 반대로 말하면 나의 우월함을 확인시켜주는 경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통해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상대를 돕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나의 우월한 위치를 전제로 한다면 오히려 상대의 불행이 계속되도록 놔두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이 어쩌면 불평등과 차별에 기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생각한 행위가 실제로 어떤 효과로 이어지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한국 사회를 둘러보면 많은 소수자들이 일상의 장소에 잘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장애인을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웃에서 친구와 동료로 일상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수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시설과 같은 특별한 장소로 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누군가가 사회복지시설에 찾아가 활동을 하는 것은 선한 의지의 행동이겠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계속하여 사회에서 분리되고 고립되어 생활하는 상황은 누구의 책임이라고 보아야 할까.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표지 사진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표지 사진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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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지만 사회복지사로서 활동하고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서, 과연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인가 고민하곤 했다.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종종 '천사'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얼핏 칭찬과 존경같이 보이지만, 무조건적인 희생을 부당하게 강요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헌신'의 결과가 상대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도 아니라면, 오히려 그 자체가 구조적 차별의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척 두려운 일이 된다.

소수자와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하고 이들에게 험난한지 잘 알고 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에게 더 많이 노력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부모가 없어서, 지방 출신이라서, 배우지 못했으니 '극복'하라고 하는 말들은, 세상의 차별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나온 말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격려일까. 혹시 이 말을 함으로써 그 삶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닌지,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의 책임을 그 불이익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면서, 상대를 위한 선한 행동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돕는' 대신 '함께'

어쩌면 누군가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그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묵인한 나의 책임은 외면하면서, 이를 감당해야 하는 모든 짐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말이기 때문에 더 모욕적일 수 있다. 단지 선의라는 이유로 정당화하기엔, 이 거대한 불평등과 차별을 이겨내라는 그 요구가 개인에게 너무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영화 <아프리칸 닥터>에서는 이민자 아버지가 자녀에게 '우리 같은 흑인은 실력이 좋아야 무시 당하지 않는다'며 학교생활을 잘 하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자녀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흑인은 더 노력해야 하는데요?"

특정한 소수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성별, 나이, 장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지역, 학력, 피부색, 출신 국가, 가족 상황, 건강 상태, 경제적 수준 등 온갖 이유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배척하고 불이익을 주는 차별이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 어떤 면에서 다수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기도 하지만, 소수자가 되어 더 많이 노력하라고 요구받기도 한다. 차별은 이렇듯 복잡한 현상이지만, 그렇기에 그 경험들을 반추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도 한다. 다수자의 위치에서 보지 못하는 차별이 있더라도, 잠시 멈추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차별받지 않기 위해 평생에 걸쳐서 하는 고단한 노력들을,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바꾸어 보면 어떨까.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그 선한 의지를, 불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평등하게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선한 의지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을 새로 배우면 좋겠다. 누가 누구를 '돕는' 위계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세상을 '함께' 만드는 동료의 관계로 말이다. 모두가 존중받으며 어울려 사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쏟으면 좋겠다. 이런 연대의 약속이 희망을 가지라는 무책임한 말보다 우리 모두에게 훨씬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천주교인권위원회가 발행한 38회 인권주일 자료집 <교회와인권>에도 실린 글입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은이), 창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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