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893년 11월 말목장터 봉기를 주도한 21명의 참여자들이 각 리(里)의 집강(執綱)들에게 돌린 사발통문.
▲ 1893년 11월 말목장터 봉기를 주도한 21명의 참여자들이 각 리(里)의 집강(執綱)들에게 돌린 사발통문. 1893년 11월 말목장터 봉기를 주도한 21명의 참여자들이 각 리(里)의 집강(執綱)들에게 돌린 사발통문.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전봉준은 동학농민봉기를 준비하면서 외지의 낯선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부르거나 자신이 직접 찾아가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때 만난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그는 동학의 접주로 동학지도자 손화중ㆍ김개남ㆍ김덕령ㆍ최명선 등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으며 나들이를 나갈 적에도 결코 혼자 다니지 않고 몇 사람 이상과 동행했다 한다.

그는 주로 밤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데 뿔뿔이 흩어져서 한 사람씩 방으로 들어가면 그 집 주인 말고는 함부로 그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또 부인네들이 밥을 지어낼 적에도 방안의 손님들이 산가지를 방 바깥에 내놓으면 그 숫자대로 그릇을 담아냈다고 한다. (주석 7)
 
동학혁명모의탑
 동학혁명모의탑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농민 60여 명은 1894년 1월 고부관아로 몰려가 군수 조병갑의 비행을 규탄하고 수세의 남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탐학의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의 요구를 일축하고 오히려 여러 사람을 붙잡아 심한 매질을 하거나 쫒아냈다. 농민들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고, 마침내 폭력으로 조병갑을 추방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전봉준이 주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치밀한 전략을 짰다. 농민들을 다수 동원하여 이전부터 구상해 온 농민혁명을 감행하여 광제창생을 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지방에서 훈장ㆍ약업 등을 하면서 주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던 터였다.

여러 지역에 믿을만한 동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들을 봉기군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동학접주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봉기를 준비하여 왔다. 그리고 때를 놓치지 않고 결행하였다.

전봉준은 김개남ㆍ정익서ㆍ김도삼 등과 협의하여 2월 14일 밤 태인현 주산리의 동학 접주 최경선의 집에서 교도 중에서 건장한 사람 300여 명을 모으고 다시 답내면 마항리까지 30여 리의 길을 걸어서 전에 도모했던 700여 명의 농민과 합류하였다. 이 자리에서 지도부는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밝히고 관아로 쳐들어가 조병갑을 처단할 것을 역설하였다. 
말목장터에서 옮겨와 보존 처리된 말목장터 감나무.
 말목장터에서 옮겨와 보존 처리된 말목장터 감나무.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당시의 긴박했던 거사 광경을 목격한 박문규라는 사람이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갑오년, 내 나이 16세 되던 해의 정월 초 팔일은 말목(馬頏) 장날이었다. 석양의 동네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더니 조금 있다가 통문이 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동네에서 징소리며, 나팔소리, 고함 소리로 천지가 뒤끓더니 수천 명 군중들이 내 동네 앞길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조병갑이를 죽인다고 민요가 났다.

수만 군중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몰려갈제 군수 조병갑이는 정읍으로 망명 · 도주하여 서울로 도망하였다. 그는 본시 서울의 유세객이다. 민요군은 다시 평명(1월 10일 아침)에 말장터로 모여 수직(守直)을 하니 누차 해산명령이 내렸다. (주석 8)

 
모의탑에 새겨넣은 사발통문 형태. 네모 안에 써진 것이 전봉준의 이름이다.
 모의탑에 새겨넣은 사발통문 형태. 네모 안에 써진 것이 전봉준의 이름이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전봉준과 지도부는 고부관아를 점거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선포하였다.

1. 관속 중에 군수와 부동하고 탐학한 자를 처단한다.
2. 군기고를 열어 총 · 창 · 탄약을 회수한다.
3. 읍내의 청죽을 베어 죽창을 만들어 무기가 없는 자에게 주라.
4. 옥문을 열어 민란의 장두와 원통하게 갇혀 있는 백성을 석방하라.
5. 창고를 열어 빈민을 규휼하라.
6. 읍사를 정리하라.


전주감영은 고부민란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발칵 뒤집혔다.

김문현은 주모자를 체포하고 난민을 효유키 위하여 병졸 40명을 변복하여 고부에 침투시켰다. 고부의 농민봉기군은 외부 출입자들과 식별하기 위하여 비표처럼 왼손 손목에 노끈을 매고 있었는데, 감영의 병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잠입했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이들 중 책임자 군위(軍尉) 정석진은 살해되었다.

이날 밤 전봉준은 대오를 둘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향했다. 예동에서 고부읍으로 통하는 길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치(天峙)재의 서쪽으로 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영원(永元)을 거쳐가는 길이다. 모두 고부읍까지 20리 안팎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주력부대는 영원길을 거쳐 고부관아로 들이닥쳤다.

농민들은 도중에 죽창을 만들어 꼬나들고 11일 (양 2월 14일) 새벽 동헌에 들이닥치니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했다. 날이 밝자 일부 농민들은 말목장터로 나와 원한의 표적이었던 만석보로 몰려가 이를 허물고 예동두전(斗田)에 쌓아놓은 보세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말목장터에 자리를 잡고 백산으로 진출하여 진을 치기로 했다. (주석 9)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1811년 (순조 11) 평안도 농민들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10여 개 지역의 관아를 점령한 이래 80여 년 만에 고부지역 농민봉기군이 지방관청을 다시 점거한 것이다. 홍경래의 봉기군은 관군에 포위된 채 4개월을 버티다가 성이 폭파됨으로써 진압되고 말았지만 전봉준부대는 달랐다.

그 때 조병갑은 이미 도망쳤으므로 남아있던 관리들을 감금하고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화승총ㆍ검ㆍ창)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군수가 불법으로 징수했던 세미를 전부 농민에게 반환하고 다시 또 다른 징수의 구실이 되고 있던 만석보의 신보를 파괴하였다.

전봉준은 폭동에 참가했던 농민들을 결속시켜 대규모의 폭력투쟁을 전개하여 봉건통치자에게 큰 타격을 가할 작정이었지만, 반면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다수의 농민은 고부의 소위 유지들의 권유에 따라 25일에는 거의 전부가 해산하고 말았다. (주석 10)

지도부는 일단 봉기군을 해산시켰지만, 그렇다고 거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보다 치밀한 전략의 수립이 요구되었고 동지들과의 협의와 역할분담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략적인 해산' 이거나 '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였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주석
7> 이이화,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①」, 『역사비평』, 1989. 겨울, 222쪽, 역사문제연구소.
8> 「석남(石南) 역사소설 - 박씨정기(定基)역사」, 『한국학보(71)』부록, 8쪽, 일지사, 1993.
9> 이이화, 앞의 글, 226~229쪽.
10> 『조선근대혁명운동사』, 76~77쪽,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한마당.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 #김개남장군 ,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동학농민봉기, #조병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