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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편집자말]
한빛의 초등학교 입학식. 서둘러 갔지만 이미 식이 끝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엄마손을 잡고 흩어지는 한빛 친구들을 부랴부랴 붙잡고 사정사정해서 급히 사진기를 들이댔다. 허겁지겁 셔터를 누르며 카메라 렌즈 속에 담긴 고사리같은 아이들을 고정시키는 순간, 아차 했다. 친구들의 머리는 약속이나 한 듯 가르마가 한쪽으로 선명했고 한결같이 가지런했다. 또 모두가 꼬마 신사처럼 새 자켓을 입고 있었다. 내 눈에는 어색했지만 둘러보니 입학식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한빛이가 "엄마, 왜 나는 저런 옷이 없어?"할까봐 조마조마 했다. "엄마, 쟤 머리는 어떻게 저렇게 빳빳해?"하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불안했다. 한빛을 거울 앞에 앉혀놓고 머리를 빗겨 본 기억도 없고 머리를 감기고도 수건으로 툴툴 털어내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엄마였다. 나중에 한빛이가 패션에 감각적이란 것을 알고는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가슴을 다 쓸어내렸다. '민속촌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아서 고마웠다.

한빛이 5학년이고 한솔이 3학년이던 2000년 1월 겨울방학. 겁도 없이 유럽배낭여행을 갔었다. 완전한 배낭여행은 아니고 호텔과 비행기표는 여행사에서 해주고 우리는 종일 자유롭게 일정을 짜서 다니는 여행이었다.

모두들 엄마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배낭여행을 간다고 놀라고 부러워했지만 나로서는 겁나고 대단한 결심이었다. 해외여행이라고는 단체로 일본 교육시설을 한 번 다녀온 경험만 있을 뿐 완전 초보자였다. 친정식구들도 영어도 하나도 못하는 40대 아줌마가 아이들 데리고 위험하게 무슨 배낭여행이냐며 패키지로 가라고 말렸다. 주변에서 하도 겁을 주니까 나역시 여행 떠나기 전 날까지도 취소하고 싶을 만큼 덜덜 떨렸다.

솔직히 출발일을 1월 9일로 정한 것도 겁나서였다. 방학하고 12월에 곧바로 여행을 떠나면 모든 게 여유로웠지만 여행 중에 연도가 2000년도로 바뀌어 이때 비행기타면 사고날까봐 머리 굴려 안전하게 정한 날짜였다. 당시 2000년 1월 1일은 밀레니엄이라고 시간이나 모든 시스템에 대 혼란이 올지도 모른다고 1년 전부터 야단법석이었기 때문이다. 열흘 정도 시험기간을 거쳐 시스템에 이상이 없으면 떠나야지 했다. 나는 그정도로 겁쟁이였다.

문제는 그때도 나는 '민속촌 엄마'였다. 배낭여행에 대해 무지하기도 했지만 배낭이란 말을 내마음대로 해석해 여행 복장을 우선 집에서 가장 낡고 버려도 아깝지 않은 옷으로 준비했다. 그때 사진들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두 아이나 나의 행색이 형편없었다. 무릎이 나온 바지와 지퍼도 잘 안 잠기는 아이들 코트, 오래 입어서 무릎이 반질반질하게 닳은 내 바지. 낡은 큰 배낭. 공항에서 다른 일행들을 본 순간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또 민속촌 엄마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지금 같으면 유럽에서 기념으로 새 옷을 사서 입히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한빛 한솔한테 미안하다.

그래도 이런 실수와 미안함을 유일하게 상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빛에게도 두고두고 생색을 냈지만 유치원입학을 위해 엄마 아빠가 밤샘 줄을 섰다는 것이다. 첫 아이의 유치원은 설레기도 했지만 겁도 났다. 한빛에게는 첫 학교 아닌가? 그러나 다른 부모들처럼 사전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름 유명한(?) 유치원은 이미 입학전형이 끝나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카톨릭이고 한빛도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일단 성당유치원을 알아보았다. 의정부에는 지금은 주교좌성당인 의정부2동 성당에 성모유치원이 있었다. 원서접수는 월요일 9시부터인데 선착순이라 전날부터 줄을 선다는 말을 들었다. 성모유치원은 등록금을 모두 아이들 교육활동에 써서 수입과 지출이 0이라고 했다. 등록금외 추가로 내는 것도 없다고 했다. 한글이나 셈을 가르치지 않고 놀이위주라고 했다.

우리는 한빛이 갈 곳은 이곳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정보에 어두워 유명(?)유치원을 놓쳐 자책하던 우리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때우는 일이었다. 무려 이틀 전인 토요일 퇴근하자마자 성당으로 갔다. 어떻게 줄을 서는지도 모르고 유난떠는 것도 계면쩍어 성당 마당 한 구석에서 딴 일로 온 것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저녁때가 되자 우리 같이 절실한 부모가 있었는지 두 분이 입학신청을 위한 줄이라며 앞뒤로 섰다. 눈치만 보고 있던 한빛아빠가 냉큼 세 번째로 줄을 섰다. 그렇게 우리는 한빛을 성모유치원에 입학시켰다. 성모유치원의 교육과정은 우리가 보아도 만족스러웠고 한빛도 즐겁게 유치원생활을 보냈다. 한빛교육을 위해 부모로서 잘 한 일을 꼽으라면 이것 하나 밖에 없는 것 같다. 비록 민속촌엄마 골동품엄마지만 그래도 한빛에게 너의 유치원입학을 위해 밤새웠다는 것을 두고두고 생색내며 으쓱해했다.

2018년은 카톨릭 전례에 전대사(우리들이 지은 죄 때문에 받게 될 벌을 모두 면제해주는 은사로 죽은 자를 위해 양도할 수 있음)가 있는 해였다. 의정부 주교좌성당은 전대사 지정 성당이었다. 한빛 전대사를 위해 주교좌성당에 자주 갔었다. 20여년 만에 찾은 성당은 퍽 작았다. 새 성전을 지어서인지 유치원 행사가 자주 열렸던 그 넓던 성당 뜰도 원래 이렇게 작았나 할 정도로 많이 좁아보였다.

성당 앞문이 열려있는데 한빛이 있었다. 검고 긴 눈썹을 내리깔고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작은 기도손을 하고 있는 한빛이 보였다. 선하고 어린 양같이 예뻤다. 가슴이 쿵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빛아" 하고 부르려는데 순간 한빛이 흐릿해 졌다. 급히 눈을 비볐지만 어느 새 한빛은 사라졌고 그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귀엽고 사랑스럽던 우리 한빛이는 자기가 20대 후반에 힘들 것을 알았을까? 고통스러울 때 어릴 적 기도손을 했듯 간절히 기도할 수는 없었을까? 기도손을 할 때의 어린 한빛과 지금 내가 그리워하는 한빛은 다른 한빛인가? 한빛이 둘인 것 같아 한빛의 부재가 믿어지지 않는다. 저기 어린 한빛이 어느 새 성장해 지금이라도 한빛의 빈 자리를 채워줄 것만 같다. 꿈인가? 생시인가?

한빛이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
 

태그:#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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