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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 삼례 역사광장 전경.
 전북 완주 삼례 역사광장 전경.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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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11월 1일 전라북도 삼례에서 동학도인들의 집회가 열렸다.

동학도인들 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려온 백성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모인 사람이 1천명에 이르렀다. 동학도인들은 교조의 신원과 도인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 집회에는 김개남과 도강 김씨 도인들도 다수 참여하여 그의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동학도인들이 충청ㆍ전라 감사에게 보낸 '소장'을 소개한다.
 
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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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도내 동학유생 등 (소장)

각 도내 동학유생들은 감사께 글월을 올린다.

엎드려 저희들은 의송장을 올린 지 이미 6일이 지난지라 각하의 처분을 삼가 고대하면서 길가에 머물면서 찬바람 속에 노숙하며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다. 날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각하의 하늘같은 혜택 뿐이다. 수많은 저희들은 돌아가 살 곳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까.

각 고을의 지목으로 날로 박해함이 심하니 수재(守宰)로부터 그 밑에 있는 이서군교(吏胥 軍校)가 간악하고 교활한 향리들까지도 거리낌 없이 살림을 뒤져 약탈하기를 마치 자기물건처럼 할 뿐만 아니라 구타하고 학대하니 견딜 수가 없다. 불쌍한 이 중생들은 어디에다 호소하리까.

순상(巡相) 각하께 엎드려 비는 바는 거의 죽어가는 중생들을 다만 불쌍히 여기시어 임금님께 상소하여 선생의 숙원을 풀게 하시고 각 읍에 공문을 발송하여 아전들이나 교활하고 간악한 향리들의 행패를 엄금토록 하여 수만의 중생들이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힘입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주면 각하의 하늘같은 덕을 평생 잊지 않겠다. 세세히 굽어 살피어 가련하게 여겨서 구원해 주기 천만번 엎드려 비나이다. (주석 6)

  
판화 형식을 빌어 설치한 '선양의 장'의 부조와 '대동의 장'의 조형물.
 판화 형식을 빌어 설치한 "선양의 장"의 부조와 "대동의 장"의 조형물.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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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에서는, 동학의 공인은 정부가 결정할 일이나 부당한 탄압은 없애겠다고 약속하였다. 삼례집회를 주도한 지도부는 이 답변을 듣고 도인들이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령했으나 김개남 등 일부 도인들은 지방을 옮겨가며 별도의 집회를 계속하였다. 그만큼 동학의 조직은 튼실한 결합성을 갖게 되고, 도인들의 시대정신이 바뀌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도 감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도인에 대한 재산 갈취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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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는 "도인들에게 병복(兵服)을 입혀 조정의 간당(姦黨)들을 소탕하고 정부를 개혁하자"는 강경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최시형ㆍ손병희 등 교단 지도부가 강경론 대신 국왕에게 직접 상소하는 계획을 세웠다.

삼례도회소에 참집한 동학도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과 동학에 대한 지방관청의 탄압 중지를 결의하고, 이를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식에게 진정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경식은 이 진정서를 수리하였으나, "동학은 조정에서 금하였기 때문에 이 이단에 부화에서 범죄를 범하지 말고, 곧 퇴거해서 다시 미혹되지 말라"고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반답에 대해 동학도는 몹시 분격하였다.

그래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12월 25일 전주집회를 개최하고, 관찰사에게 재차 진정서를 내고, 각지에서 동학도의 재산을 몰수해서 사복한 관헌이나 군대의 단속을 요구하고, 또한 교조의 신원과 함께, 동학을 이단자로 규정한 이유를 추궁하였다.

이 동학도의 요구에 대해 관찰사는 조정의 방침이 이미 동학을 이단종교로 규정하고 있고, 조정의 지시에 의하여 동학을 금지할 뜻을 분명히 하였다. 거기에서 전주에 모인 동학도는 지방의 관헌으로서는 해결되지 못함을 인득하고, 직접 정부에 상소하기로 결정하고, 그 집회를 해산하였다. (주석 7)


주석
6>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제2편, 48쪽.
7> 신국주, 앞의 책, 11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삼례회집, #삼례도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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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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